94화
후작에게서 아란의 재산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 들은 후, 대공의 머릿속은 종일 그 생각으로 복잡했다. 후작저를 나와 황궁에 머무는 내내, 그는 도무지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
그는 죽은 제 부모를 떠올렸다. 선대 대공 부부는 그를 황녀였던 아란과 혼인시키기를 꺼렸었다. 그녀가 지나치게 몸이 약하다는 게 그 이유였다. 아무리 지체 높고 아름다워도 후사를 잇지 못하는 건 치명적인 결점이었다. 약한 몸 때문에 임신 전부터 출산 이후까지 내내 고생했던 경험이 있는 대공비는 특히 더 반대했다.
그럼에도 선선대 황제는 완강히 의지를 밀어붙여 황녀와 대공가의 혼약을 성사시켰다. 그 과정에서 대공가는 황녀 사후에도 그녀의 재산을 영구히 대공가에 귀속시킨다는 약조를 받아냈지만, 장사치처럼 후계와 재물을 맞바꾸었다며 씁쓸해하던 대공비의 얼굴이 아직도 선명했다.
그런데 이제는 가진 게 없다고?
그간 그는 아란의 재산 같은 건 알아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황족들의 개인 재산은 국가를 막론하고 산재해 있는 데다, 대체로 드러난 것보다 은닉된 것이 더 많아 전부 파악하는 건 불가능했다. 무엇보다 그가 관심을 둔 대상은 아란이었지, 그녀의 재산이 아니었다.
반란이 성공한 이후 죽은 황족들의 재산을 일부 거둬 수하들에게 나눠줬을 때도 그는 그녀의 재산엔 손대지 않았다. 아란 역시 재산과 관련된 일에 대해선 일절 이야기한 적 없었다.
대공은 퇴궁하자마자 사람을 시켜 5년 전에 아란이 재산을 루아잔에게 넘긴 일에 대해 알아보았다.
보고를 받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조금씩 다른 부분이 있긴 하지만, 후작의 말은 대체로 사실이었다.
그가 수도를 떠나기 직전, 아란은 갑작스레 금광 몇 개와 세티아 지방의 소유권을 루아잔에게 넘겼다. 형제들 사이에서 재산이 오가는 것은 신분을 막론하고 곧잘 있는 일이지만, 이건 규모가 지나치게 컸다.
아란은 순진하긴 했지만 아무런 조건 없이 이만한 재산을 넘길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아무리 루아잔이 달콤한 말로 꼬여냈다 한들, 그녀 본인이 이해할 만한 일이 아니면 설득하지 못했을 것이다.
대공은 5년 전, 갑작스레 내려진 사면과 작위에 대해 물었을 때 아란이 무슨 대답을 했었는지 떠올리려 했다. 그러나 기억나는 건 흐릿하게 웃던 얼굴뿐이었다.
만약 그녀가 사랑하는 반역자의 친아들을 사면하고 작위를 사기 위해 그만한 재산을 넘긴 거라면, 대공 자신이 그 마음을 이해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설명 못 할 일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서쪽 국경으로 징집당했을 때 그는 분명 동의서에 찍힌 황녀의 인장을 보았다. 그건 혼기가 찬 황녀가 천한 애인을 처리하기 위해 내린 명령일 수도 있고, 혹은 누이를 이용하기 위해 오라비들이 벌인 작당일 수도 있었다.
대공은 후자라고 생각했다. 아란이 그런 짓을 할 사람은 전혀 아니었으니. 그렇기에 그는 서쪽 국경으로 간 후에도 오랫동안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그러나 사정이 어찌 됐든, 대공이 버려진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아란은 그를 찾지 않았다. 지켜준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실컷 사랑을 속삭이고는 그를 죽음의 땅에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하다못해 그녀가 자신을 진심으로 마음에 담지만 않았어도 그가 서쪽 국경까지 갈 일은 없었을 것이다. 아란의 사랑이 무책임했기에 대공은 그녀를 원망했다. 다정한 만큼 무지한 그녀가 증오스러웠다.
그러나 그녀가 정말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았을까? 그만큼의 재산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불했던 그 소녀가, 정말로 한순간 사라진 연인을 찾지 않았을까?
대공은 보고서를 다 읽지 못하고 내려놓았다. 볼수록 등줄기가 섬찟했다.
그는 기만당했어야만 했다. 한순간 사랑놀이가 끝나 버려진 것이어야만 했다. 그렇게 믿지 않으면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시작된 의심은 걷잡을 수 없이 번지기 시작했다.
* * *
“보십시오, 폐하. 드디어 여신상이 완성되었습니다. 재료를 구하는 기간만 10년이 걸리고, 조각하는 데도 딱 그만큼이 걸려, 이제야 영광스러운 모습이 되었지요. 정말 아름답고 위엄이 넘치지 않습니까? 중간에 공사가 중단되지만 않았어도 조금 더 빨리 여신을 알현할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대사제의 설명에 아란은 주변을 바라보던 시선을 여신상으로 돌렸다.
그녀가 있는 곳은 막 완공된 한 신전이었다. 봄의 여신 브리이트를 모시는 그 신전은, 아란의 부황이 그녀의 탄생을 기념하여 짓기 시작한 곳이었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설계 시작부터 당대 최고의 건축가들이 투입되고, 해외에서 공수한 최고급 재료들을 쏟아부은 덕에 호화롭기 그지없었다.
공사 기간만 20년이 걸린 것만 보아도 선선대 황제가 이 신전 건설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즉위 전후로 일이 많았던 까닭에 공사가 몇 년간 중단되기도 했지만,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며칠 전 드디어 완공되었다. 그 기념으로 아란과 고위귀족들이 함께 신전을 방문한 참이었다.
“부황께서 이 자리에 계셨다면 무척 기뻐하셨을 텐데.”
아란은 여신의 자애로운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여신의 눈동자에 박힌 선명한 빛깔의 에메랄드는 부황이 오래 고심하여 고른 보석이라고 했다.
그저 딸이 태어났다는 사실이 기뻐 종교도 없으면서 신전을 지었을 부황을 생각하니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그리움이 몰려왔다.
그러다 문득, 그녀는 대공이 아까부터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제야 뒤늦게 이 자리가 그에겐 거북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옆을 보니 아니나 다를까, 그는 묵묵히 서서 여신상의 발치만 바라보고 있었다.
부황은 그녀에겐 한없이 자상한 아버지였지만, 그에겐 부모를 죽이고 그 본인의 인생마저 진창에 빠뜨렸던 장본인이었다. 아무리 그가 증오스럽다지만 여기까지 끌고 온 건 지나치게 잔인한 처사였다.
“대……”
말을 걸려던 아란은 잠시 머뭇거렸다. 그래도 괜찮지 않느냐는 마음과 이건 아니라는 불편한 감정이 뒤엉켜 그녀를 혼란스럽게 했다.
아란은 언제나 그가 괴롭기를 원했지만, 이것만큼은 제가 심했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그는 그녀 앞에서 그녀의 부모를 들먹이거나 하지는 않았다.
눈치채지 못했다면 괜찮았을 것을, 알고도 모른척하려니 그것이 더욱 불편하여, 아란은 결국 제 마음에 지고 말았다.
화가 난 듯한 옆얼굴을 보며 아란이 나직하게 그를 불렀다.
“대공.”
못 들었는지, 그는 아란을 돌아보지 않았다.
“로아크 대공.”
한 번 더 부른 후에야 그가 느리게 대답했다.
“예, 폐하.”
“많이 피곤해 보이는데.”
그녀의 시선이 이전과 비교가 안 되게 날카로워진 턱선에 닿았다.
사실 그가 말이 없어진 건 비단 오늘만은 아니었다. 무슨 생각을 골똘히 하는지, 최근엔 아란이 말을 걸어도 모를 때가 종종 있었다.
사정이야 어찌됐든, 즉위한 이후로 언제나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폈던 그였기에 그 미묘한 변화가 더 눈에 띄었다. 이런 적은 처음이라 아란은 요즘 자신이 그를 너무 몰아세운 게 아닌지 되짚어볼 정도였다.
“아닙니다.”
그가 뒤늦게 고개를 들어 여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몸이 좋지 않다면 먼저 자리를 떠도 좋네.”
보다 못한 아란이 권했다. 단둘이 있을 땐 결코 들을 수 없는 온화한 목소리였다.
“피곤해서 그랬나 봅니다. 괜찮습니다.”
“짐이 모자란 탓에 공만 격무에 시달리는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아.”
적어도 뒷말은 진심이었다. 평소라면 그의 흐트러진 모습을 보는 것이 마냥 통쾌했겠지만, 지금은 얹힌 듯이 거북했다. 늘 은근한 농담으로 대공의 속을 긁길 좋아하는 사일러스 공작도 대공의 안색이 너무 좋지 않으니 그저 입을 다물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대공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아란은 차라리 그가 빨리 돌아가 주었으면 했다. 그가 이곳에 있으니 마음이 불편해 부황과의 추억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기회를 노리던 아란은 잠깐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을 때, 빠르게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빈말이 아니니 돌아가도 좋아. 낯빛이 꼭 쓰러질 것 같잖아.”
“정말로 괜찮습니다.”
“억지로 있을 필요 없어. 이곳에 널 데려온 건 내 실책이었어.”
근래에 들어보지 못한 사과에 대공이 그녀를 아연하게 바라보았다. 그러자 아란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녀의 얼굴엔 죄책감이 떠올라 있었다.
죄책감이라니?
대공은 그 이유를 생각하다가, 뒤늦게 이 신전 건설을 명령한 사람이 누구인지 떠올렸다.
그녀의 추측과 달리, 대공은 그런 건 아무 상관 없었다. 선선대 황제가 남긴 가장 큰 흔적인 아란을 사랑하면서, 고작 건축물 따위를 신경 쓰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그리고 애당초 중단되었던 공사를 재개시킨 사람이 대공 본인이었다.
“혹시 정말 아픈 건 아니지?”
아란이 미간을 찌푸렸다. 대공이 아픈 건 아무래도 좋았으나, 적어도 여기선 아니었으면 했다. 그녀는 대공의 상태를 확인하려 손을 그의 이마에 갖다 댔다. 그러나 닿기도 전에 그가 먼저 한 발짝 물러섰다. 예상치 못한 거부에 아란도, 대공 자신도 놀랐다.
“난 그냥 많이 아픈지 보려고…….”
무안해진 아란이 엉겁결에 변명했다. 잠깐의 침묵 후에, 대공이 말했다.
“폐하의 말씀을 들으니 몸이 피곤한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럼 결례를 무릅쓰고 먼저 가보겠습니다.”
“그러든가…….”
그녀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는 아란에게 제대로 인사도 하지 않고 도망치듯 신전을 떠났다.
* * *
“오늘은 이만 돌아가 쉬어도 좋아. 어제부터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데.”
신전을 방문한 다음 날, 일정이 다 끝난 후에 평소처럼 대공이 자신을 따라오는 것을 본 아란이 말했다.
그의 얼굴은 어제보다 더 상해 보였지만, 며칠만 제대로 쉬면 금방 회복될 것을 알기에 그녀는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채찍으로 맞고서도 다음날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 움직이는 자였다. 다만 어제의 일이 아직도 조금 신경 쓰일 따름이었다.
대공 역시 미약한 죄책감이 남은 얼굴로 제 상태를 살피는 아란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악독한 척하고 있어도 여전히 그녀는 다정해서, 어제와 같이 사소한 일에도 미안해하며 마음을 썼다. 그런데 어째서 그를 버린 일은 미안해하지 않았을까.
강압에 못 이겨 자신의 말도 안 되는 꼬투리 하나하나까지 용서를 구했으면서도, 정작 그녀는 그를 버린 일에 대해서는 사과하지 않았다.
만약, 실제로 버린 적 없었기에 미안해하지 않은 거라면……?
그는 조금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