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하의 밤-93화 (93/146)

93화

계속 잠을 자지 못한 탓인지 머리가 멍했다. 보고를 듣던 대공은 결국 가신을 물리고는 눈을 감고 의자 등받이에 상체를 기댔다. 하루가 다르게 몸이 허물어지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가 걱정하는 건 제 몸이 아니었다.

그는 다시 눈을 떠 천장을 바라보았다. 달콤하지만 서늘하던 입맞춤이, 비수 같던 아란의 말이 어지럽게 머릿속을 떠다녔다.

어떻게 하면 자신을 화나게 할 수 있는지, 제 마음을 뭉갤 수 있는지 아란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대공 앞에서만 무자비한 폭군이 되어 그가 쥐여 준 권력을 휘둘렀다.

그는 평생 전쟁터에서 만났던 어떤 강적보다도 그녀가 두려웠다.

다른 남자와 아이를 만들어 오겠다니,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줄이야.

그 말을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미칠 것 같았다.

자신이 괴로워하는 것으로 그녀의 마음이 풀릴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감내할 수 있었지만, 그런 말을 듣고 참는 건 힘들었다.

어떻게 해야 아란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까.

대공은 제 안을 샅샅이 뒤졌다. 혹시라도 남아있을 에녹의 흔적을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 어리석은 소년은 이미 오래전에 죽어 사라졌다. 뒤틀린 애정과 집착을 유산으로 남긴 채. 그리고 그것들은 악취를 풍기며 썩어가는 중이었다.

“흐으…….”

말이 되지 못한 신음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에녹을 질투했다. 적어도 그 소년은 대공이 바라던 모든 것을 가졌다.

―에녹.

입맞춤보다, 정사보다 황홀한 환청이 귓가를 울렸다. 가슴이 미어지도록 달콤한 그 부름을 다시 들을 수 있다면, 그는 기꺼이 시체의 잔해라도 끌어모아 뒤집어쓸 수 있었다.

* * *

“전하.”

복도를 걷는데, 누군가 뒤를 따라왔다. 대공은 걸음을 멈추고 자신을 부른 사내를 돌아보았다. 비에른 후작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하세요.”

대공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후작이 조금 난처한 얼굴을 했다.

“여기서 나눌 말은 아닙니다. 시간이 나신다면 제 저택에서 말씀드려도 괜찮을지요.”

“이른 오전과 늦은 밤이 아니면 시간이 나지 않습니다.”

대공은 그의 청을 거절했다. 일이 바쁘기도 했지만 여유가 나면 아란 곁에 머물고 싶었다.

그러나 후작은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워낙 바쁘시니까요. 시간은 언제라도 괜찮습니다. 아니면 제가 대공저를 찾아가겠습니다.”

대공은 잠시 망설이다 그의 제안을 수락했다. 비에른 후작은 탐욕스럽고 건방진 성격이라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이따금 쓸모 있는 정보를 물어올 때가 있었다. 자존심이 세 거절당하는 걸 참지 못하는 그가 이렇게 끈질기게 나오는 걸 보면 분명 허탕을 치게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대공이 후작의 저택을 방문한 건 다음 날 새벽이었다. 어슴푸레한 새벽하늘도 후작저의 화려함은 다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정도가 과해 어딘지 저속한 느낌을 주었다.

대공이 도착했다는 말에 후작이 서둘러 뛰쳐나와 그를 맞이했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 전하.”

대공은 목례로 인사를 대신했다. 후작은 그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응접실 역시 사치스러웠다.

후작이 차를 권했으나, 이른 새벽부터 후작을 오래 마주하는 건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었기에, 대공은 용건을 재촉했다.

“차는 괜찮습니다. 오래 시간을 낼 수는 없어서.”

후작이 호방한 척 껄껄 웃었다.

“압니다. 그리 오래 붙잡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다름이 아니라 국서 문제로 요즘 말이 많지 않습니까.”

국서라는 말에 대공이 미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를 눈치채지 못한 후작이 계속 말을 이었다.

“귀족 대부분이 대공께서 국서가 되길 바란다는 건 아실 겁니다. 황제 폐하와 귀족들 간에 골이 워낙 깊으니 폐하의 가장 큰 지지자이신 대공 전하께서 그 골을 메워주셨으면 하는데, 영 생각이 없어 보이시기에 제가 주제넘게 나서보았습니다.”

“그렇게 보였습니까.”

대공이 쓴웃음을 지었다.

“예. 혹 꺼리시는 이유가 있습니까?”

“그런 건 아닙니다.”

대공의 대답에 비에른 후작은 내심 안도했다. 국서 이야기만 나오면 정색하기에 아예 내키지 않는 줄 알았더니. 어쩌면 예상보다 대화가 수월할지도 몰랐다.

“아니면 마음에 둔 여자라도…….”

넌지시 농담을 건네던 후작은 대공의 싸늘한 시선에 급히 말을 돌렸다.

“뭐, 어차피 결혼이라는 게 다 그런 거지요. 애정보다는 정치적인 목적 말입니다. 혼사에 득실을 따지는 게 귀족다운 일은 아니나, 전하께서 폐하와 혼인하신다면 결코 실이 되지는 않을 겁니다. 자식이 황위계승권을 갖는 건 모든 귀족의 소망이니까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는 대공에 비해 황제가 처진다는 사실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웬만한 귀족 가문이라면 국서가 되는 일이 더없는 영광이자 출세일지 몰라도, 황제를 능가하는 권력을 가진 대공에겐 되레 제약이 걸리는 꼴이 될 뿐이다. 건국 이래 황권이 가장 약한 지금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그럼에도 그가 대공에게 국혼을 권하는 건, 지나치게 비대해진 로아크 대공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얼핏 듣기엔 대공을 위한 것 같아 보였지만, 다 속셈이 있었다.

귀족들의 수장으로 군림하면서도 대공은 다른 귀족의 일엔 도통 관심이 없었다. 되레 매번 황제의 편만 드니, 그가 대공에게 불만을 품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특히 황제가 자리를 비운 몇 달간, 그는 대공의 고압적이고 무자비한 통치에 완전히 질려버렸다. 그나마 대공을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고삐가 황제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은 후작은, 이참에 황제가 평생 그를 억제해주길 바랐다.

대공이 황제의 뒤치다꺼리를 하며 힘을 빼는 동안 자신은 힘을 키우겠다는 속셈도 내심 깔려 있었다. 그 역시 제국에서 손꼽히는 대귀족이지만, 대공과 비교할 정도는 아니었으니.

그것을 위해 그는 먼저 대공이라면 덮어놓고 따르는 자들에게 슬쩍 바람을 넣었다. 그리고 실제로 효과는 꽤 있었으나, 정작 대공이 요지부동인 탓에 계획했던 일이 전부 틀어지고 있었다.

후작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대공은 알쏭달쏭한 미소를 지은 채 대답했다.

“글쎄, 내 생각엔 이득인 쪽과 아닌 쪽이 명확하게 나뉘는 것 같습니다.”

후작은 제 속셈을 전부 파악 당했다는 생각에 뜨끔해졌다.

여우 같은 놈.

그는 서둘러 변명하듯 입을 열었다.

“물론 황제 폐하께서 생각보다 가진 재산이 없다는 소문이 돌고 있긴 하지만, 황가의 일원이 되는 영예는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 게…….”

후작의 말을 듣던 대공이 말을 끊으며 물었다.

“폐하께 왜 재산이 없다는 겁니까? 제국 제일의 곡창지대와 금광을 수십 개씩 가지고 계시지 않으십니까?”

대공의 말에 후작은 아차 싶었다. 그러고 보니 그는 몇 년간이나 수도를 떠났다가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이런 이야기를 잘 모르는 것이 당연했다.

괜히 말했군!

낭패감을 삼키는 그를 대공이 재촉했다.

“얼른 설명하십시오.”

후작이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5년이 조금 안 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대공 전하께서 당시 수도에 계셨는지는 잘 모르겠군요. 아무튼 그때 황녀셨던 폐하께서 선황, 아니, 죽은 루아잔에게 상당한 재산을 넘기셨습니다. 루아잔이 그것을 처분하는 과정에서 그 사실이 알려졌고요.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라 대공께서도 당연히 알고 계신 줄 알았습니다.”

“재산을 넘겼다고요?”

“예. 고작 10대 후반이셨던 분이 갑자기 그러신 거라 곧 돌아가시는 게 아니냐는 말이 돌았던 기억이 나는군요. 오해는 마십시오, 워낙 몸이 약하시니까요.”

5년 전이라면 그가 아직 아란의 시종일 때였다. 그때 아란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도 전부 그에게 털어놓곤 했는데, 재산을 처분했다는 말은 전혀 들은 적 없었다.

대공은 차를 청하지 않은 것을 뒤늦게 후회했다. 그랬다면 표정 관리를 하느라 이리 애를 먹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전부 개인 재산 이야기입니다. 황실 명의의 재산은 그대로라는 걸 대공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대공은 대답 대신 혼자 생각에 잠겼다. 마음 한구석이 몹시 찜찜했다. 자신이 작위를 얻고 수도를 떠나기 전, 아란이 했다던 거래가 문득 생각났다.

서쪽 국경에 있을 때, 그녀의 연락을 기다리지 않게 된 후에도 그것만큼은 늘 궁금했다. 자신을 그곳에 보낸 대가로 아란이 무엇을 잃고 얻었는지.

그러나 눈치 없는 후작은 자꾸만 그를 설득하려 들었다.

“대공, 생각해보십시오, 자식이 황위 계승권을 가지는 건 모든 귀족의 소망 아닙니까. 폐하와 대공께서 자식을 보신다면 그 아이야말로 제국에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고귀한 신분이 될 겁니다.”

그 말만은 진심이었다. 실제로, 제 아들들이 진작 결혼하지만 않았어도 후작은 어떻게 해서든 제 아들을 국서 자리에 밀어 넣었을 것이다.

“아이…….”

생각에 잠겼던 대공이 중얼거렸다.

그럼 그렇지.

후작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대귀족이라도 귀족의 한계는 명확하다. 자식에게 황위 계승권이 생기는 건 확실히 매력적인 요소인 것이다.

“그러니 손해라 생각 마시고…….”

그러나 대공은 그의 기대를 무참히 박살 냈다.

“오해하고 계시는군요. 손해를 보는 쪽은 내가 아닌 폐하이십니다. 그분을 짓밟고 내가 이 자리까지 올라왔는데, 결혼을 하고 자식까지 보는 건 폐하를 일방적으로 착취하는 꼴이지 않겠습니까.”

대공이 싸늘한 낯으로 말했다. 아주 조금은 자조적인 기색도 있었다.

“예?”

“그리고, 폐하께서 원하지 않으신 이상, 그분께 국서 이야기를 해 마음을 흐트러뜨리지 마십시오. 일전에 헤스턴 공작에게도 같은 말을 했었지요. 폐하께선 씨암말이 아닙니다.”

후작은 드물게 당황하여 말을 잇지 못했다.

대공이 돌아가고 난 후, 후작은 그가 앉았던 곳을 향해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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