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하의 밤-92화 (92/146)

92화

밤이 되어 침실에 들었으나 시간이 늦도록 대공은 찾아오지 않았다. 기다리다 포기한 아란은 로지나에게 침의로 갈아입겠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로지나가 막 그녀의 머리 장식을 뽑으려 했을 때, 문밖에서 대공이 도착했음을 고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로지나가 서둘러 다른 시녀들을 데리고 조용히 침실을 나섰다. 함께 황제를 모셨던 동료들 대신 빈자리를 채운 새내기 시녀들은 황제와 대공이 무슨 사이인지 퍽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그때마다 로지나는 살고 싶으면 아무것도 보지 못한 척하라고 대답하곤 했다. 새내기 시녀들의 상상과 달리, 전혀 낭만적이지 않은 현실을 아는 그녀는 씁쓸한 기분으로 침실 문 앞에서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 * *

아란은 대공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아쉬운 쪽이 그녀라 일단 부르긴 했지만 사실 완전히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채였다. 아란이 가만히 앉아있자 시중을 들라는 뜻인 줄 알았는지 그가 다가왔다. 머리카락을 만지는 손에 놀란 그녀가 서둘러 몸을 돌렸다.

“왜 이렇게 늦었어.”

“일이 바빴습니다.”

그가 바쁜 건 사실이었기에, 아란은 딱히 더 탓하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란이 그를 먼저 부른 적은 거의 없었기에, 대공 역시 내심 긴장한 상태였다. 한편으론 조금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했다.

반대로, 아란은 그와 오래 말하고 싶지 않아 생각을 다 가다듬지 못한 상태로 우선 입을 열었다.

“국서 문제를 어떻게 할 거야?”

대공이 이전에 말했던 내용을 다시 말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원치 않으면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부러워. 편하게 생각할 수 있어서.”

아란은 빈정거리는 어조도 없이 대답했다. 그처럼 홀로 설 수 있는 상황이라면 그녀도 그러고 싶었다.

한참 말이 없던 그녀가 고개를 숙이고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예전에 네가 그랬지. 결혼하자고…….”

옛 기억을 떠올린 대공이 이를 악물었다. 아란은 고개를 숙이고 있어 그것을 보지 못했다.

“내겐 다른 선택권이 없는 것 같아. 그때나 지금이나.”

아란이 괴로움을 참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숨통을 옥죄는 것 같던 그 잔인한 말을 자신의 입으로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다른 사내와 결혼하시는 게 아니라면, 전 어느 쪽이든 상관없습니다.”

아란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했다. 온통 혼란스러운 표정이었지만 두려움만큼은 선명했다.

“네 말을 어떻게 믿어? 그러다 네 마음이 바뀌면? 오라비들처럼 되는 거야? 아니면 그 백작처럼 광장에 목이 매달리는 거야?”

연달아 질문을 쏟아낸 그녀가 잠시 숨을 골랐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가 믿을 건 네 알량한 변덕뿐이야. 이제 그런 건 싫어. 지긋지긋해.”

비난하는 목소리가 떨렸다. 대공은 막막한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지만 그녀가 제게 원하는 건 이전과 다르지 않았다.

보호와 안정.

비난하고 때리면서도, 아란은 자신을 완벽히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이 그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를 완전히 내치지는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보호와 지지엔 늘 그만한 대가가 따랐으니 우위를 점한 지금도 그를 믿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아직도 자신이 그녀에게 필요하다는 사실은 다행스러웠지만, 그녀가 제 마음을 의심하고 가벼이 여긴다는 것은 참을 수 없이 괴로웠다.

대공은 아란에게 자신은 평생 그녀를 버릴 수 없다는 걸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믿지 않을 것을 알기에 말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 불신을 심은 건 바로 그 자신이었으니 누구를 탓할 수도 없었다.

왜 그렇게까지 아란을 괴롭혔는지, 그 이유가 이제 대공은 잘 생각나지 않았다. 그냥 아란이 애타는 얼굴로 제 품에 안겨오는 것이 좋았던 것 같다. 세상에 기댈 곳이라곤 그밖에 없는 것처럼 간절하게.

단 한 번만이라도 아무 대가 없이 그녀의 뜻을 따라주었다면 조금은 신뢰라는 것이 쌓였을까. 후회했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이제 와 믿어달라 간청한다 한들 소용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혼인이 상관없다면 아이는 어떻게 생각해?”

대공이 주먹을 꽉 쥐었다. 혼인은 상관없었지만 아이는 안 될 말이었다.

“아이는 더더욱 필요 없습니다.”

아란이 피식 웃었다.

“나는 필요한데. 그럼, 다른 사내와 만들어 올 테니 그대가 국서로서 뒤를 봐주겠어?”

그 말에 대공은 아란이 본 것 중 가장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 끊어질 듯 팽팽히 당겨졌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그녀는 제 한마디에 일희일비하는 꼴을 마음껏 비웃고 싶었으나, 여실히 느껴지는 그의 분노에 숨이 막혀 그럴 수 없었다.

한참 후에, 아란은 겨우 한마디를 내뱉었다.

“왜 그렇게 무서운 얼굴을 해. 농담이야.”

그녀의 변명에도 대공의 낯은 풀어질 줄 몰랐다. 선을 넘은 걸까? 그의 비굴한 모습에 도취하여 천지 분간 못하고 기어오른 것 같아 덜컥 무서워졌다.

“다른 남자와, 후계를 만드시겠다고요?”

아란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농담이라고 했잖아. 너 말곤 그런 걸 해본 적도 없는데.”

“용납 못 합니다.”

아란이 벌써 다른 남자에게 안기기라도 한 것처럼 그가 분을 참지 못하고 이를 악물었다. 그녀가 자신을 도발한 게 처음은 아니었으나, 지금처럼 화가 난 적은 없었다. 눈까지 새빨갛게 충혈되어 지금 그는 꼭 귀신 같았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보이는 것 전부를 뒤엎고 부수고 싶었다. 그러지 않은 건 아란이 떨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공은 간신히 화를 억눌러 참고는, 자꾸만 자신을 아프게 하는 말을 쏟아내는 조그만 입술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폐하가 아니라, 상대 남자를.”

그가 안심시키듯 속삭였다. 다정한 목소리였지만 억지로 꾸며냈음을 전부 숨기지는 못했다. 실제로 그의 숨결은 아직도 거칠었다. 그러나 조금 전보단 훨씬 덜 위압적이었다.

우습게도 그의 반응에 떨림이 얼마쯤 가라앉았다.

다시금 침묵이 내려앉은 그들의 사이를 대공의 숨소리만이 채우고 있었다.

“……선택권을 줄 생각이 없다면, 입 맞춰 봐. ”

문득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아란이 뜬금없는 명령을 내렸다.

“내겐 후계가 필요하니까…….”

내가 널 참을 수 있는지 시험해 보고 싶어. 대공은 이어질 뒷말을 어렵지 않게 추측했다.

아란이 마저 말을 잇기 전에, 그가 벽력처럼 그녀를 덮쳤다.

팔걸이를 짚고 양팔 안에 가두는 듯한 자세로 그녀를 내려다보는 눈은 불같은 욕망으로 끓어오르고 있었다. 조금 전의 분노가 모두 욕망으로 치환된 것 같았다.

예상했던 반응이라 그녀는 무서워졌을지언정 놀라지 않았다.

“…….”

그러나 그가 그 이상 움직이려 하지 않는 건 진심으로 의외였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이전과 다를 바 없이 욕망 어린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으면서, 막상 명령이 떨어지자 그는 머뭇거렸다. 아란이 자신을 참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

그 상태로 시간이 흐르면서, 아란은 아란대로 제 황당한 명령에 뒤늦게 무안해졌다.

“못하겠으면 말…….”

그녀가 명령을 취소하려고 했을 때, 대공이 입술을 내렸다. 분명 명령한 쪽은 아란인데, 되레 그녀가 겁을 먹고 움츠러들었다. 그것이 안타까워 그는 두 손을 들어 조그만 얼굴을 감쌌다. 놀라 숨을 삼키려 벌어진 입 안으로 조심스레 혀가 파고들었다.

시작은 분명 그녀의 변덕이었으나, 이 순간만을 기다린 듯 그의 입맞춤은 길고 집요했다. 치아와 입천장을 쓸어내리는 혀는 제가 느끼기에도 뜨거웠다. 그 움직임은 지극히 부드러웠지만 격정을 완전히 억누를 수는 없어 이따금 목 안쪽에서 울리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억지로 정염을 억누르는 대공과 달리, 아란은 주먹을 꽉 쥐고 돌처럼 뻣뻣하게 굳어 그의 입맞춤을 받았다. 재회한 이후 처음 그녀의 의지로 시작한 입맞춤은 몹시 불쾌한 것 같기도 하고 참을 만한 것 같기도 했다.

아란의 혼란이 커질 때쯤, 그가 입술을 떼고 떨어져 나갔다. 그러나 뺨을 감싼 손은 그대로였다. 어색한 눈빛이 허공에서 얽혔다.

아란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젖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렇게 부드러운 입맞춤은 어릴 때를 제외하곤 처음이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그녀가 그를 밀쳐냈다. 그리곤 크게 숨을 내쉬었다.

숨 쉬는 것을 잊은 건 대공 역시 마찬가지였다.

달콤한 형벌이 끝났으니 이제 판결만이 남았다. 그는 그녀의 몸짓 하나, 숨결 하나까지 낱낱이 헤아리며, 밀어내는 손길이 예상보다 냉정하지는 않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

아란이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아, 답을 기다리는 그 몇 초가 몹시 초조했다.

“생각보다 역겹지는 않은데, 이 이상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

그 대답을 듣고 나서야 대공은 간신히 떨리는 숨을 삼켰다. 모욕적인 유예도 지금으로선 분에 넘쳤다.

모호하게 중얼거린 그녀가 손가락을 뻗어 대공의 얼굴과 입술을 어루만졌다. 연이어 잠을 설치고 식사도 거른 탓에 그의 피부와 입술은 점점 더 까칠해지고 있었다. 그녀의 눈길이 눈에 띄게 홀쭉해진 뺨에 닿았다.

“많이 상했네.”

대공은 내심 그녀가 제게 동정심을 품지 않았을까 기대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내리깐 두 눈은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혼란스러워 보이기만 했다.

그녀의 손가락은 꽤 오래 그의 얼굴에 머물렀다. 애정 어린 접촉은 아니었다. 그저 어떤 물건을 품평하듯 그의 가치를 가늠하는 듯했다. 정치적 동반자로서, 후계의 아버지로서.

실제로 아란은 동정심 따윈 가지지 않았다. 그 역시 그녀를 동정한 적 없었으니까. 자존심 밖에 가진 게 없던 그녀가 그것마저도 내팽개치고 그의 자비를 구걸했던 나날은 수도 없이 많았다. 그는 한 번도 들어주지 않았지만.

그때를 생각하자 마음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아란은 그의 얼굴에서 손을 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 보니, 돌려주지 않았더라고.”

그녀가 뭔가를 내밀었다. 라세르의 사절들을 만났던 날 대공이 걸쳐주었던 겉옷이었다. 바로 다음 날 돌려주려고 했는데, 정신이 없어 챙기지 못했다.

대공이 굳은 몸짓으로 옷을 건네받았다.

“용건 끝났으니 이제 가 봐. 그리고, 오늘도 잠들지 마.”

아란이 명령했다.

“예.”

그가 고분고분하게 명을 받들었다. 어차피 그녀의 명이 아니더라도 그는 오늘 밤, 제가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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