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하의 밤-91화 (91/146)

91화

공작이 완전히 멀어진 후에야 대공이 입을 열었다.

“리시안셔스가 피었습니다, 폐하.”

“여긴 무슨 일인가.”

대공이 꽃을 향해 손을 뻗었다. 꽃이 무참히 꺾였다. 한 송이로는 만족할 수 없었는지, 그는 계속 꽃을 꺾었다. 풀물이 드는데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아란이 인상을 썼다.

“무슨 일로 왔느냐고 물었어.”

“그와 무슨 말씀을 나누었는지 궁금했습니다.”

“필요한 말을 했겠지.”

“알고 싶습니다.”

“국서에 관한 이야기를 했어.”

숨길 것도 없다는 생각에 아란이 순순히 대답했다. 그 역시 공작과 마찬가지로 놀란 눈치였다.

“뭘 그리 놀라. 그대도 봤잖아. 짐이 이제 후계를 낳을 수 있다는 걸.”

“국서가 왜 필요하십니까?”

“짐에겐 기반이 필요해.”

“사일러스는 폐하의 기반이 되지 못합니다. 그는 가진 게 없으니까요.”

제국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의 영주를 가리켜 가진 것 없는 자라고 표현하는 대공의 말에 아란은 기가 막혔다.

“그가 가진 게 없으면 제국에 뭔가를 가진 자가 있긴 한가?”

그새 꽃을 엮어 화관을 만든 그가 그걸 아란의 머리 위에 씌워주었다. 아란은 당황스럽게 그것을 매만졌다. 화관을 만들어 씌워주는 건, 그가 시종일 적에 곧잘 했던 일이었다. 물론 아란이 조를 때만 마지못해 만들곤 했다.

장난을 치는 것 같아 불쾌해진 그녀가 화관을 벗어던졌다. 그러고도 모자라 밟아 짓이겼다.

“뭐 하는 거야?”

“사일러스를 믿지 마십시오.”

대공이 비로소 본심을 꺼냈다.

“공작은 폐하께서 생각하는 것과 다른 자입니다. 그가 폐하께 음심을 품었던 일을 잊으신 겁니까?”

그의 말에 아란이 움찔했다. 그러나 곧 다시 차갑게 대꾸했다.

“그래서? 그가 내게 무슨 마음을 품었든, 결론적으로 그는 내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대공은 치미는 감정을 눌러 참았다. 아란이 사일러스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그는 눈앞이 홧홧해졌다. 사랑을 자각했다고 해서, 그녀에게 한 짓을 후회한다고 해서 타고난 폭력성이 어디로 가는 건 아니었다.

아란은 그가 평온하다고 여겼지만, 그는 하루에도 몇 번씩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 아란을 보지 못하는 것만큼, 그녀 옆에 있는 것이 괴로웠다. 언제 끝날지 기약이 없기에 더 고통스러웠다.

“……공작 앞에서 웃지 마십시오. 그를 경계하셔야 합니다.”

치졸한 질투를 알아차린 아란이 그녀가 손등으로 그의 얼굴을 가볍게 건드렸다. 대공의 눈가가 미세하게 떨렸다. 아직까지는 그녀가 안심해도 된다는 증거였다.

“건방진 말 하지 마. 내가 웃는 걸 보고 싶으면 아양이라도 떨어야지, 그렇게 인상 쓰고 있으면 웃을 마음이 생기다가도 사라지겠어.”

그리고 아란은 언젠가 그가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그때 자신이 느꼈던 모욕감을 그가 조금이라도 느끼길 바라며.

대공은 그녀의 의도를 눈치챘지만, 모욕보다도 제 오만함이 뼈저리게 사무쳤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아란이 제게 웃어준다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제게 무슨 말을 하든, 무엇을 시키든 그녀에 대한 마음은 옅어지지 않았다.

이런 줄을 모르고,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으면 사랑임을 인정하겠다고 우쭐거리던 자신은 얼마나 어리석었던가.

“무슨 아양을 떨면 웃어주시겠습니까.”

진지하게 되묻자 아란이 어이없는 눈으로 그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그리고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걸 왜 짐에게 묻나? 알아서 생각해.”

그녀는 평소보다 보폭을 넓게 해 빠르게 그에게서 멀어졌다. 다행히 따라오는 기척은 없었다.

냉정을 지키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걸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막상 그를 마주하면 자꾸만 치미는 충동을 주체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그래서 비꼬고 무시하는 등, 자신답지 않은 모습을 자꾸 보이곤 했다.

아란은 그게 싫었다. 너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이젠 그가 제게 어떤 영향력도 없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데 뜻대로 되지 않았다.

어느새 사일러스 공작을 만났을 때 느꼈던 작은 기쁨 같은 건 완전히 사라진 상태였다. 아란은 이럴 바엔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하게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매번 고통스럽고 슬픈 일만 있는 건 아니었다. 계획한 일이 순조롭게 풀릴 때, 반가운 사람을 만날 때, 아란도 다른 사람처럼 보람과 기쁨을 느꼈다. 그러나 그런 감정들로 상쇄하기엔 고통도, 슬픔도 너무 컸다.

아란은 다시 집무실로 돌아왔다. 서류를 펼쳤으나 집중은 잘되지 않았다.

* * *

예상대로 귀족들이 하나둘, 국서 문제를 거론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사석에서만이었으나, 그녀가 이리저리 핑계를 대며 대답을 회피하자, 참다못한 귀족 몇이 회의에서 그 이야기를 꺼냈다.

“이제 더는 미룰 수 없습니다. 신성한 자리에서 이런 말씀을 드리긴 민망하지만, 변두리 소국의 군주들조차 배우자를 여럿 거느리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한데 어째서 위대한 제국의 주인께는 단 한 명이 없단 말이니까.”

“맞습니다. 어서 국서를 들여 폐하의 위상을 단단히 세우십시오.”

아란은 회의장인 것도 잊고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공적인 자리에서 국서에 관한 일이 논의된 건 처음이었다. 그리고 귀족들의 의견이 이처럼 만장일치로 모아진 것도 드문 일이었다. 그만큼 그들은 조바심을 내고 있었다.

아란 역시 언제까지 혼자일 수는 없다는 생각에 동의했다. 아무리 낭만적으로 포장해봤자 황족과 귀족들의 혼인이란 뻔한 것이다. 아주 가끔, 열렬히 사랑하여 맺어진 이들이 있긴 했지만 그런 경우는 백 명 중 한 명꼴도 되지 않았다.

일반 귀족가의 딸들도 가문을 위해서라면 적과도 혼인하는 상황에, 거의 유일한 황족이자 황제인 그녀가 사랑을 위해 혼인하는 건 무책임하고 어리석은 일이었다. 그리고 오라비들의 속셈을 알게 된 이후, 아란은 자신이 애정 어린 상대와 결혼을 하게 될 거라는 기대를 완전히 버렸다.

예전처럼 돈에 팔려가지 않게 되었으니 그나마 다행인가. 아란은 냉소적으로 생각했다.

“아직 나라 안팎으로 정세가 불안정한데, 국서를 논하는 건 이르지 않나.”

그러나 아직 내키지 않는 것도 사실이라, 그녀는 일단 시치미를 떼 보았다.

“아닙니다. 폐하. 지금 국서를 정하신다 해도 국혼 준비를 하려면 최소 1년은 넘는 시간이 걸리니 전혀 이르지 않습니다.”

그 말엔 아란도 반박하지 못했다. 시기의 문제일 뿐, 아란에겐 그들의 요구를 내칠 명분이 없었다.

“그래서, 경들이 생각한 유력 후보는 누구인가. 아무 생각 없이 짐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을 테지.”

말을 꺼내기 무섭게 몇 명의 이름이 거론되었다. 로아크 대공과 사일러스 공작의 이름이 끼어있음은 물론이었다. 아란이 생각하기에도 저 둘이 가장 유력한 후보였다. 둘 중에서도 굳이 꼽자면 로아크 대공 쪽이었다.

아란은 대공 쪽을 바라보지 않으려 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공 역시 입을 열지 않았다. 아란이 대답하지 않자 그녀 역시 찬성했다고 생각했는지, 가만히 있던 자들도 한마디씩 거들었다. 당사자인 아란과 대공이 입을 다문 가운데, 다른 사람들이 두 사람의 혼인에 대해 열을 올리며 이야기하는 장면이 마치 촌극 같았다.

대공을 지지하는 귀족들은 이 기회에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 더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대공이 두 번이나 반란을 일으켰다는 사실은 깡그리 잊어버린 것 같았다. 새삼 화낼 일도 아니라, 아란은 건성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흘려들으며 피곤한 눈으로 회의장을 훑었다. 그러다 대공과 눈이 마주쳤다. 당황한 그녀와 달리, 그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아란은 저도 모르게 의자 팔걸이를 힘껏 쥐었다.

대공이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국서를 논하기엔 분위기가 좋지 않습니다. 게다가 폐하께서 젊으신데 국혼을 재촉하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그가 은근히 국서로 거론되는 것을 꺼리는 기색을 내비치자, 이번엔 사일러스 공작을 염두에 둔 사람들이 나서기 시작했다.

그 말을 듣다 못한 공작 역시 조용히 내뱉었다.

“저 역시 두 나라의 전쟁 건을 마무리 짓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공작까지 맞장구를 치자 달아올랐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서로 약속이나 한 듯이 같은 의사 표현을 하는 두 사람은 실제로는 상대 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있었다.

두 사람의 말을 듣고 있던 비에른 후작이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아니, 이게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두 분께서 아직 젊으셔서 그러신 건지, 아니면 너무 겸손하신 건지 모르겠군요. 폐하께서 소극적이시면 누구라도 적극적으로 나서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무작정 폐하의 뜻을 따르는 것만이 진짜 충정은 아니지요.”

“제 충정을 함부로 재단하지 마십시오, 후작.”

공작이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무슨 일이든 적당히 넘어가는 편인 그가 감정을 드러내는 일은 드물었기 때문에, 비에른 후작은 조금 놀란 듯했다.

반면, 대공은 아까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어 버렸다. 다른 후보들이 몇 명 더 있긴 했지만, 가문이든 영향력이든 전부 두 사람에 비교할 바는 못되었기 때문에 그리 영양가가 있지는 않았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국서 선발에 관한 건 다음번을 기약하기로 하고 회의는 끝났다.

일단 난감한 상황을 넘긴 아란은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아마 다음엔 오늘처럼 쉽게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한편으론 조금 놀라기도 했다. 그녀는 귀족들이 국혼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당장이라도 대공이 자신과 결혼하겠다고 나설까 봐 걱정했던 탓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이전부터 틈만 나면 그는 결혼 얘기를 꺼내 아란을 겁먹게 했었다.

회의가 파하자마자 아란은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장을 나섰다. 대공 곁을 지나칠 때, 그녀는 그의 소매를 아주 살짝 건드렸다. 할 말이 있으니 따로 찾아오라는 뜻이었다. 그가 그 의미를 알아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란은 더 설명하거나 말을 붙이지는 않았다. 어차피 더 안달 난 쪽은 자신이 아니라 그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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