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아란은 당혹스러움을 숨기고 곁에 있던 레지나에게 무어라 속삭였다.
레지나는 조금 놀란 듯했지만, 곧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이곤 다른 시녀들과 함께 사라졌다. 라세르의 왕족들이 의아한 눈으로 아란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태연하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그러나 나이프를 쥔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대공의 시선이 그 위에 박혔다.
마침내 일어날 때가 되었다. 본궁과 정원은 꽤 거리가 멀었고, 아직 시녀들은 도착하지 않았다. 아란은 이번에야말로 난처함을 숨기지 못했다. 첫날이니 많은 양이 흐른 건 아니지만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 수 있을 정도의 얼룩이 졌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그 때,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대공이 겉옷을 벗어 그녀의 어깨 위에 덮어 주었다. 그의 옷은 화사한 드레스와 지독하게 어울리지 않았지만 엉덩이와 허벅지를 전부 가려, 일어났을 때 흔적을 들키는 꼴은 면하게 되었다.
“공기가 쌀쌀합니다, 폐하.”
쌀쌀하긴커녕 훈훈하다 못해 조금 더운 날씨였다. 그러나 대공은 진지한 얼굴로 옷깃을 여며주기까지 했다.
“그……러게.”
아란은 순식간에 붉어진 낯을 어쩔 줄 몰랐다. 사절들이 묘한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으나 그런 걸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아란이 일어나자 대공이 자연스레 그녀를 에스코트하며 의자를 테이블 안쪽으로 집어넣었다. 뒤에서 대기하던 시종이 손쓸 수도 없이 재빠른 몸짓이었다.
어떻게 사절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는지 모르겠다. 시녀들은 모든 상황이 끝나고 나서야 돌아왔다. 대공의 옷을 걸친 아란을 본 로지나가 낭패 어린 표정을 지었다.
“뭐하고 섰느냐. 어서 돌아가자.”
아란은 대공을 외면한 채 로지나를 재촉했다.
침실로 돌아와 거울로 확인하니 그녀가 짐작한 대로 드레스 뒤쪽에 피가 묻어 있었다. 드디어 황제로서 의무를 다할 수 있게 된 순간이었다. 그러나 아란의 얼굴은 복잡하기만 했다. 난데없이 찾아온 것이 희소식인지 혹은 비보인지, 아직 알 수 없었다.
* * *
오랜만에 찾아온 월경은 말 그대로 불쾌했다. 별다른 일도 하지 않았는데 몸이 늘어졌다.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신경 역시 잔뜩 곤두선 상태였다. 로지나가 넌지시 언급을 주었는지, 시녀들은 그녀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우스운 건, 대공의 행동 역시 시녀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점이다. 혹 제 심기를 상하게 할까, 유독 말을 아끼는 그를 보니 아란은 조금 우습다고 생각했다.
제 말이 얼마나 사람의 속을 긁는지 알긴 아는 건가.
그녀는 대공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리고 생각에 잠겼다. 다시 월경을 시작한 이후로 그녀의 머릿속엔 온갖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특히 압도적으로 많은 비중을 차지한 건 국서와 후계에 관한 일이었다. 그 생각만 하면 한숨이 절로 나왔다.
정말 어색하고 꺼려지는 일이었지만, 아란은 머릿속으로 국서에 걸맞은 사람들을 추리기 시작했다. 당장 떠오르는 후보는 많지 않았다. 황제의 배우자가 되려면 우선 두루두루 뛰어난 조건을 갖춰야 했다. 건강한 아이를 낳아야 하는 만큼 나이가 젊고, 외모 역시 수려해야 했다. 게다가 아이를 지지해줄 권력을 지녀야 하는 건 물론이었다.
민망하게도 가장 먼저 생각난 건 사일러스 공작이었다. 여러모로, 그는 손색없는 국서 후보였다. 그러나 아란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물론 그는 다정하고 따스한 사람이지만 그를 남편으로 맞이한 상황이 쉽게 상상되지 않았다. 아란은 묘한 죄책감을 느끼며 다음 후보를 생각했다.
클레어드 변경백. 어릴 때부터 친했고 나이대가 적당했지만 신분이 낮았다. 정통성과 별개로, 아란은 제 아이에게만큼은 든든한 배경을 물려주고 싶었다. 사사건건 맞서는 귀족들을 상대하다 의욕도, 용기도 잃는 일은 그녀만으로도 충분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적당한 자가 없었다. 신분이 높으면 나이가 많고, 나이가 적당하면 격이 맞지 않았다.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지금 상황에선 누구와 결혼하든 대공이 그 상대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애꿎은 사람에게 해를 끼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이었다.
대공과 결혼하고 그의 아이를 낳는 것.
최선이자 최악의 방법이었다. 대공의 아이를 낳는다면, 그녀는 그를 쥐고 흔들 패를 하나 더 손에 넣는 셈이었다. 불확실한 그의 마음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절대적인 패를 말이다. 대공의 비정상적인 집착이 끝나도 아이는 그녀의 지위와 안전을 보장해 줄 것이다.
그러나 도무지 자신이 없었다. 임신이나 출산까지 생각할 것도 없었다. 그와 맨살을 맞대는 일을 상상만 해도 가슴이 울렁거리고 식은땀이 흘렀다. 아란은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본 대공이 그녀에게 다가오려 했다.
“잠깐…….”
아란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그의 손길을 피했다. 단단하기만 하던 대공의 낯에 미세한 금이 갔다. 아란은 그 표정을 볼 여유가 없었다. 아직도, 그녀에게 대공은 너무나 두려운 사람이었다.
* * *
사일러스 공작이 다시 수도로 올라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란의 얼굴에 모처럼 화색이 돌았다. 수도에 귀환한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다나르에서 지냈던 날들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공작을 만나면 그간 묻고 싶은 게 많았다. 그의 낚시 실력이 조금은 늘었는지, 공작성의 가신들 모두 잘 지내고 있는지. 빈민촌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도 궁금했다.
그가 입궁하는 날, 아란은 평소보다 더 위엄 있어 보이도록 옷차림에 신경 썼다. 자신이 다시 수도로 돌아오기로 결정 내렸을 때 그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잘 알고 있기에 더욱 잘 지내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아란은 들뜬 기색을 너무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사일러스 공작이 입궁할 때를 기다렸다. 그리고 드디어 그를 만났을 때, 그녀는 오랜 친우라도 본 것처럼 활짝 웃었다. 공작의 얼굴도 덩달아 환해졌다.
“폐하.”
“어서 오시오, 공.”
사일러스 공작은 반갑게 인사를 하면서도 재빨리 아란의 상태를 살폈다. 귀족들 등쌀에 속 끓고 있는 건 아닌지, 대공에게 시달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것을 깨달은 아란은 일부러 더 밝은 표정을 지었다.
“황궁에 오길 잘한 것 같네. 오히려 마음도 더 편하고.”
“그러십니까.”
그는 평소보다 조금 더 과장된 아란의 몸짓과 표정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다. 제가 할 수 있는 게 그것뿐이라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화원이라도 둘러보는 게 어떤가? 오랜만에 보는데 집무실은 너무 칙칙하니까.”
“저야 영광이지요.”
공작은 흔쾌히 아란을 따라나섰다.
화원엔 연한 보랏빛이 도는 꽃이 잔뜩 피어 있었다.
“황궁을 떠났던 사이에 정원사가 바뀐 모양인데, 온통 같은 꽃만 잔뜩 심어놨지 뭔가.”
아란의 시선이 흐드러지게 핀 꽃송이에 닿았다. 화원엔 곧잘 머물렀어도 자세히 꽃을 살펴본 적은 없었다. 아란은 조심스레 손을 뻗어 부드러운 꽃잎을 매만졌다. 분명 이름을 알았었는데, 잘 생각나지 않았다. 제법 좋아했던 것도 같은데.
“이 꽃 이름이…….”
“리시안셔스입니다.”
공작이 말했다.
“리시안셔스.”
아란이 중얼거렸다. 언젠가 대공이 이 꽃 이름을 입에 올렸던 것이 떠올랐다.
“이 꽃을 좋아했던 것 같아.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란은 꽃 앞에서 선뜻 발을 옮기지 못했다. 사일러스 공작은 기민하게 그녀에게 고민이 있다는 걸 눈치챘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일이야 늘 많지.”
아란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며 꽃송이에 코를 내렸다. 은은한 향기가 물씬 풍겼다.
“무엇이 폐하의 마음을 어지럽게 합니까. 근심이 있다면 감히 제가 나눌 수 있게 허락해 주십시오.”
아란은 눈을 깜박였다. 전에도 느낀 거지만 그는 지나치게 감이 좋았다.
“실은,”
몸을 바로 한 그녀가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짐이 너무 오래 곁을 비워둔 것 같아서 그러네. 슬슬 국서를 맞이해야 할 때가 온 것 같아.”
예상치 못한 말에 공작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태연한 척, 표정을 정돈했다.
“그러셨습니까. 확실히 가벼운 일은 아니군요.”
“공이 생각하기에 국서는 누가 적당할 것 같나?”
“글쎄요. 염두에 두신 이는 있습니까?”
“아직. 공도 알다시피 짐은…….”
아란이 말을 흐렸다. 대공이 두려워 결혼조차 쉽게 못 한다는 말을 꺼내는 건 아직 어려웠다. 공작은 이번에도 눈치껏 뒷말을 모르는 척해주었다.
“너무 지원자가 많을까 걱정하시는 겁니까?”
공작의 농담에 아란이 고소를 머금었다.
“그 반대지. 인기가 없어 아무도 국서가 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면 망신 아닌가.”
“그 일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무도 없다면 제가 지원하겠습니다.”
농담처럼 건넨 말에 아란이 얼떨떨한 얼굴을 했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
“말만 들어도 든든하네. 체면치레는 하겠어.”
“체면치레뿐입니까. 제 입으로 말씀드리긴 그렇지만 저처럼 괜찮은 남자는 흔치 않습니다.”
“맞아. 공은 좋은 남편, 좋은 아버지가 될 거야.”
아란이 진심으로 말했다. 그의 곁에 있으면 그녀 역시 마음이 부드러워지곤 했다.
“그리 말씀해 주시니 되레 민망하군요. 후보가 정 없거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농담처럼 건넨 진담을 아란은 대번에 거절했다. 자신의 짐을 그가 짊어지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총애하는 신하에게 어찌 그런 형벌을 내릴 수 있겠나.”
가볍게 대답한 아란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공작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빠져나갔다. 그는 멀어지는 아란의 그림자를 안타깝게 바라보다 조금 늦게 그 뒤를 따랐다.
그 때, 뒤에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돌아보니 언제 나타났는지 대공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앞서 걷느라 사일러스 공작보다 그를 늦게 발견한 아란이 공작을 보호하듯 얼른 그의 앞을 막아섰다.
“여기까지 무슨 일인가.”
“지나가는 길에 폐하의 목소리가 들리기에 와 보았습니다.”
“공.”
아란은 서둘러 사일러스 공작을 돌아보았다. 이만 돌아가라는 뜻이었다. 날 선 대공의 분위기에 공작이 머뭇거렸다.
“짐은 대공과 나눌 이야기가 있으니 이만 돌아가게.”
“……곧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둘 사이에 자신이 낄 곳이 없다는 것을 잘 아는 공작은 마지 못해 그곳을 떠났다.
아란은 인사하는 공작을 바라보지도 않았다. 대신 한껏 대공을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