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하의 밤-89화 (89/146)

89화

“그대의 망상에 짐을 끌어들이지 마. 짐이 말하려고 한 건 후계 문제니까.”

대공은 또 아란이 죽음이나 선양을 이야기하는 줄 알고 낯을 굳혔으나 아란은 그에겐 시선도 주지 않았다.

“지금으로선 황위 계승서열이 가장 높은 사람은 라일 후작인데, 그는 어릴 때부터 타국에서 지낸 데다 망나니라니 데려오긴 곤란하겠지.”

부황은 아란에겐 마냥 다정하고 무른 아비였지만 장자인 루아잔에겐 엄격한 군주였다. 루아잔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가 후계이기 때문이었다. 루아잔 역시 부황을 두려워했을지언정 그것이 후계로서 짊어져야 할 일이라는 것을 이해했다.

라세르의 왕세손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반면 아란은 왕세손과 비슷한 나이였을 때 사랑에 눈이 멀어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한심한 일이었다.

“후계는 벌써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니, 이건 짐의 의무야. 그리고 그대도 알잖아. 어쩌면 짐이 후계를 낳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걸.”

아란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 말이 대공을 선득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아란은 몸이 약해서 아이를 낳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마찬가지로 약했던 아내에게서 단 한 명의 자식만을 본 제 아비의 심정을 그는 십분 이해했다. 심지어 아란은 전 대공비보다 훨씬 몸이 약했다. 아란이 아이를 낳다 죽을 거라고 생각하면 그는 견딜 수 없었다. 그럴 바엔 아예 낳지 못하는 편이 나았다.

“타국 왕비들처럼 신전에 기도라도 드려볼까.”

아란이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라일 후작의 아들은 아비와 달리 제법 영특하다고 하니, 그를 폐하의 양자로 들이는 건 어떠십니까.”

“그것도 좋은 방법이지. 재미있겠네, 짐보다 나이가 많은 양아들이라.”

하아, 작게 한숨을 쉰 그녀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갓 서른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 머리가 빠지기 시작한 사내가 자신을 어머니라고 부르는 모습을 상상하니 기분이 묘했다.

“짐이 가릴 처지는 아니지만, 황실 체면도 중요하니 라일 후작의 아들을 입적시키는 건 최후의 보루로 남겨두는 게 좋겠어.”

아란이 후계 문제를 고심하는 데는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귀족들이 슬슬 국서 문제를 거론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의 즉위 1주년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제 아들을 들이대던 헤스턴 공작처럼 노골적이지는 않았으나 머지않아 시끄러워질 것이 분명했다.

이런 상황에서 아란의 몸 상태가 밖으로 새어나가기라도 한다면 큰일이었다. 황족이 씨가 마른 상황에서 황제까지 후계를 낳지 못하는 것이 알려지면 나라는 아수라장이 될 터였다. 아란은 대공을 원망스레 노려보았다.

“그대가 쓸 만한 황족을 단 한 명이라도 남겨두었다면 이리 골치를 썩일 일은 없었을 텐데.”

저와 같은 결함투성이 황족만 살아남은 건 황가와 제국에겐 재앙이나 마찬가지였다.

초조한 그녀와 달리, 대공은 차기 황위 문제를 그리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의 주인은 아란뿐이니 다음 황좌를 차지할 자가 누가 되든 알 바 아니었다.

그는 아란의 납작한 배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월경이 끊겼다는 것을 알았을 때,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사랑을 자각하지 못했던 시기에도, 그는 저 배에 흉측한 것이 깃들어 그녀의 생명력을 빨아먹는 꼴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는 만일의 가능성에 대비하여 따로 피임도 해왔다.

대공의 속내를 까맣게 모르는 아란은 골치 아픈 의무 대신 당장 눈앞에 닥친 일로 관심을 돌렸다.

“라세르의 왕제와는 그래도 이야기가 통하는 것 같았어. 하지만 라세르 국왕은 강경파라고 하니, 왕제가 그를 설득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는 없겠지.”

“라세르 국왕이 최소한의 판단력을 가졌다면 폐하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을 겁니다.”

아란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또 다른 서신을 집어 들었다.

전쟁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이즈미 쪽에서 고위층의 망명 신청이 몰려들었다. 그 중엔 왕족들도 섞여 있었다. 나라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 이들이 가장 먼저 도주를 꾀하다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그러나 그녀 역시 황좌를 버리고 달아났었으니 비난할 처지는 못 되었다.

일에 몰두하다가도 불쑥불쑥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면 괴로워졌다. 아란은 종이가 구겨지는 줄도 모르고 글자를 노려보았다.

“폐하.”

희게 드러난 손마디를 본 대공이 아란을 불렀다.

그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아란은 늘 복잡한 심경이었다. 제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는 꼴이 가소롭고 통쾌하면서도, 때로는 가누기 어려울 만큼 분노가 차올랐다. 지금은 후자였다.

“고개 들어.”

그녀의 말에 대공이 기다렸다는 듯 시선을 들어 아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애정을 구걸하면서도 그는 비참해 보이지 않았다. 칼날 같은 눈빛, 오만하게 다물린 입술, 큰 키와 다부진 몸까지, 어디에도 녹록한 구석이 없었다. 아란은 자신이 그에게 어떤 수치를 줄 수 있을지 생각했다.

“이리 와.”

대공이 한 발짝 내딛기 전에 그녀는 재빨리 덧붙였다.

“개처럼 기어서.”

아란이 손가락으로 제 발치를 가리켰다. 진심이 아닌, 단순히 그를 모욕하기 위한 발언이었다. 당연히 거부당할 거라고 생각했기에, 그가 무릎을 꿇고 바닥에 엎드렸을 때 그녀는 당황하고 말았다. 그는 정말로 기어서 아란의 앞까지 왔다.

“자존심 같은 건 이제 버리기로 한 거야?”

질린 목소리로 물었음에도, 비웃음 섞인 질문에도 그는 수치스러운 기색이 없었다. 그저 아란의 발만 바라보았다. 그리곤 기다란 손가락을 뻗어 더없이 귀한 것을 만지듯 흰 발등을 쓰다듬었다. 간지러운 느낌에 아란은 반사적으로 발가락을 오므렸다. 한참 발등을 어루만지던 손이 발목을 타고 종아리까지 올라왔다.

“만져도 좋다고 한 적 없어.”

아란은 잡힌 다리를 빼고 그의 어깨를 걷어찼다. 결과적으로 대공은 조금도 밀려나지 않았고, 아란의 발만 아팠다. 그래도 그녀는 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싶어 다시 한번 발로 차려고 했다. 그러나 그 전에 대공이 그녀의 발을 잡았다. 눈이 마주치자 아란이 그를 제법 매섭게 쏘아붙였다.

“왜? 또 채찍이라도 갖다 주려고?”

“기분이 풀리신다면 그리하겠습니다.”

전혀 타격을 받지 않은 것 같은 담담한 반응에 기분이 나빠졌다. 그의 앞에서 무릎 꿇고 간청할 때마다 매번 무너졌던 자신과 달리, 그는 이런 일쯤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아란은 그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래. 아직 여유가 있구나.”

문득 궁금해졌다. 대공이 무엇을 싫어하고,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그 역시 아란에게 비슷한 것을 물었지만, 궁금해하는 이유는 하늘과 땅처럼 달랐다.

싫어하고, 두려워할 일을 하고 싶었다. 그런 일만 하고 싶었다. 과거의 그녀처럼 무력함을 이기지 못해 절망하는 꼴을 봐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말해 봐. 얼마나 남았는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원하시는 건 뭐든 할 수 있습니다.”

잠시 알 수 없는 눈으로 그를 응시하던 아란이 다시 물었다.

“내가 시키는 거라면 뭐든?”

“예.”

“좋아.”

충직한 대답에 그녀는 조금 웃었다.

“생각해보니 후계가 필요한 건 너도 마찬가지던데.”

“…….”

“내가 다른 여자와 결혼하라고 명령하면? 그것도 따를 수 있어?”

견고하던 낯에 그제야 금이 갔다. 아란의 미소가 짙어졌다. 흡족할 정도는 아니었으나 잔뜩 힘이 들어가 팽팽하게 당겨진 턱을 보니 아주 조금은 기분이 나아졌다.

* * *

그 후에도 아란은 곧잘 대공에게 변덕을 부렸다. 과거의 그가 그러했듯이 말이다. 그러나 대공이 했던 일에 비하면 그녀의 변덕은 어린아이 장난 수준이었다.

대공을 정치적으로 고립시킬 능력도, 그의 권세를 빼앗을 수도 없는 그녀는 대신 그 자체를 괴롭히는 데 집중했다. 가장 자주 했던 것은 식사를 금하거나 잠들지 못하게 한 것이었다. 대부분은 저 두 개의 명령이 동시에 내려졌다. 입맛이 없고, 불면에 시달리게 할 원인을 만들어 줄 수 없다면 결과라도 보고 싶었다.

다른 여자와 혼인하라는 것을 제외하면, 대공은 그녀가 무엇을 시키든 충실히 따랐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잠시나마 자신이 전능하다는 착각에 빠지곤 했다.

대공이 메말라 갈수록 아란은 살이 올랐다. 그를 한바탕 조롱하고, 때리고 나면 놀랄 만큼 입맛이 돌고 잠이 잘 왔다. 그에게 채찍질했을 때 되레 충격받고 떨었던 것이 무색할 정도였다.

“이리 와.”

무심히 대공을 바라보던 아란이 손짓했다. 그가 다가오자 그녀는 까치발을 해 그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타고난 체격과 서늘한 눈빛 탓에 위압감은 여전했지만 날이 갈수록 점점 얼굴이 상하는 게 보였다. 이젠 다나르로 그녀를 찾아왔을 때보다 더 핼쑥해 보였다.

“너도 결국은 보통 사람이었구나. 식사를 거르고, 잠들지 못하면 망가지는 그런 사람…….”

거친 피부 표면을 매만지며 아란이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과거엔 그가 피와 살이 아닌, 강철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도 믿을 만큼 대단해 보였었는데, 고작 굶주림과 피로에 무너지는 그런 사람이었다니.

대공이 그녀의 손목 안쪽에 입술을 묻었다.

“아직 더 참을 수 있습니다.”

“그럼 그러던가.”

아란은 표정을 바꾸고 등을 돌렸다.

본궁을 나서는 순간, 그녀는 거짓말처럼 싸늘한 낯을 지우고 미소를 지었다.

이제 그녀는 예전처럼 사람들 앞에서 그에게 마냥 꼿꼿하게 굴지 않았다. 고집은 여전했지만, 속내를 숨기는 법과 가식에 적당히 맞장구치는 법에 능숙해졌다.

예전처럼 대공을 피하지도 않았다. 그를 대할 때면 그녀는 전에 없이 살갑고 다정하게 굴었다. 되레 그녀 앞에서 굳어지는 건 대공 쪽이었다. 지은 죄가 있으니 그런 거라며, 사람들은 그 이유를 지레짐작했다. 전말을 아는 소수의 사람은 둘 사이에 있었던 일을 함구했다.

“날씨가 좋아.”

정원을 걷던 아란이 대공을 돌아보며 말했다. 입가엔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예.”

진심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대공은 담담하게 동조했다. 다시 입을 열려던 아란이 미미하게 얼굴을 찌푸렸다. 어젯밤부터 아랫배에 둔통이 느껴진 탓이다. 괜찮겠거니 넘겼는데 이제는 배뿐만 아니라 허리부터 허벅지까지 뻐근하게 당겼다.

“왜 그러십니까?”

“별일 아니야.”

“편찮으시면 쉬십시오. 저 혼자 가겠습니다.”

아란은 고개를 저었다.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정원 안쪽에 도착하자 미리 나와 있던 라세르의 아민 왕자와 왕세손이 보였다. 그들이 라세르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으로 오찬을 함께 하는 자리였다. 이미 중요한 용건은 이야기를 마친 뒤라, 정치적인 대화보다는 가벼운 담소가 오갔다.

적당히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아란은 문득 속옷이 젖는 걸 느꼈다. 실로 오랜만에 예고도 없이 찾아온 불쾌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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