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하의 밤-88화 (88/146)

88화

대공은 문 앞에 묵묵히 서서 종이 울리기를 기다렸다. 지루한 줄도 몰랐다. 기약 없이 기다리는 것에 비하면 오히려 즐거운 일이었다. 다만 혼자 방 안에 있을 아란이 걱정될 뿐이었다.

아란은 고집스럽게도 단 한 번도 종을 울리지 않았다.

대공은 커튼이 쳐지지 않은 복도의 창을 바라보았다. 곧 동이 트면 떠나야 했다. 마음 같아선 종일 이곳에 있고 싶지만 그녀가 정무를 보지 못하는 동안 그가 공백을 메워야 했다.

그 때, 안에서 종소리가 들렸다. 그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목말라.”

아란이 웅얼거렸다. 그는 물이 들어있던 포트를 열었다. 진작 다 마신 듯 바닥이 말라 있었다. 그는 서둘러 물을 다시 떠 와 그녀의 입에 대어주었다. 물을 마시면서도 계속 눈을 무겁게 깜박이는 걸 보니 아무래도 내내 갈증을 참다가 잠결에 종을 울린 것 같았다.

물을 마시는 내내 졸던 그녀는 대공에게 나가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완전히 잠들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그 핑계로 계속 침실에 머물렀다.

얼굴을 만져도, 손을 잡아도 그녀는 깨어나지 않았다. 아란이 깊은 잠에 빠졌다는 것을 깨닫자 대공의 행동은 좀 더 대담해졌다. 장난치듯 조그만 손에 깍지를 끼고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갈망하듯 아란을 내려다보던 그가 고개를 내렸다.

입술이 닿기 전, 대공은 조금 망설였다. 강간하는 게 싫다는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욕망은 여전했으나 용기는 사라졌다.

끝내 입술을 훔치지는 못했다. 대신 그는 아란 곁에 누워 약 냄새 섞인 체향을 맡았다. 상황이 바뀌어도 그것만은 예전 그대로였다. 그녀가 아픈 건 싫었지만 그 덕분에 밀쳐지지 않고 나란히 누울 수 있는 이 순간이 너무 황홀했다. 그는 모순적인 감정을 느끼며 까칠한 뺨을 연신 쓰다듬었다.

그의 손이 조심스레 입술을 쓸었을 때, 내내 미동도 하지 않던 아란이 눈을 번쩍 떴다. 대공은 그대로 굳었다. 열이 올라 물기 어린 녹색 눈동자가 그를 똑바로 마주했다. 대공은 그녀가 화를 내기 전에 서둘러 떨어지려고 했다.

그 때, 아란이 그의 옷깃을 잡아 제 쪽으로 당겼다.

“에녹.”

그 이름을 들은 대공은 재차 긴장했다.

물론 그 울림은 달콤했다. 허망할 만큼 짧으면서 여운은 너무 길고 깊어 매번 그를 애타게 만들었다. 그러나 최근 그녀가 자신을 그렇게 불렀을 때 좋은 말을 한 적이 없었기에 그는 지레 겁을 먹었다. 그러면서도 불가항력처럼 그녀가 이끄는 대로 끌려갔다.

“어떻게 들어왔어?”

아란이 물었다. 대공은 자신이 멋대로 침실에 머문 것을 탓하는 줄 알고 변명하려 했다. 적당한 이유를 떠올리기 전에 아란이 다시 물었다.

“창문으로 들어온 거야?”

대공은 눈을 깜박였다. 질문하는 내용이 이상했다. 다시 보니 그녀의 눈동자가 몽롱했다.

그는 그녀가 아직도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의 그 어느 날을. 통렬한 고통이 그의 가슴을 쿡 찔렀다.

“……예.”

“창문 타는 거 싫어했잖아.”

“이제 괜찮습니다.”

“내가 걱정돼서 왔어?”

“예.”

대답을 들은 아란이 배시시 웃었다. 그러다가 이내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들키면 혼날 텐데.”

“……상관없습니다. 혼내셔도.”

아란이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비비며 등을 쓸어내렸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막 딱지가 앉은 상처 위를 어루만졌다.

채찍으로 맞는 것보다, 냉랭한 눈빛을 마주하는 것보다 이쪽이 더 잔인한 형벌이었다. 심장이 송두리째 뽑혀 쥐어 짜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거부할 수가 없었다. 그는 아란의 어깨를 더 바짝 끌어안았다. 과거의 흔적을 부여잡고 조금이라도 이 고통스러운 시간을 연장하고자 애썼다.

“전하.”

“응.”

“제 이름, 다시 한번 불러주세요.”

“에녹.”

“다시.”

“무슨 일 있어?”

아란이 걱정스레 물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란은 몇 번 더 그의 이름을 부르다가 다시 잠들어 버렸다. 그 모습을 보며 대공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가 진짜 질투해야 할 대상은 사일러스 공작이 아니었다. 바로 과거의 자신이었다.

* * *

혹독하게 앓았던 건 전부 거짓말처럼, 눈을 뜨니 열이 씻은 듯이 내렸다. 아란이 깨어나자 로지나가 묽게 끓인 수프와 약을 가지고 왔다.

“몸은 괜찮으세요?”

“그래.”

희미한 두통에 아란이 얼굴을 찌푸렸다.

“기분이 안 좋아 보이세요. 꿈자리가 별로 좋지 않았나요?”

“그런 것 같네.”

무슨 꿈을 꾸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확실히 뒷맛이 찜찜했다. 아란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물을 받아 줘. 씻을 거야.”

앓는 내내 씻지 못한 몸이 땀에 젖어 끈적였다.

“알겠습니다.”

“그 사람은?”

“대공 전하께서는 아침 일찍 저택으로 돌아가셨어요.”

일어나자마자 그 낯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다행스러웠다. 아란은 평소보다 조금 차갑게 로지나에게 명령했다.

“다음부턴 대공이 물러가라고 해도 돌아가지 마.”

로지나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걸 알면서도 아란은 단단히 못 박았다.

“황명이야. 네 진짜 주인이 누구건, 넌 내 시녀라는 사실을 잊지 마.”

“……알겠습니다.”

로지나가 고개를 숙였다.

* * *

라세르 국왕에게서 서신이 당도했다. 서신을 가져온 사절단의 대표는 라세르 왕의 동생인 아민 왕자였다.

그러나 아란의 시선을 붙잡은 건 왕제 옆에 나란히 앉은 어린 소년이었다. 아란보다 대여섯살 정도 어려 보이는 그 소년은 라세르의 왕세손이었다.

“저희가 전쟁을 일으킨 건 이즈미 국왕이 저희의 신을 모욕했기 때문입니다. 정당한 명분이 있는데도 전쟁을 멈추고 이즈미가 입은 피해를 배상하라는 제국의 요구는 지나칩니다.”

아민 왕자가 말했다.

라세르의 명분은 얼핏 합당하게 들렸다. 자신들의 건국왕이 신의 자손이라고 믿는 라세르 인들에겐 그보다 더한 모욕이 없었다.

“지나치다고?”

대답하는 와중에도 아란은 라세르의 왕세손을 힐끔거렸다. 왕세손의 앳된 이목구비는 숙부인 왕자를 닮아 있었다. 아마 라세르 국왕과는 더 비슷하게 생겼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잡생각 따위를 할 때가 아니었다. 그녀는 간신히 왕세손에게서 눈을 떼고 다시 라세르와 이즈미의 전쟁에 신경을 집중했다.

결국은 국익의 문제였다. 저리 그럴듯하게 말을 하지만, 이미 라세르는 오래전부터 쇠락해진 이즈미국을 노리고 전쟁을 준비해 왔을 게 분명했다. 그러나 이즈미 국왕이 라세르의 주신을 모욕해 빌미를 준 것은 사실이었기에 아란은 그 사실을 넘어갔다.

“그건 라세르의 공주가 먼저 이즈미 국왕을 조롱했기 때문이 아닌가. 면전에서 조롱당하고도 분노하지 않을 왕이 어디 있나. 왕은 개인이 아닌 국가의 상징이니, 짐이 보기엔 라세르 공주의 죄가 더 무겁다. 그렇다면 정당한 명분을 가진 쪽 역시 라세르가 아니라 이즈미가 되겠지. 라세르 국왕은 당장 이 야만적이고 분별없는 전쟁을 멈추고 제국의 요구를 따라야 할 것이다.”

“표현이 지나치십니다.”

대화를 듣고만 있던 왕세손이 불쑥 끼어들었다. 그의 돌발 행동에 아만 왕자는 당황스러운 것 같았다. 그러나 왕세손은 끝까지 말을 이었다.

“왕이라고 해도 결국은 인간일 뿐입니다. 어찌 감히 위대한 신을 한낱 인간과 비교할 수 있단 말입니까? 제 숙모가 이즈미의 상징을 조롱했다면, 이즈미 국왕은 라세르의 민족, 역사, 그리고 긍지를 모욕한 셈입니다.”

앳된 외모와 달리 왕세손의 눈초리는 제법 매서웠다.

“라세르는 주신을 지극정성으로 모신다더니 정말인가 보구나. 제국은 국교가 없어 짐이 그 생각을 못 했어.”

아란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어린 소년에게 다음 말을 하는 게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짐은 지금 권유를 하는 게 아니네, 왕세손. 라세르가 더 돌이킬 수 없는 어리석은 선택을 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는 거지. 라세르는 오랜 우방을 잃은 제국의 분노를 받아낼 준비가 되었는가?”

아란이 부드럽게 말했다.

“무슨…….”

분을 참지 못한 왕세손이 다시 입을 열려 했을 때, 아민 왕자가 서둘러 나섰다.

“리아드!”

매서운 호통에 왕세손이 움찔거렸다. 황제보다도 숙부의 호통을 무서워하는 모습에 소년다운 치기가 더욱 두드러졌다.

“왕세손께선 아직 어리십니다. 부디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폐하.”

그러나 숙부가 아란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것을 보자 왕세손의 눈동자엔 다시 불꽃이 튀었다.

“용서한다.”

아란은 왕세손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대답했다.

* * *

알현이 끝나고, 아란은 생각에 잠겼다.

후계자.

다시 황제가 되었으니 후계를 세울 의무가 그대로 남았다. 아란은 요즘 들어 후계의 중요성을 깨닫고 있었다. 그녀가 자리를 비우거나 불의의 사고로 죽게 되었을 때, 대공을 제외하면 나라를 책임질 사람이 없었다. 그나마도 요즘 그는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이러다 정말 아란이 비명횡사라도 하면 황조가 바뀔 처지였다.

살고 싶다는 강한 욕망을 가진 것과 별개로, 그녀는 자신이 오래 살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애초에 접었다. 건강하던 가족들도 전부 요절했는데, 하물며 그녀는 몸까지 약했다. 그녀에겐 절실히 후계가 필요했다.

자신을 노려보던 라세르 왕세손의 눈동자를 떠올리며 아란이 중얼거렸다.

“귀여웠어. 라세르의 왕세손.”

아직 미숙하긴 해도 조금 더 나이를 먹고 다듬어지면 훌륭한 군주가 될 것이다. 그런 후계가 있으면 정말 든든하겠지…….

아란은 동의를 구하듯 대공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는 아란이 명한 대로 그녀를 보지 않은 채 얌전히 시선을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무슨 일인지 표정은 살벌했다. 또 뭐에 심기가 뒤틀렸나,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녀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깨닫고 지긋지긋한 표정을 지었다.

“이젠 어린아이까지 질투하는 거야? 정말이지…….”

“이제 열여섯이니 3년만 지나면 성인이 될 겁니다. 그때 폐하께선 고작 스물넷이시고요.”

제 질투가 정당하다는 양, 대공이 뻔뻔스레 대답했다. 부끄러움이라곤 모르는 사람 같았다.

아란은 대꾸도 하고 싶지 않은지 차갑게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대공은 소년이 얼마나 빨리 남자가 되는지 알고 있었다. 나이에 상관없이 아란이 관심을 보이는 남자들은 전부 죽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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