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하의 밤-87화 (87/146)

87화

아란은 채찍과 대공의 널따란 등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날카롭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다고 내가 못 때릴 것 같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채찍 같은 건 단 한 번도 휘둘러 본 적 없었다. 심지어 그녀는 말에게도 채찍을 든 적 없었다. 아란은 겁만 줄 생각으로 채찍을 살살 휘둘렀다. 그러나 가죽끈에 살이 감기는 느낌이 생생하게 느껴지자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채찍을 놓쳤다.

대공이 떨어진 채찍을 들어 아란의 손에 다시 쥐여주었다.

“죄책감 느끼지 마십시오. 저는 사람이 아닙니다. 짐승보다 못한 자입니다. 그러니 마음 아파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아란은 형용할 수 없는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가 무슨 생각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이건 분명 기회였다. 그의 마음이 바뀌어 비참한 처지가 되더라도 오늘의 기억을 되새기며 편히 잘 수 있을 만큼 좋은 기회 말이다. 심지어 제 손으로 쥐여주기까지 했다. 이 기회를 버리면 자신은 세상에 둘도 없는 천치였다. 아란이 이를 악물었다.

“……그래. 넌 사람이 아니야.”

아란은 집무실 안의 불을 전부 껐다. 이미 해가 진지 오래라 집무실 내부는 순식간에 어둠에 휩싸였다. 아란은 그 어둠을 믿고 되는대로 채찍을 휘둘렀다. 자신이 때리는 곳이 어디인지, 얻어맞은 그가 어떤 모습인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거리낌이 없었다.

아프지도 않은지, 그는 신음조차 흘리지 않았다. 들리는 건 거칠어진 아란의 숨소리뿐이었다.

실제로 대공은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물론 채찍은 그녀의 어설픈 주먹과는 비교도 안 될 위력을 냈다. 이미 흉터로 뒤덮인 몸 위에 새로운 상처가 생겼다. 그러나 그는 그것마저도 감사했다. 그녀가 주는 상처를 온몸에 새기고 싶었다. 그리고 영원히 지워지지 않았으면 했다.

마침내 진이 빠진 그녀가 채찍을 떨어뜨리고 그대로 무너졌다. 대공이 서둘러 그녀를 잡아 조심스레 바닥에 내려놓았다. 잔뜩 흐트러진 그녀와 달리 대공은 숨조차 거칠어지지 않았다. 코가 닿을 것처럼 얼굴이 가까워 어둠 속에서도 번들거리는 그의 눈이 보였다. 아란은 그가 이 순간에도 제게 키스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았다.

“넌 정말 미친 것 같아.”

그리고 나도.

비굴하게 굴고 있어도 그의 존재는 너무 강렬해서, 그를 마주하고 있으면 아란 역시 그에게 휩쓸려 머릿속이 온통 곤죽이 된 것 같았다.

대공이 엄지로 그녀의 뺨을 문질렀다. 척척한 느낌에 그녀는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실컷 때려놓고도 어째서 이토록 서러운 걸까. 아란은 떨리는 입술로 말했다.

“네 생각은 어때? 이게 정말 최선일까? 차라리 널 사형시키고 나는 폐위되는 게 더 나은 결말일 것 같아.”

“그런 건 생각하지 마십시오. 모든 것이 제 잘못이니 폐하께선 저만 원망하시면 됩니다.”

“그래…….”

아란은 피식 웃으며 그의 머리칼을 헤집었다. 그의 머리칼과 얼굴은 아란처럼 온통 땀에 젖어 있었다. 대공은 애타게 제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매달렸다.

“아파?”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매질이 멈춘 이제야 고통스러웠다. 못 견디게 아팠다. 제가 했던 모든 행동이, 애정이 사라진 그녀를 보는 게 고통이었다. 아란을 저렇게 만들고도 아무것도 포기할 수 없는 저 자신이 역겨워 미칠 것 같았다.

“다행이야. 네가 아픔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라서.”

“…….”

“더 아파했으면 좋겠어. 더 괴로워했으면 좋겠어. 애간장이 끊어지는 게 무슨 느낌인지 알았으면 좋겠어.”

아란이 진심을 담아 속삭였다. 애석하게도, 대공은 이미 그 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내색하면 아란이 싫어할 것이기에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

“그리하겠습니다.”

그 말에 아란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녀는 더러운 것이라도 만진 것처럼 서둘러 손을 거두곤 도망치듯 그의 곁을 떠나버렸다.

집무실을 나서니 로지나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그녀는 재빨리 아란의 몸에 상처가 없는지 살폈다. 땀을 많이 흘리긴 했지만 드러난 피부는 평소와 똑같이 희고 매끈했다. 그러나 로지나는 대공이 보이지 않는 안쪽을 때렸을까 봐 마음을 놓지 못했다.

독대 중 갑자기 대공이 집무실 문을 박차고 나왔을 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별생각이 없었다. 그가 난데없이 구는 게 하루 이틀은 아니었으니. 그러나 잠시 후 채찍을 들고 나타났을 땐 그야말로 기겁했다. 로지나는 용감하게도 그 앞을 막아섰다.

“무엇을 하려 하십니까, 전하!”

“비켜.”

대공의 눈을 보는 순간 그녀는 깨달았다. 그를 방해하면 이번에야말로 크게 다칠지도 모른다는 걸. 로지나는 결국 물러섰고, 대공은 그대로 집무실로 들어가 버렸다.

“다치신 곳이라도…….”

황제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한눈에 보아도 그녀는 몹시 불안정해 보였다.

멍한 얼굴로 서 있던 황제가 입술을 달싹였다.

“안에…….”

“예?”

“안에 그 사람이…….”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아란은 아직도 흥분이 가시지 않아 떨리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조금 전까지 제 손으로 채찍을 휘둘렀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노예처럼, 말 못 하는 가축처럼 그는 그녀가 내리는 고통을 감내했다.

이런 게 폭력이라는 것일까. 짓밟는 기분도 짓밟힐 때만큼이나 끔찍했다. 대공이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 차라리 다행이었다. 그가 조금이라도 신음을 흘리거나 아픈 기색을 보였다면 그녀는 분명 비명을 지르며 집무실을 뛰쳐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마냥 괴로웠다기엔 분명 이전엔 느껴본 적 없는 후련함이 있었다. 복잡한 감상과 어중간한 죄책감까지 한데 뭉쳐 당장이라도 토할 것 같았다. 그녀는 떨리는 손을 들어 집무실을 가리켰다.

“들어가서, 저 사람 좀 어떻게 해. 내가 다시 돌아왔을 때……. 눈앞에 안 보이게.”

“알겠습니다, 폐하. 그렇게 할 테니 진정하세요.”

로지나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녀의 주제넘은 행동을 지적하려던 아란은 로지나의 눈동자 안에 비친 자신을 보았다. 제왕다운 차림을 하고 있지만 꼭 패잔병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아란은 입을 다물고 비척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멀어지는 황제의 등을 바라보던 로지나가 굳게 닫힌 집무실 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긴장으로 마른 침이 넘어갔다.

대공께선 안에서 뭘 하고 계신 거지?

대공을 마주하는 건 겁났지만 황제의 명령이 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조심스레 집무실 안으로 들어간 로지나는 안에서 보게 된 풍경에 숨을 삼켰다. 대공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로 엎드려 있었는데, 등이 온통 피투성이였다.

“저, 전하…….”

“폐하께서는 가셨나?”

“예.”

로지나는 서둘러 그에게 다가가 부축하려 했지만 그 전에 대공이 먼저 몸을 일으켰다. 로지나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그녀가 얼어 있는 동안 그는 바닥에 떨어진 겉옷을 주워 그대로 걸쳤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로지나가 그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전하, 어서 치료를……!”

대공은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그마저 집무실을 나가고, 혼자 남은 로지나는 혹시나 이번 일이 밖으로 새어나갈까 다른 이를 부르지 않고 손수 집무실을 정리했다.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도대체 일이 어떻게 되어가는 건지 알 수 없었다.

* * *

아란은 침대에 누워 이불을 목 끝까지 뒤집어썼다. 그녀의 침실엔 벽난로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지만 자꾸만 한기가 돌았다.

예고도 없이 앓아눕는 게 새삼스러울 일은 아니었다. 아란은 몸이 약했고, 큰 충격으로 흐려진 정신은 금방 계절의 영향을 받았다. 이번에는 조금 시기가 일렀지만 어릴 때부터 그녀는 계절이 접어들 때마다 곧잘 아팠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면 온도도, 풍경도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이번에도 역시 그럴 것이다.

열에 들떠 부유하던 정신이 떠오르다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아란은 잠결에 누군가 자신의 곁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잠든 내내 그의 기척이 느껴졌다. 확인할 것도 없이 대공이라는 걸 알았다.

“무엄하게…… 허락도 없이 들어오다니…….”

그녀가 갈라진 입술로 중얼거렸다. 그를 욕하고 비난하고 싶은데 목소리에 힘이 다 빠져 하나도 위협적이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아란은 가늘게 눈을 뜨고 제 옆에 앉아있는 남자의 윤곽을 보았다. 그렇게 맞고도 그는 여전히 건재해 보였다. 분명 때린 건 그녀인데, 어쩐지 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가. 다른 사람 부를 거야.”

“사람을 전부 물렸습니다. 날이 밝기 전엔 아무도 오지 않을 겁니다.”

“그래…….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그대 것이지.”

아란이 쓰게 웃었다. 처지가 바뀌었어도 아직 그녀는 대공의 손아귀에 갇혀 있었다. 아란은 주먹을 꽉 쥐었다.

“시중은 없어도 돼.”

예전엔 혼자 앓는 게 퍽 서러웠던 것 같은데, 그 난리를 겪고 나니 그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게 느껴졌다.

“그러니까 나가. 그대를 보면 나을 것도 안 나을 것 같으니까.”

저번처럼 고집을 부릴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는 순순히 일어섰다.

“문 앞에 있겠습니다. 필요하시면 종을 울리십시오.”

공손한 어조에 아란이 피식 웃었다.

“그렇게 말하니까 정말 시종 같네. 대공 작위는 팽개치고 다시 시종으로 돌아가기로 한 거야?”

아란이 답지 않게 빈정거렸다. 막 돌아섰던 그가 다시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시켜만 주신다면.”

진심이라는 것을 깨닫자 속이 거북해졌다. 괜한 말을 했다. 아란은 진저리를 치며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렸다.

“빨리 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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