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하의 밤-86화 (86/146)

86화

보는 눈이 사라진 후, 아란이 차갑게 쏘아붙였다.

“따라오라고 한 적 없어.”

“종이 주인을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대공의 태도는 이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아란을 조롱하기 위한 과장된 공손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아란은 걸음을 멈추고 대공을 노려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놀랍게도 그가 긴장하고 있다는 것이 생생히 느껴졌다. 그녀는 충동적으로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에게 자신이 얼마나 큰 영향력을 가졌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손가락이 가볍게 얽혔다. 대공의 무심한 얼굴은 평소와 같았지만 아란은 그의 목울대가 크게 일렁이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곧바로 거두려는 손을 대공이 잡아채 입을 맞췄다.

“돌아오셔서 기쁩니다, 폐하.”

대공이 진심으로 말했다. 아란이 사일러스 공작의 영역을 벗어났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기뻐 미칠 것 같았다. 전쟁에 찬사라도 보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손끝에 닿은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란은 서둘러 대공에게 잡힌 손을 잡아 뺐다. 뒤늦게 긴장한 건 대공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다른 남자와 결혼하겠다는 유치한 협박에 세상이 무너질 것 같은 표정을 짓는 한심한 자라는 걸 알면서도, 두려움이 학습된 몸은 아직도 그 앞에서 바짝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녀는 다시 고개를 돌려 그의 눈을 피했다. 부디 그의 눈엔 그 모습이 회피가 아니라 외면으로 보이길 바라면서.

“아직 완전히 마음을 굳힌 건 아니야.”

“괜찮습니다.”

아란은 초조함을 숨기려 주먹을 꽉 쥐었다. 그의 차분한 목소리도, 꼿꼿한 목도 전부 거슬렸다. 자격지심 때문일까, 똑같이 긴장했어도 대공 쪽이 훨씬 여유로워 보였다. 주도권을 가진 건 그녀인데도 그랬다.

“내 앞에선 허락할 때까지 고개를 들지 마.”

저 눈빛만 보지 않아도 그를 상대하기가 훨씬 수월할 것 같았다.

대공은 시키는 대로 고개를 숙였다. 비굴한 모습은 꽤 마음에 들었다. 아란은 그를 내버려 둔 채 다시 걸음을 옮겼다.

* * *

황제가 돌아오면 대공과 한바탕 기 싸움을 할 거라던 귀족들의 우려와 달리, 두 사람은 겉보기엔 아무 문제도 없는 것처럼 평화로웠다.

아란으로서도 그 상태가 마음에 드는 건 아니었지만 이즈미와 라세르 간의 전쟁을 처리하는 것만으로도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대공과 으르렁거릴 시간이 없었다.

아란은 라세르 국왕에게 보내는, 거의 협박에 가까운 협상 제안을 작성하며 드물게 분을 참지 못했다. 이즈미를 적극적으로 돕지 않는 것과 별개로 그녀는 라세르 국왕에게 감히 제국의 허락 없이 전쟁을 일으킨 책임을 톡톡히 물릴 생각이었다.

“라세르 국왕이 협상에 응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대공이 물었다.

“제국의 무력이 어느 정도인지 몸소 체험하게 되겠지. 이즈미 국왕은 차라리 그걸 바랄지도 몰라. 어차피 나라는 지키지 못하겠지만 복수는 톡톡히 하게 될 테니 말이야.”

지극히 사무적인 목소리로 대답한 아란이 봉투 겉면에 인장을 찍었다.

시종에게 서신을 건네고, 아란은 잠시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쌌다. 현기증이 몰려왔다. 그러나 아직 처리하지 못한 일들이 산더미였다.

“다음 보고는…….”

“보고를 듣기 전에 먼저 쉬셔야 합니다.”

대공이 다가와 아란의 손에 들린 펜을 가져갔다.

“일이 밀렸어.”

“이미 충분히 무리하셨습니다. 더는 안 됩니다.”

건강하게 그을린 낯이 무색하게, 아란의 얼굴엔 짙은 피로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대공은 당장이라도 그녀가 쓰러질까 봐 내심 안절부절못했다. 그녀가 며칠이나 눈 뜨지 않던 지난날이 뇌리에 박혀 자꾸만 그를 불안하게 했다. 그 탓에 강압적인 말투가 나왔던 것도 같다.

아란이 대꾸하지 않자 멈칫한 대공은 제 말투가 어땠는지 몇 번이나 곱씹었다. 살아오며 한 번도 해보지 않은 행동이었다.

“남은 일은 제가 할 테니 폐하께선 쉬십시오.”

이번엔 훨씬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설득하려 했다.

“그대가 참견할 일이 아니야.”

아란은 조금 기막힌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 차갑게 쏘아붙였다. 그러나 그녀도 점점 한계가 오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아란은 펜을 돌려달라고 말하는 대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팔을 늘어뜨렸다.

하긴, 결정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대공이 나서서 번견 노릇을 자처했으니 그녀는 부리기만 하면 되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했다. 그대로 눈을 감자 대공이 슬그머니 그녀의 뒤로 다가와 머리와 목을 주물렀다.

갑자기 타인의 체온이 닿자 놀란 아란이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대공과 바로 눈이 마주쳤다. 며칠 만에 보는 눈동자였다. 저번에 명령을 내린 이후, 그는 한 번도 그녀 앞에서 시선을 들지 않았다.

아란은 버릇처럼 그의 손을 뿌리치려다 그냥 놔두었다. 너무 밀어내서 그가 마음을 단념해버리면 곤란했다. 그리고 커다란 손이 뭉친 근육을 푸는 건 생각보다 꽤 기분이 좋았다.

“으…….”

그의 손이 뭉친 곳을 곧장 누르는 바람에 아란이 인상을 쓰자 대공은 곧바로 손아귀에 힘을 풀고는 부드럽게 문질렀다. 저의 억센 손이 연약한 살갗에 멍이라도 남기지 않을까 살피는 꼴이 정말로 개와 다를 게 없어 아란은 헛웃음을 흘렸다.

내가 황제가 맞긴 맞나보다…….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남자를 종처럼 부리니 말이야.

아란은 대공의 수려한 낯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반면 대공은 모처럼 기분이 좋아 보이는 아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대화를 나누고 싶어 아까부터 고민 중이었다. 망설이던 그는 내키지는 않지만 다나르에서의 생활을 물었다.

“다나르는 어떠셨습니까. 듣자 하니 낚시에 재미를 붙이셨다고요.”

“아주 좋았어. 매 순간 꿈에서 깨어나진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아란이 몽롱한 눈으로 허공 어딘가를 응시했다. 지금이라도 황궁을 박차고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얼굴로.

대공은 다나르 이야기를 한 것을 후회했다.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걸 그랬다. 그러나 아란은 눈치 없이 계속 말을 이었다.

“나중에, 나이가 들면 그곳으로 돌아갈 거야.”

“다나르의 어디가 그리 마음에 드십니까.”

부드러운 손길에 마음이 조금 풀어진 그녀는 저도 모르게 속내를 조금 드러냈다.

“바다. 다나르 바다를 볼 때면, 늘 그 안에 잠겨서 죽고 싶어져.”

대공이 움직임을 멈췄다. 그의 속을 잔뜩 뒤집어 놓고, 아란은 되레 무슨 영문이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공은 치미는 감정을 억누르고 입을 열었다.

“살고 싶어서 다나르로 가신 게 아니었나요.”

“맞아.”

“그런데 어째서 죽음을 말씀하십니까.”

그 목소리가 아주 차분해서, 아란은 그의 인내가 바닥을 보이기 직전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당장 죽겠다는 소리는 아니야. 다만 짐의 혈육들은 전부 비명횡사했으니 짐 역시 그렇게 될지도 모르지. 그럴 바엔 사랑하는 장소에서 최후를 맞는 게 좋을 것 같아.”

무심하게 대답하던 아란은 순간 묘하게 힘이 들어간 손놀림에 정신을 차렸다가 무섭게 굳어진 대공의 얼굴을 보고 흠칫 놀랐다. 그러나 그의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다. 무엇이 그의 심사를 뒤틀리게 했는지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게 자신의 잘못은 아니었으니까.

“앞으론 다나르에 가실 수 없을 겁니다.”

못 박듯 확고한 어조에 아란이 뒤늦게 그를 밀어내며 자세를 바로 했다.

“그대가 무슨 권한으로 그걸 정하지?”

“…….”

“이제 그대의 말은 듣지 않을 거야.”

대공이 재차 손을 뻗었지만, 아란은 더 이상 그를 받아들여 주지 않았다. 그는 입 안을 한 번 짓씹고 말을 이었다.

“제게 망가지지 말고, 죽지도 말라고 하셨지요.”

“그래.”

“그리하겠습니다. 하지만 그건, 제가 굳건히 버티는 한 폐하께선 저 외에 아무것도 가질 수 없다는 뜻입니다. 다나르도, 사일러스 공작도 포함해서 말입니다.”

말하는 내용은 오만했으나 그답지 않게 목소리가 떨려 애걸하는 것으로밖엔 보이지 않았다. 아란은 할 말을 잃고 황망하게 그의 얼굴만을 바라보았다.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마십시오. 죽음 같은 건 생각도 하지 마십시오.”

“비, 비켜. 침실로 가겠어.”

아란은 매정하게 대공을 밀어냈다. 그러나 그는 꿈쩍도 안 했다.

“비키라고 했잖아.”

“약속해 주십시오.”

아란은 점점 화가 났다. 어쩌면 지금의 비굴한 모습도 그녀를 휘두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할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자 그의 모든 것이 정말 가식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애초에 그는 감정이라곤 모르는 냉혈한이었다. 목적을 위해선 제 부모도 아무렇지 않게 버리는 자이니 사랑 따위는 대수롭지도 않을 것이다.

“비키라니까!”

화를 내도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약속을 받지 못한다면 언제까지고 버티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그 꼴을 보니 부아가 치밀었다. 아무래도 저 남자를 한 대 때리지 않고는 못 견딜 것 같았다.

아란은 망설이지 않고 그의 얼굴을 내리쳤다. 그래도 대공은 비키지 않았다.

“더 때리셔도 됩니다. 마지막에 약속만 해주신다면.”

그래서 더 많이 때렸다. 한 대, 두 대, 얼굴로도 모자라 닥치는 대로 때리고 꼬집었다.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로지나의 뒤통수를 때리는 일은 그리 망설여졌었는데, 그에게 손을 올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때리는 솜씨는 어설펐다. 그러나 대공은 그녀의 힘이 예전보다 확연히 세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냘픈 손과 손목이 그의 강건한 어깨에 연달아 부딪혔다. 때리는 사람만 더 아픈데도, 아란은 그를 때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읏,”

어느 순간 아란이 억누른 신음을 흘리자, 대공은 그녀의 두 손을 잡아 간단히 제압하곤 엄지손가락으로 붉게 부어오르기 시작한 손등을 쓸었다. 그에게 어떤 타격도 주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은 아란은 공포를 숨기기 위해 더 날카롭게 외쳤다.

“이거 놔!”

의외로, 그는 순순히 아란을 놓아주었다.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곧장 방을 나섰다.

혼자가 된 아란은 비틀거리며 의자에 앉았다. 씁쓸한 웃음이 흘렀다. 내가 없으면 당장이라도 죽을 것처럼 굴더니, 고작 몇 대 맞은 걸 가지고…….

다시 대공이 침실로 돌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와 실랑이가 오간 것도 같았다. 아란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다시 집무실로 돌아온 그의 손에 기다란 물건이 들려 있는 것을 깨달았다. 채찍이었다.

아란은 그대로 얼어붙어 숨을 죽였다. 안 그래도 위협적인 물건이 그의 손에 들려 있으니 배로 무서웠다. 눈물이 통하지 않는 것을 알았으니 다시 예전처럼 폭력으로 그녀를 굴복시키려는 것이다. 그때보다도 더 무자비하고 잔인하게.

떨면서 뒷걸음질 치는 그녀를 향해 대공이 곧바로 다가왔다. 이제 곧 저 물건이 그녀의 살갗을 찢어놓을 것이다. 아란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도, 매서운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손안에 무언가가 잡혔다. 아란은 조심스레 눈을 떴다. 어느새 채찍은 제 손에 들려 있었다.

“무슨 짓이야?”

“손을 다치십니다.”

담담하게 대답한 대공이 겉옷을 벗고 그녀 앞에 무릎을 꿇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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