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억지로 읽을 필요는 없어.”
그녀가 서둘러 공작의 손에 들린 종이를 도로 가져가려고 했다. 막 종이에 손가락이 닿았을 때, 공작이 슬쩍 팔을 올렸다. 아란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직 다 못 읽었습니다.”
“형편없으면 눈치 보지 않고 솔직히 말해도 돼.”
어색하게 팔을 내리고 우물쭈물하는 아란의 모습은 딱 제 나이처럼 사랑스러웠다. 저도 모르게 안아버리고 싶어질 만큼.
주군으로서의 경애와 여자로서의 연모하는 감정 사이에서, 공작은 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아란은 그를 남자로 생각하지 않는 만큼 무방비했다. 지금처럼 그녀가 자의로 제게 다가올 때마다, 어디까지 허용될까 하는 마음에 손을 뻗었다 물린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공작은 붉어진 아란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머무르는 시간에 비례하여 아란의 뺨은 더 달아올랐다.
조금 더 시간을 끌면 분명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는 서둘러 계획서로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감히 제가 평가할 위치는 아니지만, 정말 괜찮습니다. 몇 가지는 당장 실천에 옮기고 싶을 정도입니다. 구상하신 대로 전부 실현하려면 백 년이 걸려도 모자랄 테지만 말입니다.”
칭찬받은 아이처럼 아란의 얼굴이 환해졌다.
공작은 이 순간이 정말 행복했다. 지금처럼 평소에는 보기 드문 표정을 마주할 때면, 그는 아란이 제 사람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곤 했다. 그러나 제게 허락된 것이 거기까지라는 것 역시 잊지 않았다. 사랑을 고백하는 순간 두 번 다시 저 얼굴을 보지 못하게 될 거라는 사실을, 그는 이미 겪어 알고 있었다.
공작은 태연하게 웃는 얼굴 아래로 육욕을 억눌렀다.
남자로 설 수 없다면, 적어도 그녀의 가장 총애하는 신하라도 되자.
“그래? 괜히 날 배려한다고 거짓을 말하는 거라면…….”
“빈말이 아닙니다. 아란흐로드 님.”
아란이 들고 있던 펜을 떨어뜨렸다. 대리석 바닥에 펜 끝이 깨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으응…….”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이름을 불러도 된다고 허락한 사람이 바로 그녀 자신이었으니 공작을 탓할 처지가 못 되었다. 사일러스 공작은 그것을 모르는 척하며 펜을 주워 아란에게 내밀었다.
“떨어뜨리셨습니다.”
“고, 고맙네.”
아슬아슬하게 손가락이 닿았다. 아란이 불에 덴 것처럼 놀라며 펜을 빼앗듯 넘겨받았다. 공작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태연하게 웃었다.
이 정도 욕심은 부려도 되지 않을까.
* * *
바쁜 와중에도 사일러스 공작은 시간을 내어 빈민촌을 함께 둘러보자는 제안을 했다. 내키는 일은 아니었다. 또다시 마음 아픈 장면을 보게 될까 봐, 아란은 미리 걱정부터 했다. 그러나 결국 그 거리가 어떻게 변하는지 눈으로 확인해보는 게 더 의미가 있지 않겠냐는 공작의 말에 설득되었다.
요란하게 행차하여 그들을 성가시게 할 생각은 없었으므로, 아란은 조금 떨어진 곳에 마차를 세워두고 빈민가의 모습을 안에서 지켜보기만 했다. 울적한 기분을 눈치챈 사일러스 공작이 쾌활한 어조로 물었다.
“빈민촌의 환경이 개선되면, 그땐 뭐라고 부를까요? 지금은 구역별로 옛 성인의 이름을 따서 부르고 있긴 한데, 모습이 달라지면 이름도 바꾸는 것이 좋겠죠. 지금부터 생각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공작의 말에 아란은 생각에 잠겼다. 보통 이런 마을 이름은 그 마을을 세우거나 발전시키는 데 가장 공헌한 사람의 이름이나 그 상징을 따서 짓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름을 붙이는 건 너무 생색내는 것 같고, 아란은 제 상징이 무엇인지 떠올렸다.
“음……. 떠돌이 낚시꾼 마을?”
진심으로 한 말인데, 공작은 농담이라고 여겼는지 웃음을 흘렸다.
몇 달 만에, 아란은 공작의 허무맹랑한 말장난을 제법 따라 하게 되었다. 그가 건넨 농담 중 인상 깊었던 것을 기억해 두었다가 로지나에게 써먹으면,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박장대소하곤 했다. 공작 역시 마찬가지로 아란이 농담 비슷한 말만 꺼내도 웃음을 참지 못했다.
아란이 생각하기에 그녀는 재치나 말장난과는 거리가 먼 것 같은데, 생각보다 남들을 즐겁게 하는 일에 재능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건 제법 뿌듯한 일이었다.
아란은 공작에게서 눈길을 거두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낮의 빈민가는 밤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한치의 공간 낭비도 허용치 않겠다는 듯 빽빽하게 들어찬 집들은 얼핏 거대한 성벽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사이에 난 좁은 골목길은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로 붐볐다.
예상보다 보기 괴로운 광경은 아니었다. 사람들의 표정은 다소 지쳐 보였으나 아란이 생각한 고통이나 비참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은 저들만의 왕국을 세우고 각자의 방식으로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건 감히 어쭙잖은 동정 따위로 좌지우지할 수 없는 존엄함이었다. 그녀는 그들을 구원할 자격도, 능력도 없었다. 다시 황제가 된다 한들 마찬가지였다.
아란이 할 수 있는 건 그들이 이대로 계속 고립되지 않도록 돕는 것뿐이었다. 그들의 왕국엔 자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했으니까. 그러나 황제가 아닌 이상,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그녀 역시 저들처럼 온몸으로 부딪쳐야 했다.
“이름은 아무래도 좋으니까 빨리 보고 싶어.”
아란이 중얼거렸다.
“그렇게 되실 겁니다.”
공작이 확신에 찬 어조로 대답했다.
그러나 결국, 아란은 빈민촌이 변하는 과정을 곁에서 지켜볼 수 없게 되었다. 황궁으로 돌아가는 날이 예상보다 일찍 왔기 때문이었다.
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두 나라, 이즈미국과 라세르국 사이에 전쟁이 터지며 이즈미 국왕이 제국에 지원을 요청했다. 아무리 대공이 대리 자격으로 국사를 돌본다 한들, 황제가 멀쩡히 살아있는데 그녀의 승인 없이 군대를 움직일 수는 없었다.
아란은 황궁에서 급히 도착한 전갈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오랜 원한 관계로 얽힌 두 나라 사이에 전운이 감돈 것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제국이 잘 중재를 하고 있었는데, 아란이 자리를 비웠다는 것이 암암리에 알려지며 라세르 쪽에서 일을 벌인 것 같았다. 병력이나 군수 규모를 보니 한 눈에도 라세르가 오랜 기간 이 전쟁을 준비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승패에 상관없이 전쟁이 길어지면 제국에도 그만큼 타격이 오게 되어 있었다. 특히 두 나라에서 흘러들어올 패잔병과 난민들도 문제였다. 국경과 인접한 곳에 있는 도시들은 벌써 경계 태세였다. 빠르게 대처해야 하는 만큼, 이제는 더 머뭇거릴 여유가 없었다. 고민은 끝났다.
“돌아가야겠어.”
생각보다 담담하게 그 말이 흘러나왔다. 괴롭지 않다면 거짓말일 테지만, 예상처럼 못 받아들일 만큼은 아니었다.
공작은 대답이 없었다.
그는 갈등에 빠졌다. 그녀가 치열한 정쟁과 암투에서 눈을 돌리고 이대로 평온해지길 바랐다. 그러나 그 결정을 내리기 위해 그녀가 고심했는지 곁에서 지켜본 사람 역시 그였다. 사랑을 핑계로 대공과 같은 짓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공작의 침묵이 길어지자 아란은 그가 자신을 한심하게 여긴다고 생각했다. 도망칠 용기도 없어 되돌아간다고 생각하지는 않을까. 아란은 변명처럼 입을 열었다.
“나도 아네, 내 결정이 어리석게 들린다는 걸…….”
“그런 게 아닙니다.”
그가 어딘지 침통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눈빛 역시 어딘지 복잡해 보였다. 아란은 그의 미묘한 동요를 눈치챘다.
“공?”
그러나 전부 착각이었던 것처럼, 공작은 이내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돌아왔다.
“잠시 기다리십시오. 드릴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고 묻기도 전에 공작은 아란을 두고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 그의 손엔 납작한 모양의 반지가 들려 있었다. 황제의 인장이었다.
“이걸 왜 공이…….”
“대공께서 제게 맡기셨습니다.”
“대공이…….”
아란은 가만히 인장을 받아 손가락에 껴보았다. 그녀의 손가락 둘레에 맞춰 제작된 인장은 한시도 몸에서 떼놓은 적 없던 것처럼 익숙하게 느껴졌다.
멍하니 인장을 내려다보던 그녀가 괴롭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고백했다.
“사실, 대단한 각오나 포부가 있어 황궁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야.”
“…….”
“그자를 옆에 두고 괴롭히고 싶어. 그가 내게 그랬듯이, 숨도 못 쉬게 말일세.”
대공은 아란의 뼛속 깊이 두려움을 새겨넣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파이고 쪼개진 틈을 전부 메우고도 남을 만큼 증오가 뜨겁게 끓어올랐다.
“그렇게 하십시오. 원하신다면 저도 돕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도 대공께 맺힌 것이 많아서요.”
부드러우면서도 어딘지 냉소적인 공작의 말을 듣고 있으면 묘하게 위안이 되는 것 같았다. 아란은 공작을 따라 웃었다. 누가 봐도 억지라는 것을 알아볼 테지만 떨거나 우는 꼴을 보이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
“그래. 그 사람, 여기저기 원한 살 일이 많지.”
“전 그저, 폐하께서 더 아프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아픔을 느낄 수 있다는 건, 내가 아직 살아있다는 증거니까.”
* * *
황궁은 변한 것이 없었다. 보는 이가 질릴 정도의 화려함, 보기엔 우아해도 속내는 그악스러운 귀족들, 그리고 여전히 모든 사람 위에 군림하는 대공까지, 모든 것이 아란이 떠나기 전과 똑같았다. 아란은 놀랄 만큼 열기 없는 눈으로 그 모든 것을 바라보았다. 이제 그것들이 그리 대단한 가치를 지니지 못했음을 알았다.
아란이 돌아오기 무섭게 급히 회의가 열렸다. 자세한 전황을 보고 받은 그녀는 그간 공백이 무색할 정도로 빠르게 명령을 내렸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즈미는 진작 국운이 다했소. 그들이 그간 제국에 보여준 충의를 생각하여 병력을 지원하긴 하겠지만, 상황이 불리해지면 곧바로 후퇴하라 명하시오.”
이미 병력을 지원해도 의미가 없을 만큼 전세는 확연히 기울어져 있었다. 어쩌면 이번 전쟁으로 이즈미는 멸망하게 될지도 몰랐다. 이즈미는 오랜 우방이었으나, 결과가 빤히 보이는 일에 자국민을 끌어들여 희생시킬 수는 없었다.
“우방인 이즈미를 이런 식으로 저버린다면 어떤 나라가 제국을 존경하고 따르겠습니까?”
이즈미 국왕의 친척인 이스터 백작이 반대했다.
“그렇다면 제국의 젊은이들이 타국에서 허무하게 죽음을 맞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하지만…….”
“물론 짐도 이대로 우방국을 저버릴 생각은 없소. 이즈미가 원한다면 짐은 기꺼이 라세르 국왕을 만나 협상을 중재할 의지가 있으며, 설령 협상이 결렬된다 하더라도 이즈미 왕족들의 안전을 최대한 보장할 것이오.”
이스터 백작은 그 후에도 아란을 설득하려 들었지만, 그녀의 뜻이 워낙 강경하고 다른 귀족들의 반응 역시 냉랭하자 결국 입을 다물었다.
상황을 정리한 아란은 회의 종료를 선언하고 자리를 떴다. 자연스레 대공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