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다시 다나르로 돌아오는 내내, 사일러스 공작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실은 황궁에서 대공이 다나르에 다녀갔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부터 계속 이런 상태였다.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그가 그곳까지 간 이유는 뻔했다. 별일은 없었다고 하지만 찜찜한 기분이 가시지 않았다.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그 작자가 그분을 놀라게 해드린 건 아닐까.
대공의 흔적만 보아도 놀라 겁먹는 아란이, 실제로 그를 맞닥뜨리고 얼마나 놀랐을지 걱정이 되었다.
조금 더 경계를 철저히 해야 했는데.
자책은 성에 도착할 때까지 이어졌다. 그는 도착하기 무섭게 아란을 찾았다. 그녀는 그의 서재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브린 님.”
말을 건넸지만 그녀는 여전히 책에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못 들은 걸까, 공작이 한 발짝 더 다가서며 다시 입을 열었다.
“돌아왔습니다, 브린 님.”
“아란흐로드라고 불러도 화내지 않겠네.”
책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아란이 무심히 말했다. 공작은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몰라 대답할 때를 놓쳤다.
“허락하지 않았는데도 내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자가 있지 않겠어. 그리 생각하니 공이 못 부를 건 뭔가 싶어서.”
그 허락받지 못한 자가 대공을 가리킨다는 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침착한 목소리와 달리, 아란이 그에게 몹시 분노하고 있다는 것을 공작은 여실히 느꼈다. 이렇게 홧김에 제게 이름을 허락할 만큼.
어린 나이답지 않게 감정 기복이 드문 편인 그녀지만, 대공이 얽힌 일엔 좀처럼 동요를 숨기지 못했다. 사일러스 공작은 그것이 안타깝고 싫었다. 그건 아직 그녀에게 대공이 그만큼 중요한 사람임을 증명하는 것 같았다.
“대공이 브린 님께 무슨 일이라도 한 겁니까.”
“걱정하는 일은 없었어. 예전과 비교하면 아주 유순해져서 내심 놀라울 정도였지.”
아란이 쓴웃음을 흘렸다. 긴 손가락 아래 종이가 구겨졌다. 아란의 눈은 아직도 글자를 향하고 있었지만, 공작은 아까부터 종이가 한 장도 넘어가지 않았다는 것을 눈치챘다.
“공.”
“말씀하십시오.”
“만약, 내가 다시 황궁으로 돌아가면…….”
그 말에 공작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굳혔고, 아란은 말끝을 흐렸다.
“황궁이라니요? 그자가, 대공이 협박이라도 한 겁니까?”
그는 드물게 분노하며 성큼성큼 그녀의 곁으로 다가섰다. 대공의 치졸함은 알면 알수록 끝이 없었다. 이런 식으로 자신을 황제 곁에서 떨어뜨리곤, 그 사이에……. 그의 오해를 알아챈 아란이 서둘러 부인했다.
“그건 아니야. 협박은 오히려 내가 했네.”
“예?”
공작은 화를 내던 것도 잊고 되물었다.
“아주 유치하고 저열한 협박이었지. 황제가 아니라 협잡꾼이 돼야 했었는지 잠시 고민할 정도로.”
아란의 입술에 자조가 걸렸다. 공작은 그녀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협잡꾼처럼 구는 그녀의 모습은 유순한 대공만큼이나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아란이 책을 덮고 고개를 들어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공이 예전에 말한 적 있지. 나를 주군으로서 존경한다고.”
“예.”
“다시 한번 묻고 싶어. 그 말이 진심인지.”
그렇게 묻는 아란의 얼굴은 긴장 때문에 조금 딱딱해 보였다. 물론 그는 황제인 그녀를 존경했다. 후계자로 제대로 교육만 받았다면, 황가에 닥친 비극만 아니었다면, 그녀는 모두의 사랑과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성군이 되었을 것이다.
“물론입니다.”
공작이 힘주어 대답했다. 단호한 대답으로 황제로서 존경하는 마음보다, 여자로 사랑하는 마음이 더 큰 것을 감추고 싶었다.
우습지도 않은 일이었다. 그녀가 구부리는 대로 굽히고, 바람 부는 대로 휘어지는 사람이었다면 처음부터 눈길도 주지 않았을 거면서, 이제는 아란이 고집도 의지도 없는 나약한 사람이길 바라게 되었다. 신하가 아닌, 그녀가 기댈 수 있는 남자가 되고 싶었다.
그 속을 모르는 아란은 눈에 띄게 안도한 기색이었다.
“고맙네. 그 말이 얼마나 의지가 되었는지 공은 모를 거야.”
반면, 공작은 불안을 억누르고 물었다.
“황궁으로 돌아가고 싶으십니까?”
“모르겠어. 대공 때문에 이러는 건 아니니 그리 무서운 표정 지을 건 없어. 돌아간다면 전부 내 의지일 거야.”
딴에는 안심시키기 위해 한 말이었으나, 오히려 그것이 공작의 마음을 아프게 할퀴었다.
결국, 자신은 그녀에게 안식처가 되지 못했다. 그는 손톱이 살에 박히도록 주먹을 세게 쥐었다. 보내주기 싫었다. 그냥 이대로, 그녀가 성에서 낚시나 하면서 아무 걱정 없이 살았으면 했다.
“왜 돌아가려고 하십니까?”
“그러게. 그렇게 싫었는데, 그래도 꼴에 황족이라는 건지 이대로 외면하는 게 힘드네.”
아란의 시선이 다시 책으로 옮겨갔다.
“하지만 아직 결정을 내린 건 아니야. 이 도시가 너무 좋아서 떠나기 싫으니까. 공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사일러스 공작위가 탐날 정도로.”
그녀가 서툴게 농담을 했다. 그러나 정말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주저 없이 공작위를 선택할 만큼 아란은 다나르를 사랑했다.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푸른 바다, 깎아지른 절벽, 그리고 다정하고 활기찬 사람들까지, 다나르는 모든 것이 빛나는 도시였다.
그러나 책임감은 자꾸만 그녀의 등을 떠밀었다. 달아나려 해도 결국 외면할 수 없는 그 감정은 마치 대공을 닮아 있었다. 아란은 대공의 까칠한 낯을 떠올렸다.
난 아직도 황제로 남고 싶은 걸까?
대공이 완전히 무너지지 않길 바라는 건 아직 그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나라를 향한 일말의 책임감이 남았기 때문이었다.
도망친 후에도 그녀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던 것들이 있었다. 궁핍한 농부와 그의 가족들, 작은 마을의 의사, 로지나가 조사한 빈민들의 생활상까지. 도피하듯 낚싯대를 드리우고 물고기를 기다려도, 그녀는 그런 것들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운이 좋아 성공적으로 타국으로 망명한다 한들, 책임감은 끝까지 그녀를 뒤쫓아 올 것이다. 밤마다 제 손으로 끝내지 못한 일들,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들을 생각하며.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최악의 요소를 다 갖췄다. 무능함과 미련함, 쓸데없는 고집까지.
그건 도대체 누구에게 물려받은 것일까. 부황? 모후?
아란은 두 사람을 쏙 빼닮은 자신을 향해 쓰게 웃었다.
* * *
“로지나.”
아란이 이름을 부르자 로지나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대공을 만난 이후로 내내, 아란이 눈길이라도 줄라치면 저런 상태였다. 저렇게 겁많은 소녀가, 그날엔 어떻게 자신을 구하겠다고 나섰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로지나?”
“……예.”
대답하는 모양새가 비장하기까지 했다. 그 모습을 보던 아란이 가볍게 혀를 찼다. 그 소리에 또 어깨를 움츠리는 게 눈에 거슬렸다.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다.”
잔뜩 경직된 태도가 언뜻 그날의 대공을 연상시킨 탓도 있었다. 물론 로지나의 죄는 대공과 비교하는 게 민망할 만큼 가벼웠다.
태연한 목소리에 로지나가 그녀의 속내를 가늠하듯 눈을 굴렸다. 아란의 표정은 평소와 같았다. 화가 나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녀에게 화를 내고 싶지는 않았다. 모든 일은 전부 대공에게서 비롯된 일이었다. 주인의 죄를 종에게 묻는 건 치졸한 행동이었다.
“옷을 갈아입고 싶구나.”
로지나는 빠른 눈치로 오늘도 아란이 제게 화를 내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았다. 어쩌면 영영. 그녀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삼키며 평소보다 더 살뜰하게 아란의 시중을 들었다.
그러나 아란은 다른 방식으로 그녀를 당혹스럽게 했다.
“너는 왜 대공을 따르는 거니?”
달처럼 은은하게 빛나는 백금발을 빗겨주던 손이 멈칫거렸다. 아란은 거울을 통해 그 모습을 지켜보며 부드러운 어조로 재촉했다.
“대공에겐 비밀로 할 테니 말해보렴.”
“……”
그럼에도 로지나는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그래도 명목상 네 주인은 나인데, 그리 입을 다물면 내가 무안하지 않겠느냐.”
“죄송합니다. 무안하게 해드리려 그런 게 아니고, 생각지 못한 것을 물으시기에 그랬습니다.”
망설이던 로지나가 천천히 대답했다.
“대공 전하께선 엄격하시지만 누구에게나 공평하시고, 상벌을 내리실 땐 확실하시니까요. 까다로운 면이 있긴 하지만 눈 밖에 날 짓을 하지 않는다면 괜찮습니다.”
로지나는 두루뭉술하게만 이야기할 뿐, 정확한 답을 알려주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란은 그녀의 얼굴을 스친 공포를 놓치지 않았다.
공포.
아란 역시 로지나와 다르지 않았다. 그가 자신을 길들인 방식 역시 같았으니까. 로지나가 지금 그녀의 눈치를 보고 있다 해도, 결국은 대공을 더욱 무서워하는 것이다. 그것을 깨닫자, 대공에게 공포가 무엇인지 알려주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 * *
아란은 조금 긴장한 얼굴로 사일러스 공작을 바라보았다. 그가 없는 사이 나름대로 생각해둔 구휼제도를 정리하여 보여주었는데, 괜히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빠르게 종이를 넘긴 그는 마지막에 아란이 조사한 빈민가의 현황까지 꼼꼼히 살폈다. 공작이 성을 떠나있던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조사는 이제 시작이나 마찬가지라 딱히 대단한 자료가 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공작은 충분히 놀랐다.
“이걸 혼자 다 생각하신 겁니까?”
사일러스 공작이 물었다.
“혼자서 한 일은 아니네. 시녀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시작할 엄두도 못 했을 거야. 빈민촌까지 가서 조사를 한 것도 그 아이고, 보고 들은 것을 바탕으로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만한 의견을 내주기도 했으니까.”
공작은 그녀의 계획을 다시 처음부터 살폈다. 약간은 허술하고 비약적인 감이 있긴 하지만 변변한 조언 없이 이 모든 것들을 생각해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거기다 파격적이기까지 했다. 공작이 한동안 말을 하지 않자 그 뜻을 오해한 아란은 괜한 짓을 했다는 생각에 부끄러워졌다.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건 알고 있어. 알다시피 난 이런 쪽은 너무 늦게 배우기 시작해서…….”
그녀는 황제로서 모든 것이 서툴렀지만, 지금처럼 비웃음을 살 것을 걱정한 적은 없었다. 이렇게 그건 아란이 공작을 특별히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을 존경한다는 사람에게 실망을 안겨준 것 같아 괜히 낯이 뜨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