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얼마 지나지 않아 대공의 떨림이 잦아들었다. 그 후에도 한동안 입술을 떼지 않던 그가 마침내 얼굴을 들었다. 아까보다 또렷해진 붉은 눈동자가 코앞에서 번뜩였다. 아란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폐하.”
대공이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그녀는 그의 다음 말이 무엇인지 직감했다. 그는 감히, 제게 사랑을 고백하려 하고 있었다.
사랑.
고작 그따위 말을 하기 위해 그는 여기까지 왔을 것이다. 아란은 순간 제 눈을 의심했다. 처음 보는 표정을 한 남자가 앞에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평소보다 잔뜩 상한 얼굴도 낯설었다. 오는 동안 눈은 붙였는지, 식사는 제대로 했는지 의문이었다. 제 것이 아니라 그의 입술이 까칠한 채로 나눈 키스 또한 처음이었다. 그는 어쩌면 그녀를 보지 못한 내내 저런 상태였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사정 같은 건 아란과는 전부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말하지 마.”
냉담한 목소리에 대공이 눈을 크게 떴다.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란이 그런 그를 노려보며 못 박듯 다시 한번 말했다.
“네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니까 말하지 말라고.”
그녀를 조롱하고 모욕했던 입술로 사랑 따위를 이야기하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
꺼내기도 전에 부정당한 사랑이 목 안으로 아리게 삼켜졌다. 아란은 앞으로도 그 사랑을 고백할 기회를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천천히 몸을 낮췄다. 마주한 눈동자가 조금씩 아래로 내려갔다. 그가 무릎을 꿇었다. 그의 손은 여전히 그녀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허리춤을 단단히 잡은 채였다.
“상관없습니다.”
그가 거칠게 속삭였다.
“상관없습니다. 평생 말하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완전히 몸을 낮춘 그가 이번엔 발등 위에 입을 맞추고 뺨을 비볐다. 아란은 기가 막힌 눈으로 대공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남자가 체면도 내던진 채 매달리는 모습이 초라하고, 우스웠다. 그를 두려워했던 자신마저 한심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는 자신을 사랑했다. 그 사랑이 그를 하찮게 만들었다.
아란은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그녀는 대공이 완전히 자신에게 주도권을 넘겨주었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리고 대공은, 아란이 자신을 뿌리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그녀의 체온이 닿자 비로소 숨을 쉬는 것 같았다. 이 여자를 살리고, 그리고 자신도 그 옆에서 숨 쉬고 싶었다. 그는 구차한 줄도 모르고 그녀의 발등에 입을 맞추며 걸인처럼 구걸했다.
“좋아하는 것이 없다고 하셨지요.”
“…….”
“그렇다면 싫어하는 것만이라도 말씀해 주십시오. 뭐든 고칠 테니 전부 말씀해 주십시오.”
아란이 그를 따라 몸을 낮췄다. 그녀는 어딘지 안타까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로 알고 싶어?”
“……예.”
“싫어하는 건 아주 많아.”
“하나도 남김없이 알고 싶습니다.”
“내가 싫어하는 건, 네가 날 모욕하는 거. 네가 날 조롱하는 거. 그리고, 네가 날 강……간하는 거야.”
떨면서도 그녀는 할 말을 다 했다. 칼날 같은 말에 대공이 얼어붙었다. 그녀의 말이 그를 죽이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죽어도 상관없었다.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던 그녀의 말을 비로소 이해했다. 그 역시 그랬다.
“예전엔, 널 떠나서는 살 수 없을 줄 알았어. 그래서 더 괴로웠어. 네가 아니면 내가 아무것도 아닐까 봐. 하지만 이제 알 것 같아. 이제야 사는 게 뭔지 알 것 같아.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찾아오지 마. 이것도 싫어.”
대공은 아연하게 아란을 올려다보았다. 아란은 변했다. 고작 두 달만인데, 그녀의 변화가 선명하게 보였다. 햇빛에 짙어진 피부도, 바다향이 묻은 체취도, 그리고, 그를 바라보는 눈빛도.
절벽 앞에 선 것처럼 막막했다. 아란을 만났는데도, 그는 부서지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이대로 더 시간이 흐르면 그가 모르는 아란의 모습이 더 늘어날 것이다.
물론, 그래도 아란은 아란이었다. 어떤 모습이어도 여전히 그가 사랑해 마지않는 주인이었다. 그러나 그가 그 자리에 멈춰 있을 동안 그녀가 자신을 그 자리에 놔두고 떠나가면…….
아란의 허리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악스러운 손아귀 아래 드레스가 엉망으로 구겨졌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대로 폐하께서 절 버리게 둘 수는 없습니다.”
뻔뻔한 언사에 아란이 경멸스럽게 그를 쏘아보았다.
“아직도……!”
“폐하께서 버린 제가 어떻게 될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나를 협박하는 거야?”
“사실을 말씀드린 겁니다.”
아란은 그가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역시, 그는 교활하고 비열한 인간이었다. 아란의 얼굴이 분노와 경멸로 일그러지는 것을 대공은 고스란히 지켜보았다. 이래서는 미움밖에 살 수 없다는 것을, 대공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역시 이런 방식밖에 몰랐다.
대공의 협박에 잠시 말을 잃었던 아란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입 밖으로 내뱉어진 말은 예상보다 더 울분에 차 있어서, 그 대답에 대공도, 심지어 아란조차 놀랐다.
몇 달 전만 해도 그녀는 자신이 대공의 협박에 이런 식으로 대꾸하게 될 줄 몰랐다. 그의 말 한마디면, 아니, 눈짓 한 번이면 그녀는 지레 겁먹고 납작 엎드리기 바빴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었다.
항상 사랑을 바라는 쪽이었던 아란은 사람이 애정을 갈구하는 상대에게 얼마나 약해질 수 있는지 또렷하게 알고 있었다. 대공이 제게 그런 감정을 느끼고 있을 거라 생각하면 없던 용기도 솟아났다.
“그래서, 그대가 망가진 게 내 탓이라는 거야?”
다나르에 온 후, 아란은 늘 최악의 상황을 상상했다. 어느 날 갑자기 대공이 나타나 사일러스 공작의 목을 자르고, 자신은 포로처럼 황궁으로 끌려가는 일 따위를. 그에 비하면 지금 이 상황은 시시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비굴한 척 고개를 숙이고서도 대공이 머릿속으로는 열심히 저울질 중이라는 걸, 아란은 모르지 않았다. 우위에 서고자 하는 건 그의 본능이었다. 그가 그녀를 사랑한다고 해도 그 사실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지난 1년 반 동안, 그는 진작 패배하여 나가떨어진 그녀를 몇 번이고 짓밟으며 굴종을 가르치려 들었다. 지금도 그녀가 조금이라도 약한 기색을 보이면, 그는 즉시 그 빈틈을 파고들 것이다.
그가 이렇게 나오는 건 아직 여유가 있다는 증거였다. 진짜 벼랑 끝까지 몰리는 기분이 어떤지 그는 몰랐다. 정말로 한계인 쪽은 그가 아닌 아란이었다. 그녀야말로 여기서 한 치도 물러설 수 없었다. 그의 뜻대로 해봤자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 뿐이라는 걸, 그녀는 똑똑히 알고 있었다.
“그래. 처음에 너를 망쳤던 건 내 아버지와 내 형제들이었어. 나 역시 책임을 피할 수는 없지.이건 진심으로 미안하게 생각해. 내 목숨으로도 갚을 수 없다는 걸 알아.”
“아닙니다, 폐하.”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널 거기까지 끌고 간 건 다름 아닌 너 자신이야. 네가 나라를 망치든, 사람을 죽이든, 그건 전부 네 탓이야. 내가 아니라.”
그녀의 말이 맞았다. 지금 이런 결과를 만든 건 대공 본인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더더욱 망가지고 싶었다. 다시는 회복할 수 없을 만큼 무참하고 철저하게. 그래서 더는 아무것도 망칠 수 없게.
“그렇다면 저를 죽이십시오, 폐하. 제가 더 망가지지 않게 폐하의 손으로 죽여주십시오.”
그는 두 달 전, 아란과 같은 소원을 청했다. 그녀가 내리는 죽음이라면 달콤할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청에 아란은 두려움도 잊고 진심으로 분개했다.
“날 이렇게 만들어놓고, 넌 죽음으로 도망치겠다고?”
너무 화가 나서 목소리뿐만 아니라 전신이 다 떨렸다. 슬픔이 아닌 순수한 분노가 담긴 눈물이 고여 떨어졌다.
“…….”
“넌 죽으면 안 돼, 에녹. 망가져서도 안 돼.”
대공은 제 얼굴 위로 떨어지는 눈물을 느끼며 멍하니 입을 벌렸다.
“이럴 거면 왜 날 망가뜨린 거야? 망가뜨렸으면 끝까지 원망하기나 하지, 어쩌자고 마음에 담았어. 이 정도도 못 버티면서 어떻게…….”
아란의 분노가 너무 뜨거워서, 대공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석상처럼 굳은 그를 내려다보던 아란이 쪼그리고 앉아 그와 눈높이를 맞췄다.
“벌써 약한 소리 하지 마. 더 모질고 악독하게 굴어서 내가 안심하고 널 미워할 수 있게 해줘야지.”
그가 곧잘 그랬듯, 그녀는 다정하게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러나 떨리는 손 때문에 의도한 것처럼 여유로워 보이지는 않았다.
“협박은 너만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에녹. 네가 죽거나 못쓰게 되면……, 난 다른 남자를 남편으로 맞아들일 거야. 너처럼 무도한 자가 아니라, 다정하고 의지할 만한 남자로…….”
대공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붉은 두 눈이 질투로 불타고 있었다. 그 모습에 아란은 울면서도 조금 웃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협박이 먹힐 줄은 몰랐다. 자신은 생각보다 치졸하고 속이 좁은 인간임이 틀림없었다. 저 얼굴이 이토록 고소한 걸 보면 말이다.
“그게 싫으면, 황궁으로 돌아가서 그대가 할 일을 다 해. 말을 잘 듣고 있으면, 내가 마음을 바꿀 수도 있잖아.”
대공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명령은 신탁처럼 절대적이었다. 그가 절박하게 아란의 손을 부여잡았다. 그리고 조금 늦게, 그 손가락에서, 자신이 끼워준 반지를 발견했다.
순간 그의 눈동자 깊은 곳에 빛이 돌아왔다. 한없이 가라앉아 있던 분위기가 단번에 끌어 올려진 것 같았다.
그녀로선 단순히 나중에 돈을 마련하기 위해 버리지 않았던 반지였으나, 대공은 그 반지가 아직 제자리에 있다는 것에 지나치게 큰 의미를 부여했다. 어쩌면 아란이 완전히 돌아선 게 아닐 수도 있다는 희망 따위 말이다. 아란은 굳이 그 희망을 깨뜨리지 않았다. 언젠가 그 마음은 절망이 될 테고, 그것을 지켜보는 게 그녀의 복수였다.
아란이 할 수 있는 건 고작 그런 것뿐이었다. 한심할 정도로 낭만적이고 달콤한 복수. 그가 아무리 제 발치에 엎드려도, 하찮은 자비를 간청해도, 그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 순간 전부 의미가 없어지는 것들이었다.
결국, 그녀는 자신이 그를 다치게 하지도, 그를 권좌에서 끌어내리지도 못할 것이다. 그녀가 가진 거라곤 대공이 반강제로 쥐여준 그의 마음뿐이었다. 그러나 그나마도 무너뜨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그러니 그가 이렇게 일찍, 시시하게 망가져서는 안 됐다.
다행히 아란은 상대의 마음을 짓밟는 방법을 수백 개, 수천 개도 더 댈 수 있었다. 그것을 알려준 상대가 바로 앞에 있었다.
열 손가락마다 입을 맞춘 대공이 다시 엎드려 마지막으로 그녀의 발등에도 키스했다. 아란은 적선하듯 손과 발을 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