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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의 밤-82화 (82/146)

82화

기억하던 그대로, 오만하고 차가운 목소리였다. 로지나는 그의 명령을 거부할 용기도, 명목도 없었다. 그녀는 꿀꺽 마른 침을 삼키곤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쥐어짰다.

“폐하를 모시고 나오겠습니다. 성 뒤쪽에 공터가 있으니 그곳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로지나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끌며 공작성으로 향했다. 문제 될 것은 없었다. 그녀의 주인은 대공이고, 그녀는 주인의 명을 따르는 것뿐이었다. 며칠 전 가볍게 떠올렸던 생각이 저를 비웃듯 되돌아오는 걸 느끼며, 로지나는 무겁게 발목을 붙잡는 가책을 억지로 떼어냈다.

황제에게로 돌아가자 그녀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오늘은 늦었구나. 무슨 일 있었니?”

“예. 개인적으로 살 물건이 있어서요. 참, 공작 각하께서 사람을 보내셨던데요. 조금 전에 간단히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아란이 눈을 깜박였다.

“사일러스 공이?”

“예. 아무래도 황궁에 급한 일이 생긴 것 같아요.”

“무슨 일이기에……. 어서 들라고 해라.”

로지나는 제 실수를 알아챘다. 이렇게 어설픈 거짓말로는 황제를 밖으로 끌어낼 수 없었다.

서둘러 그녀를 꾀어낼 다른 방법을 떠올리려 애썼지만, 갑작스러운 대공의 등장에 당황하여 평소보다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저, 그것이…….”

머뭇거리는 로지나를 본 아란의 얼굴에 의심이 스쳤다. 로지나는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대공을 생각하면 두려움에 몸이 떨렸다. 그녀는 재빨리 무릎을 꿇었다.

“사실, 그것이, 대공 전하께서 보낸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에 들어올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란의 얼굴이 굳었다.

“무슨 용건으로 사람을 보냈다고 하더냐.”

“저에겐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그저 급한 일이라는 것 외에는…….”

무릎을 꿇은 로지나를 바라보며 잠시 고민하던 아란이 무거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안내하렴.”

공작을 황궁으로 불러낸 것으로도 모자라 무슨 일로 사람을 보냈을까.

대공이 와있을 거라고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아란은 무슨 일일지 추측하며 로지나의 뒤를 따랐다. 로지나는 공작성 밖 공터로 그녀를 안내했다.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아란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대공이 보냈다던 사람은?”

“잠시 자리를 비웠나 봅니다. 기다리면 금방 올 겁니다.”

아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의 사람을 만난다는 긴장 때문인지, 아니면 밤이라 그런지 바람이 스산하게 느껴졌다.

“참, 잠시 제 방에 다녀와도 될까요? 수도에 있는 동생에게 보낼 물건이 있는데, 그자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하려고 합니다.”

“그러렴.”

아란은 별생각 없이 수락했다. 성 밖으로 나온 게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엎어지면 코가 닿을 만큼 거리가 가깝고, 호위도 세 명이나 있으니 걱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금방 돌아오겠다던 말과 달리 로지나는 한참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로지나……?”

아란이 의아하게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 어디선가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리고 낮은 신음과 함께 호위병들이 차례로 쓰러졌다. 아란은 그대로 굳었다. 위험해서라기보단, 호위병을 가격하는 이의 뒷모습이 너무나 익숙했기 때문이다.

밤인 데다 새까만 후드로 전신을 가리고 있어 외모가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그가 누군지 한눈에 알아보았다.

로지나가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도. 그녀를 탓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대공의 사람인 줄 알면서도 속아 넘어간 자신이 어리석었다. 아란은 겁을 먹은 와중에도 쓰러진 호위를 살폈다.

“죽이지 않았습니다.”

묻지도 않았는데 음울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마법처럼 주변 공기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러나 긴장한 몸과 달리 머릿속은 냉정해지고 있었다. 생각보다 이 상황이 놀랍지 않았다. 어쩌면 이런 날이 올 것을 진작 예상했을지도 몰랐다.

사내가 얼굴을 가린 후드를 벗었다.

“폐하.”

* * *

아란은 어둠 속에 스며든 남자를 바라보았다. 희미한 달빛 아래서도 뚜렷한 이목구비가 도드라졌다. 얼굴에 드리워진 음영이 더 짙어져,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더 마른 것 같았다.

“폐하.”

대공이 그녀를 불렀다. 아란은 자꾸만 뒷걸음질 치려는 다리에 억지로 힘을 주었다.

“왜, 왜 여기에 있어?”

금방이라도 달아날 수 있게 전신의 근육을 팽팽히 긴장시키며 그녀가 재차 물었다.

“날 끌고 가려고,”

“보고 싶었습니다.”

담담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말문이 막혔다.

“폐하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평소와 똑같이 흔들림 없는 모습으로 그녀 앞에 우뚝 서 있었다. 그러나 가라앉은 목소리와 눈빛이 어쩐지 사제에게 죄를 고하는 죄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죄인. 그래, 그는 죄인이었다. 그것도 아주 무도하고 잔학한 살인자였다. 아란도 귀가 있으니 수도에서 일어난 끔찍한 일들을 전해 들었다. 그녀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대의 사람들을 다 죽였다지. 그 방식이 얼마나 잔인했는지 다나르까지 소문이 자자해.”

“폐하를 해하려던 자들입니다.”

“아무렴. 적도 죽이고, 아군도 죽이고, 마지막엔 나도 죽이겠지.”

아란이 진저리를 치며 말했다. 말의 내용보다 지긋지긋하다는 어조가 대공의 가슴을 쓰리게 했다.

“폐하.”

“그렇게 부르지 마.”

대공이 힘없이 웃었다.

“그럼 뭐라고 할까요. 아란흐로드라고 부를까요? 저는 그쪽이 더 좋습니다.”

모욕이라도 들은 것처럼 아란의 얼굴이 분노로 달아올랐다. 대공은 그 반응을 무시하며 그녀에게 다가섰다.

“말씀해 주십시오,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

“오지 마.”

“생각해 봤습니다. 어떻게 하면 폐하께서 원하는 삶을 드릴 수 있는지.”

함부로 거리를 좁히는 대공을 피해 아란은 달아나려 했다. 그러나 이미 그를 마주한 순간부터 도망치는 건 불가능했다. 단 몇 걸음 만에 아란을 따라잡은 그가 그녀 앞을 가로막았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폐하께서 가르쳐 주십시오. 제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하면 제가 폐하를 살릴 수 있는지…….”

기가 막혔다. 그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다. 아직도 허황된 꿈을 꾸고 있었다.

“살리다니. 그대는 여태껏 누구도 살린 적 없어. 죽이는 것밖에 못 하지.”

아란이 그를 노려보며 대답했다.

그 말에 아란을 향해 손을 뻗으려던 그가 움직임을 멈췄다. 그는 대신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자신은 누군가를 살려본 적 없었다. 아란에게 돌아오고 싶어 한 일인데, 정작 그녀는 제 손에 묻은 피를 끔찍해 했다.

“앞으론…….”

앞으론 누구도 죽이지 않겠다는 섣부른 맹세를 입에 담으려던 그가 말을 흐렸다. 지키지 못할 약속이라는 것을 그도, 그녀도 알았다. 애초부터 피를 보지 않는 방법을 그는 몰랐다.

“앞으론 덜 죽이겠습니다.”

“농담하는 거야?”

아란은 도망치려던 것도 잊고 헛웃음을 내뱉었다.

“아예 죽이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폐하께서 싫어하시니 줄여보겠습니다.”

살해하지 않으면 그녀를 지킬 수 없었다. 무엇보다, 그녀에게 해를 입히는 자들을 두고 보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사실, 그는 지금도 제 수하들을 죽인 일로 아란이 화를 내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의 자비는 지나쳤다. 그러나 앞으론 아란 앞에서 누군가를 죽이는 일은 없을 것이다. 지금도 그는 공작의 병사들도 죽이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제 의지를 알아주길 바랐다.

“줄이겠습니다.”

아란이 제 말을 믿지 않을 것을 걱정하기라도 했는지, 그가 거듭 강조했다.

아란의 시선이 기절한 호위들에게 닿았다가, 다시 대공을 향했다. 그는 아란의 눈치를 살폈다. 마음 약한 그녀가 그것을 보고 분노를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리지는 않았는지, 혹은 아주 조금이라도 용서할 마음이 들지는 않았는지……. 하나같이 몰염치한 바람들이었다.

“도대체…….”

그녀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달싹이다, 이를 내밀어 아랫입술을 가볍게 물었다. 의도치 않은 행동이었겠지만 그것이 대공의 알량한 인내심을 무너뜨렸다.

아.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그 입술에 입 맞추고 싶어서 몸이 달았다. 몹시 초조한 기분이 들었다. 뒤늦게 아란을 만나서는 안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새 온 신경이 곤두서고 숨이 거칠어졌다. 그는 저도 모르게 아란에게 한 발짝 더 다가섰다.

“폐하.”

열기를 띤 목소리. 문득, 아란은 대공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애초에 여기까지 온 것 자체가 제대로 된 판단이 아니었다. 충혈되어 눈동자와 분간되지 않는 흰자위, 거친 숨소리, 악문 턱이, 보이는 모든 것이 그가 한계에 다다랐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그는 시시각각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 사실을 눈치챈 아란이 물러서자 그가 다급히 그녀를 붙잡았다.

피하기도 전에 까칠한 입술이 바로 부딪혔다. 아란이 진저리를 치며 그를 거칠게 밀쳤다. 의외로 그는 순순히 밀려났다. 몸이 떨어지기 무섭게 아란이 그의 뺨을 내리쳤다.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곧장 한 대를 더 때렸다.

맞은 곳이 화끈했다. 날카로운 통각에 그는 기뻐 날뛰고 싶었다. 아란이 주는 거라면 뭐든 좋았다. 죽여 달라며 애원하는 것보다 분노에 차 때리는 게 훨씬 나았다. 그는 웃음을 터뜨리고 싶은 것을 참았다. 기뻐하는 내색을 보이면 아란은 그마저도 멈출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아직 너무나 부족했다. 그녀가 보여주는 생생한 반응을 더 느끼고 싶었다. 간신히 억눌렀던 충동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쏟아져 흘렀다.

“폐하.”

“그렇게 부르지 말랬……!”

“아란흐로드.”

그가 익숙하게 아란의 허리를 감고 조그만 입술을 찾아 제 입술로 덮었다. 아란은 그를 뿌리치려 했으나, 그는 이번엔 밀려나지 않았다. 발버둥 치자 되레 더 세게 끌어안았다.

아란은 이를 악물었다. 혀가 파고들면 그대로 물어뜯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는 소년처럼 서툴게 입술만 맞댔다. 그제야 그녀는 그가 떨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무엄하게 상체를 결박한 팔과 달리 입술에 와 닿은 온기는 부드럽고 조심스러웠다. 그는 내내 굳게 다물린 입술을 핥고 가볍게 물었다. 아란은 뒷머리가 단단히 잡혀 고개를 돌릴 수도 없었다. 닿은 곳을 통해 그의 떨림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가 자신을 마주한 내내 억지로 참고 있었음을, 저항하는 건 그를 자극하는 꼴 밖에 안된다는 것을 조금 전 행동으로 알게 된 아란은 석상처럼 몸을 굳히고 가만히 있었다. 도망칠 수 없다면 어떤 반응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두 팔을 늘어뜨리고 그저 그 순간을 인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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