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하의 밤-81화 (81/146)

81화

서신을 받고 며칠 지나지 않아 사일러스 공작은 수도에 도착했다. 다시 보게 된 수도의 분위기는 예전보다 훨씬 음산했다. 예상했던 바였으므로 놀랍지는 않았다.

그는 곧장 황궁으로 향했다. 공작을 본 귀족들이 반색하며 그에게 다가왔다. 그의 영지에 황제가 머물고 있으니 그녀의 안부를 궁금해하는 자들 역시 많았다. 그러나 가장 궁금해할 사람은 역시, 저쪽에서 무섭게 그를 노려보는 대공일 것이다.

“오랜만입니다, 공작. 그간 안녕하셨는지.”

대공이 매끄럽게 인사했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공작을 놀라게 했던 저열한 언동은 전부 거짓말 같았다.

“예. 전하께서 염려해주신 덕분에 무탈히 지냈습니다.”

공작이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자신 역시 대공을 향해 생선 대가리 운운했으니 그를 유치하다 비난할 처지는 아니었다. 그날의 대화를 떠올리며 공작은 조소했다. 확실히, 내로라하는 대귀족들 사이에서 오갈 대화는 아니었다.

“폐하께서는 어찌 지내고 계십니까.”

무심한 어조로 물으면서도 대공은 날카롭게 공작의 모습을 훑었다. 혹시 그의 모습에 아란의 흔적이 묻어있지는 않을까 살피는 시선이었다.

그의 눈이 공작의 몸을 구석구석 스쳤다. 다행히 드러난 곳엔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그러나 대공은 당장 공작의 옷을 찢고 등 뒤에 손톱자국 따위가 없는지 이 자리에서 확인하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폐하께서도 잘 지내고 계십니다.”

공작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듣자 하니 낚시에 재미를 붙이셨다는 것 같더군요.”

“예. 타고난 성정이 용감하신 분이라, 자리가 좋다면 가파른 바위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르십니다.”

그의 말에 대공이 낯을 굳혔다.

“바위?”

그의 머릿속에 절벽 위에 위태롭게 서 있을 아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공은 폐하께서 위험하게 바위를 오르도록 내버려 둔다는 겁니까? 그게 말이 되는……!”

“폐하를 생각하는 전하의 충심은 이해하지만, 저는 늘 폐하의 안위에 만전을 기하고 있습니다. 누구도 폐하를 다치게 하지 못하도록 완벽하게 말입니다.”

그 말이 대공의 신경을 건드렸다.

아란을 위험에 빠뜨린 건 공작이 아닌 바로 그였다. 그것을 알면서도, 대공은 자꾸만 남 탓을 하고 싶었다. 아란이 그에게 간 것이 아니라, 그가 아란을 강탈해 간 것 같았다.

그의 해사한 낯빛을 보자 질투가 치밀었다. 공작성에 아란을 숨겨두고 의기양양하게 나다닐 그를 생각하니 배알이 뒤틀렸다. 그 꼴을 볼 수 없어 아란과 공작을 떨어뜨려 놓았는데도 성이 차지 않았다. 애초에 그것으론 그의 목마름을 채울 수 없었다.

아무래도, 그는 아란을 제 눈으로 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자신이 미쳐서 엉망이 되기 전에.

* * *

“엉망이야.”

아란이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불만스럽게 탁자를 두드렸다. 로지나는 무슨 뜻인지 모를 수식으로 빼곡한 종이를 바라보며 남몰래 고개를 저었다. 그녀로서는 도통 황제를 이해할 수 없었다. 가만히 있으면 편할 텐데, 황제는 황궁에 있을 때도, 다나르로 내려와서도 늘 나서서 할 일을 만들곤 했다.

대공은 그녀의 그런 면을 아주 싫어했다. 그 때문에 매번 호된 꼴을 당했으면서도 변하지 않는 걸 보면 정말 대단한 고집이었다. 황제가 또 무슨 일을 벌이려는 건지, 로지나는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지만 윗사람이 하는 일이니 예의상 물어보았다.

“무엇이 엉망이라는 말씀이세요?”

“숫자가 맞지 않아.”

아란은 로지나에겐 시선도 주지 않고 보석으로 된 주판알을 헤아리며 대답했다.

“숫자요?”

“처음엔 제법 자세히 적어 놓은 줄 알았는데, 조금만 들여다보면 이런 수치가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알지. 아마 이 일을 맡은 자가 형식상 몇 가구만 조사하고 나머지는 대충 채워 넣은 모양이야. 그게 아니라면 빈민들의 소득이 이렇게 일정할 리가 없어.”

아란이 미간을 찡그리며 순행 때 보았던 빈민촌을 떠올렸다. 어둡고 경황이 없어 자세히 살피지는 못했지만, 골목골목 뻗어 나간 빈민촌은 얼핏 보기에도 그 규모가 상당한 듯했다.

“아하.”

로지나가 그녀의 말을 알아들은 척, 고개를 주억거렸다.

“누가 올렸는지는 몰라도, 이 보고서는 그냥 눈속임에 불과해. 그러다 보니 지원책도 전부 소용이 없고. 직접 조사해 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러니까, 지금 보고 계시는 보고서를 올린 사람이 빈민가의 현황을 엉터리로 조사했다는 말씀이시죠?”

“그래.”

그제야 로지나는 며칠째 아란이 머리를 싸매게 만든 문제가 무엇인지 알았다. 조금 변했나 했더니, 물러 터진 천성은 여전한 모양이었다.

“마음에 걸리시면 사람을 시켜 다시 조사하게 하시는 건 어떠신가요? 빈민들 전부를 조사하지는 못하겠지만 무작위로 몇 명만 추려도 대충은 현황을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요?”

로지나가 제안했다. 아란은 고개를 저었다.

“네 말이 맞아. 하지만 지금은 성에 그럴 인력이 없는 것 같구나. 일단 이곳이 내 성도 아니니 아무나 함부로 부릴 수도 없고 말이다.”

미간에 깊은 주름을 만든 아란이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내가 직접 조사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사일러스 공작과 다나르의 빈민들을 돕고 싶은 건 맞았지만, 공작이 없는 상황에 멋대로 나서 일을 벌이고 싶지는 않았다. 더구나 빈민가는 치안이 좋지 않았다.

단순히 다칠 것을 걱정하는 게 아니었다. 비록 지금 신분이 애매해지긴 했어도, 그녀는 제 위치를 잘 알았다. 괜히 험한 곳을 돌아다니다 정체를 들키거나 난처한 문제에 휩쓸린다면 그 책임은 온전히 공작의 몫이 될 것이다. 겨우 얻은 신하에게 또 짐을 지울 수는 없었다.

아란의 고민은 그 다음다음 날까지 이어졌다. 며칠이나 그녀의 한숨을 듣다 못한 로지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렇게 고민되신다면, 제가 조사하겠습니다.”

“네가?”

아란은 의외라는 눈빛으로 로지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면서도 혹 그녀가 다나르의 정보라도 빼돌리려는 것이 아닐까 의심했다. 눈치 빠른 로지나는 금방 아란의 생각을 읽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전 숫자를 조작할 만큼 똑똑하지 않으니까요. 거기다, 아시겠지만 대공께서는 다나르의 빈민 이야기엔 관심도 없으실 거예요.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자세히 일러주면 그대로 따르겠습니다. 시간이 좀 걸리긴 하겠지만요.”

“그렇구나.”

아란의 얼굴이 밝아졌다. 로지나의 말이 맞았다. 대공은 다나르의 빈민엔, 아니, 다나르 자체에 관심이 없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아란은 그가 무언가에 관심을 두는 걸 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오래 살을 맞댔는데도 아란은 아직 그의 취미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대공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로지나는 적절한 인재였다. 말로는 똑똑하지 않다고 하지만, 그녀는 제대로 교육을 받은 귀족이기도 했다. 단순히 숫자만 정리하는 일이라고는 하나, 교육을 받은 자와 아닌 자의 결과물은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났다. 여러모로 당장 그녀를 도울만한 사람은 로지나 뿐이었다.

“빈민가는 위험하니 호위는 넉넉히 붙여주도록 하겠다.”

“감사합니다.”

“아니, 오히려 내가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 할 일이지.”

“귀하신 분의 인사를 듣기엔 과분한 일입니다.”

“저번에 네 도움을 받았을 땐 미처 하지 못했는데, 지금이라도 그 기회가 와서 다행이다.”

로지나는 조금 놀란 눈으로 아란을 바라보다, 이내 별일 아니었다며 중얼거렸다. 아란은 로지나가 쑥스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의 이런 얼굴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황궁에 있을 땐 대공에게 온 신경을 집중하느라 보이지 않던 것들이 비로소 보였다. 그 사실이 그녀의 마음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때로는 보아도 내색하지 않는 미덕이 필요한 법이었다. 아란은 보고서로 시선을 내려 로지나의 빨개진 귓바퀴를 모르는 척해주었다.

* * *

내 신세야.

오지랖 넓은 것도 병이었다. 로지나는 투덜거리면서도 황제가 내린 명을 충실히 따랐다.

황제의 시녀는 전부 내로라하는 가문의 아가씨들로만 구성되어 있었고, 그녀 역시 귀족 출신이기에 빈민가에 발을 들이는 건 처음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악취를 참으며 더러운 거리를 오가는 건 고역이었지만, 호화로운 황궁에서 마음 졸이며 대공의 눈치를 살피는 일보다는 더러움을 참는 게 몇백 배는 나았다.

그러나 사실, 그녀가 이 일을 자처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조만간 성 밖에서 대공이 보낼 사람을 만나기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함부로 성을 비우면 의심을 살까 곤란하던 차에 때맞춰 황제가 덥석 일을 내려주었다. 황제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대공이 무서우니 어쩔 수 없었다.

그녀의 주인은 대공이고, 그녀는 주인의 명을 따르는 것뿐이었다.

로지나는 억지로 가책을 털어냈다. 사실, 대공이 보낸 사람을 만나봤자 크게 뭔가를 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은 것도 컸다. 보고는 서신으로 전달했고, 황제가 아주 얌전하게 지내는 탓에 그간 딱히 특별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고작해야 대공이 또 무언가를 보낸다거나 하는 일이겠지, 라는 정도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흔쾌히 제 외출을 허가해 준 황제 역시 비슷한 결론에 이르지 않았을까 하고 로지나는 추측했다.

조사 기간 중 제법 성실한 일처리와 순진한 태도로 호위들의 신뢰를 산 그녀는 약속된 날이 되자, 황제의 사적인 명령을 수행해야 한다는 거짓말로 호위들을 전부 돌려보냈다. 그리고 남들의 눈을 피해 약속 장소로 향했다. 이런 일을 한 것이 한두 번도 아닌데 괜히 심장이 쿵쾅거렸다.

약속한 장소에 도착하니 그곳엔 사람이 먼저 와 있었다. 그녀를 등지고 선 사람은 키가 아주 훤칠한 남자였다.

“이봐요, 대공 전하께서 보낸 사람이 당신인가요?”

로지나의 질문에 그가 천천히 돌아섰다. 상대의 얼굴을 확인한 그녀는 그대로 굳었다. 다나르로 온 사람은 대공의 수하가 아닌, 대공 본인이었다.

왜, 대공이……?

로지나는 경악을 숨기며 몸을 바짝 숙여 그녀의 주인에게 복종의 뜻을 나타내었다. 긴장한 그녀의 머리 위로 대공의 명령이 떨어졌다.

“폐하를 뵈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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