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하의 밤-80화 (80/146)

80화

아란은 아름다웠다. 달아오른 뺨이, 눈물 맺힌 눈꼬리가, 가냘픈 교성이 얼마나 아름답고 또 유혹적인지 그는 아주 잘 알았다. 그 모습을 본 자라면 누구든 그녀를 갖고 싶은 나머지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 게 분명했다.

그리고 사일러스 공작은 그 모습을 쥐새끼처럼 본 자다. 놈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손에 잡힐 만큼 생생했다. 점잖은 척하지만 그놈 역시 그녀의 다리 사이로 기어들어 가고 싶어 안달이 났을 것이다.

역시 아란을 그곳에 보내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란을 공작이 꾀어낸다면……. 거기까지 떠올린 대공이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

아니다. 그녀가 그럴 리 없다. 그녀가 제 주인이듯, 그녀의 것이 될 수 있는 건 자신뿐이다. 감히 사일러스 공작 따위가 넘볼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저는 폐하의 것입니다. 오직 저만이…….”

그가 중얼거렸다.

그는 아란도 자신을 생각할지 궁금했다. 미워해도 좋으니 그녀가 자신을 생각했으면 했다. 고통스러워도 좋으니 자신을 잊지 않았으면 했다.

아란이 떠난 지 고작 두 달도 되지 않았는데, 그는 자신이 조금씩 깨지고 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 틈으로 그를 채운 것들이 자꾸만 새어나갔다. 그대로 놔두면 안 될 것 같다는 자각은 있었으나 막을 힘도, 의지도 없었다.

이상했다. 그녀에게 버려진 건 처음이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그때보다 지금 상황이 비교도 안 될 만큼 나았다. 수하들의 반란 이후에도 그는 여전히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권력자였고, 더럽고 위험한 서쪽 국경으로 쫓겨나는 대신 기사들이 철통처럼 지키는 저택 안에 머물렀다.

그리고 기다리는 것, 버티는 건 그가 가장 잘하는 것이었다. 기다리고 버텼기에 잃어버렸던 모든 것들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번에도 그렇게 버티다 보면 그의 주인도 제 충심을 알고 돌아올 것이다.

그런데 자꾸 조바심이 나는 건 왜일까.

답은 금방 나왔다. 그는 이미 한계였다. 오랜 갈망으로 지친 마음이 다시 그 목마름을 감내할 수 없다고 아우성쳤다.

그 목마름이 얼마나 지독한지 그는 잘 알았다. 그것이 그의 머리와 가슴을 파먹어 종래엔 제 주인도 못 알아보게 만들지 않았는가. 지금도 그것은 당장 그를 삼키고 싶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대공은 스스로에 대한 평가를 정정했다. 그는 인내심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었다. 그 갈증을 버티지 못해서, 해갈이 오는 것을 기다리지 못해서, 유일하게 그 괴로움을 해소해줄 수 있는 주인을 그렇게 망가뜨렸다. 다시는 그를 버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 눈이 뒤집혔었다.

그리고 지금, 그는 또다시 그렇게 될까 봐 겁이 났다.

그래선 안 되었다. 아란이 돌아오기도 전에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었다. 그는 황제를 지탱하는 모든 것이었다. 그가 무너지면 황제의 기반이 무너진다.

대공은 겨우 정신을 다잡았다. 아란을 위해 그는 누구보다 굳건히 서 있어야 했다.

우스웠다. 그를 무너트리는 것은 그녀인데, 그를 무너지지 않게 하는 것도 그녀였다.

그는 옷을 바로 입고 침실을 떠날 준비를 했다. 날이 밝았으니 이제 그녀의 자리를 지키러 가야 했다.

마지막으로 침실을 둘러보던 그의 눈에 흐트러진 테이블이 보였다.

테이블 위에는 도망치기 직전까지 그녀가 서명하던 서류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당시의 다급함을 말해주듯 단정한 필체로 쓰인 사인은 채 완성되지 못했다. 그 옆으로 잉크가 쏟아져 번진 자국이 보였다.

이미 죽은 렌스 백작을 향한 분노가 다시 한번 치솟았다. 그는 모든 분노와 원망을 기꺼이 그가 이미 죽여버린 사람에게 퍼부었다. 더 고통스럽게 죽이지 못한 것이 아직도 후회되었다. 그는 백작을 너무 편히 보내주었다.

늦은 후회를 하며 대공은 그녀의 이름을 가만히 그것을 쓸었다. 그것만으로도 갈증이 더 심해졌다. 그것이 또다시 아란을 망가뜨리기 전에 무엇이든 목 안으로 흘려 넣어야 했다.

* * *

아란과 사일러스 공작의 예상대로, 대공은 두 사람을 가만히 놔두려 하지 않았다. 아란의 물건들이 수도로 되돌아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번엔 대공의 서신이 당도했다. 거기엔 공작이 오랫동안 귀족의 의무를 소홀히 했으니 신속히 수도로 올라오라는 명령이 적혀 있었다.

“하.”

서신을 확인한 사일러스 공작이 실소를 흘렸다. 대공의 말대로, 그가 귀족 회의에 참석한 것도, 영지에 관련된 보고를 올린 일도 오래전이었다.

물론 그 전엔 아란의 지시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무색해졌으니 대공의 명령은 명목상으로는 문제가 없었다. 그렇지만 공작이 그의 속내를 모를 리가 없었다.

내가 폐하 옆에 붙어있는 꼴을 더는 못 봐주겠는 모양이지.

우습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는 다소 복잡한 낯으로 아란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가 쳐다보는 것도 모른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는 이대로 대공의 명을 무시하고 그냥 이곳에서 아란을 계속 지켜보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그러나 그랬다간 대공이 또 무슨 꼬투리를 잡을지 몰랐다. 두려운 건 아니었으나, 공연히 빌미를 주어 일을 치고 싶지는 않았다.

“브린 님.”

부름을 들은 아란이 고개만 살짝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황궁에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아란은 눈을 깜박였다. 그녀가 다나르로 온 후로, 그가 수도를 입에 담은 것은 처음이었다. 그것은 아란을 배려하기 위한 것도 있지만, 공작이 그녀가 조금이라도 황궁과 대공을 덜 생각하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인지, 황궁이라는 단어가 유독 낯설게 들렸다.

아란은 그가 황궁으로 향하는 이유를 금방 짐작했다. 그는 사일러스 공작령의 영주이기도 했지만, 제국을 지탱하는 큰 기둥 중 하나였으니 언제까지 영지에만 머무를 수는 없었다.

“그래. 다녀오게.”

아란은 제 입으로 수도 출입을 금한 사람에게 잘 다녀오라고 인사하는 게 새삼 어색하고 우습다고 생각했다. 한편, 공작은 황제가 바로 제 앞에 있는데 그녀의 대리가 내린 명을 따르기 위해 수도로 가야 하는 사실을 기막혀했다.

“제가 없는 동안 다나르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부디 저 대신 다나르를 잘 지켜주십시오.”

사일러스 공작이 장난스레 덧붙였다.

“언제 떠날 계획인가?”

“일정이 촉박하여 내일 중으로 떠나려 합니다.”

생각보다 이른 출발에, 아란은 대공이 그를 닦달하기라도 한 건 아닐까 걱정했다.

“그렇다면 얼마나 있을 예정이지?”

“적어도 2주는 머물러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브린 님이 계셔서 마음 편히 성을 비울 수 있겠군요.”

“아.”

사람 좋은 얼굴을 보며, 아란은 차마 곧 떠날 생각이었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공작은 공작대로, 아란의 얼굴이 어두워지자 은근히 걱정되었다. 아란이 늘 떠날 생각을 한다는 건 그 역시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아란이 다나르를 떠나겠다고 할까 봐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그러나 그녀가 뒤이어 꺼낸 말은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조심히 다녀오길 바라네.”

공작은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얼굴 가득 웃음을 띄웠다.

“절 걱정해 주시는 겁니까?”

“그래.”

아란은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걱정됐다. 혹시라도 대공이 그를 다치게 할까 봐. 그녀가 아는 대공은 그러고도 남을 인물이었다. 그러나 공작은 아란의 속 같은 건 모르는지, 그저 그녀가 저를 걱정해 주었다는 사실을 기꺼워했다.

“혹시라도 대공이 못되게 굴거든, 화가 나더라도 상대하지 말고 그 자리를 피하게.”

“괜찮습니다. 못 미더우시겠지만, 저 역시 그리 순순히 당하지는 않습니다.”

자신 넘치는 그의 말에 아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공은 그를 몰라.”

그가 얼마나 비정한지, 얼마나 뒤틀려 있는지. 아란은 매번 그 앞에서 경계를 늦추지 않았는데도 매번 송두리째 물어뜯기곤 했다. 물론 공작이 저처럼 무력하게 당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공작이 조심스레 제 손을 아란의 어깨 위에 얹었다. 포근하고 따뜻한 체온에 아란이 고개를 들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브린 님. 이 모습 그대로, 온전히 돌아와 브린 님을 보필하겠습니다.”

다음 날, 아란이 눈을 떴을 땐 공작은 이미 수도를 향해 떠난 후였다.

같은 공간에 있다고 한들 그와 오랜 시간을 보내는 건 아니었으니 그녀의 일상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쩐지 그가 없다고 생각하니 사람들로 꽉 들어찬 성이 조금 허전한 것 같기도 했다.

그 허전함을 메울 겸, 그녀는 공작이 말한 대로 그가 돌아올 때까지 이곳의 업무를 도와주기로 했다.

그녀는 조심스레 공작의 집무실로 향했다. 공작의 집사장은 조금 놀란 것 같았지만, 아란이 하는 일을 방해하지 말라는 주인의 명 때문에 그녀를 말리지는 못했다. 그리고 일개 공작의 가신인 그가 황제를 막는 건 엄중한 죄였다.

그럼에도 집사장은 찜찜한 마음을 억누르지 못했다. 아무리 군신 관계라 한들, 이런 식으로 황제에게 성안 사정을 전부 내보이는 건 전례 없는 일이었다. 집사장은 제 주인이 황제에게 단단히 빠졌다는 것을 직감했다.

아란 역시 공작의 행동이 정치적이지 못하다는 것은 인지했다. 아무리 그녀가 허울 좋은 황제라고 하나, 이렇게 집무실을 그대로 그녀에게 내보일 줄은 몰랐다.

물론 아란은 공작령의 기밀을 건드릴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누가 해결해도 상관없는 사소한 업무나 도와줄 생각이었다. 별 도움은 되지 않겠지만, 그의 충정과 신뢰에 조금이라도 보답하고 싶었다.

잡일이나 도와주려던 아란은 생각보다 쌓인 일이 많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그녀는 몰랐지만 그간 감사 때문에 공작령의 업무가 마비되다시피 한데다, 그녀를 구하기 위해 공작이 손수 수도까지 왔었으니 당연했다.

공작이 내색하지 않아 자세한 사정까지 몰랐던 아란은 그에게 다시 한번 미안해졌다. 이렇게나 바쁜 와중에도 공작이 어떻게 자신에게 그렇게 많은 시간을 내어줬는지 아연할 정도였다. 단순히 공작령 각지에서 올라온 보고서를 분류하고, 딸려온 자료를 보기 좋게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모자랄 지경이었다.

아란은 며칠이나 공작의 집무실에 틀어박혀 있느라 낚시도 나가지 못했다.

며칠이나 보고서를 정리하던 그녀는 서류 맨 밑바닥에 비죽 튀어나와 있는 종이 하나를 발견했다. 빈민들을 위한 구제법과 지원에 관한 건이었다. 살펴보니 빈민들의 숫자와 가구당 소득 따위가 비교적 구체적으로 적혀 있었고, 지원 방법도 꽤 고심한 흔적이 엿보였다.

그러나 이제 이런 것들은 아란이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다른 종이들과 함께 그것을 서랍에 넣어두려던 아란이 문득 손을 멈췄다. 겨우 묻어두었던 빈민가 아이들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그녀는 오랫동안 망설이다, 떨리는 손으로 그 종이를 다시 주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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