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저녁을 먹은 후, 사일러스 공작이 아란에게 차 한 잔 마실 시간을 내어줄 것을 청했다. 아란은 그 청을 선뜻 수락했다.
공작이 손수 우린 차를 그녀 앞에 따라주며 물었다.
“다나르에서 지내시는 게 불편하지는 않으십니까.”
“전혀. 우습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요즘은 꼭 동화 속에 들어온 기분이야.”
아란은 진심으로 대답했다. 푸른 바다로 둘러싸인 절벽 위에 우뚝 세워진 흰 성을 지켜보고 있으면 때때로 자신이 동화에 나오는 바다 마녀에게 홀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는 조금씩 이 도시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느낄 때마다 언젠가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에 슬퍼졌다.
“모처럼 한가해지셨으니 이 시간을 마음껏 즐기십시오.”
“우습지. 너무 한가하니 이상하게 마음이 초조할 때가 있어. 늘 쫓기듯 바쁘게 지냈는데, 갑자기 한가해지니 적응이 되지 않네.”
아란이 찻잔에서 올라오는 수증기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하기야, 그런 초조함 같은 건 전부 쓸모없는 걱정이었다. 황궁에서 바쁘게 지냈던 것도 전부 그녀 혼자 일을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녀가 없는데도 국정은 잘 돌아가고 있었다.
쓸쓸함이 감도는 얼굴을 바라보던 공작의 표정도 덩달아 어두워졌다. 망설이던 그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보여드릴 것이 있습니다.”
그리곤 테이블 위로 둘둘 말린 서신 하나를 내밀었다. 로지나가 대공에게 보낸 편지를 중간에 가로챈 것이었다.
“역시, 그 시녀는 브린 님을 감시하러 온 것이 분명합니다.”
아란이 서신을 펼쳐 읽었다. 그러나 곧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그것을 도로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상관없네. 별 이야기도 쓰여있지 않으니. 낚시나 하며 시간을 죽인다는 이야기를 대공이 알아봤자 뭐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공의 성에서 그녀 혼자 무엇을 할 수 있겠나.”
“그래도 괘씸하지 않습니까.”
자신보다도 더 화가 난 것 같은 공작을 보면서도 아란은 심드렁하기만 했다.
“다시 황궁으로 부치는 게 좋겠는데. 로지나의 연락이 없으면 대공이 이상하게 생각할 거야.”
“하지만…….”
“그 아이가 아니더라도, 대공이 작정하면 난 그를 피할 수는 없어. 정말로 이 성에, 대공의 사람이 아무도 없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나?”
아란이 냉정하게 물었다. 공작은 대답하지 못했다.
아란은 슬슬, 떠날 때가 왔음을 느꼈다. 지금이야 상황에 맞추어 잠시의 유예를 만든 것뿐이지만, 그가 보내온 선물은 대공 나름의 어떤 의사표시와도 같았다. 지켜보고 있다는 의미의.
어느 순간 그의 인내심이 바닥났을 때, 아란은 자기 자신은 물론, 대공에게서 공작을 지켜줄 수 없었다. 제 사람을 지키지 못한다는 것은 이미 한번 실패한 적이 있는 아란에게 있어 정말로 두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두려운 건, 공작이 자신을 지키고자 결과가 정해진 일에 뛰어드는 것이었다. 로지나의 흉터를 볼 때면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아란은 공작의 매끈한 낯을 응시했다. 그녀는 그의 잘생긴 얼굴이 지금 그대로이길 바랐다.
* * *
옅은 빛깔의 금발이 시야를 어지럽혔다. 대공은 멍하니 물결치는 금발을 바라보다 손을 뻗었다. 그러자 아란이 그의 품을 파고들며 배시시 웃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다. 아니, 완전한 나신은 아니었다. 그녀의 목에 걸린 커다란 사파이어 목걸이가 반짝거렸다.
뭐해?
아란이 물었다. 가슴팍에 그녀의 가슴이 맞닿아 뭉그러지는 느낌이 생생했다. 작은 심장소리가 전해져 왔다. 대공은 홀린 것처럼 아란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그러자 그녀가 화답하듯 날씬한 다리를 벌려 그의 허리를 감았다. 그녀의 밀부는 이미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흘러나온 애액이 그의 배와 중심부를 흥건히 적셨다.
그녀가 조르듯 다리를 바짝 조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유리알처럼 투명한 눈동자를 마주하는 순간, 대공은 충동을 참을 수 없어졌다. 이토록 절실하게 그를 요구하는 아란이라니. 지극한 환희에 그는 몸을 떨었다. 그리고 곧장 그녀 안에 제 몸을 밀어 넣었다.
두꺼운 선단이 아란의 몸을 꿰뚫자 그녀가 아, 하고 신음하며 몸을 떨었다. 아름다운 얼굴이 쾌락에 젖어 이지러졌다. 대공 역시 거친 숨을 내뱉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뜨거웠다.
에녹.
아란이 한숨처럼 속삭이며 그의 팔뚝에 손톱을 박았다. 대공은 한순간 아찔함을 느끼며 본능적으로 더 깊이 파고들었다. 그녀의 향기가 점차 진해졌다. 아란이 숨을 헐떡이며 다시 한번 그의 이름을 불렀다.
에녹……!
그 이름을 듣자 그는 제 안에 품은 열정을 이길 수가 없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저도 몰랐던 어떤 문을 열어버린 것 같았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그러나 놀랄 만큼 강렬하고 뜨거운 애정이 안에서부터 흘러넘쳤다. 이 순간 그는 제 이름이 에녹이라는 것에 감사했다.
그는 애틋하게 매달려 오는 온기를 마주 안으며 입술로 긴 목을 어루만졌다. 그의 입술이 닿을 때마다 내부가 황홀하게 조여들었다. 아란은 부끄러운 기색도 없이 연신 달콤한 신음을 흘렸다.
긴 손톱이 팔뚝과 등을 연신 할퀴어대는데도 대공은 아픈 줄도 몰랐다. 그저 그녀의 손길이 닿은 모든 곳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그녀가 사랑스러웠다.
사랑합니다.
그는 저도 모르게 그녀에게 고백했다. 말하고 나니 부족했다. 이 감정을 담기에는 너무나 초라한 표현이었다. 그러나 다른 말을 찾을 수도 없었다. 제 사랑은 밖으로 나온 순간부터 점점 더 부풀고 있었다.
몸과 마음이 전부 타올라 재만 남아도 영원히 꺼지지 않을 열렬한 애정이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아란흐로드.
그는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평생 이 말만을 되뇌다 죽어도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열띤 고백에도 아란은 알 수 없는 표정만 짓고 있었다.
정말?
예.
그는 온 마음을 다해 대답했다. 제발 이 애타는 마음을 아란이 알아주길 바라면서.
그 마음을 읽은 것처럼, 그녀는 그가 사랑해 마지않는 웃음을 돌려주었다. 그 역시 아란을 따라 웃었다. 녹색 눈동자 위로 열망을 숨기지 못하는 제 얼굴이 비쳤다. 아란이 그의 목을 껴안은 채 속삭였다.
그러면…….
그는 고개를 숙여 아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부드러운 입술이 귓바퀴에 내려앉았다.
그러면 죽여줘, 에녹. 아프지 않게…….
녹아내릴 듯 달콤한 목소리였다.
아.
그 속삭임이 그의 정신을 순식간에 돌려놓았다. 그제야 그는 이것이 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를 비웃듯 세상이 무너지고 있었다.
그는 서둘러 아란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마지막에 보았을 때처럼 차고 파리했다.
어서, 날 죽여……!
달콤했던 목소리가 찢어지는 비명으로 변했다. 대공은 발버둥 치며 악쓰는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러나 힘이 어찌나 센지 그로서도 버틸 수 없었다. 그녀의 목에 걸려있던 보석들이 산산이 부서져 쏟아져 내렸다. 파편들이 튀어 피가 나는데도 아란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기어이 대공을 쓰러뜨린 그녀가 그 위에 올라타 그의 손을 제 목에 가져다 댔다. 핏발 선 눈으로 노려보는 모습이 마치 악귀 같았다.
대공은 아란을 밀치려 했으나 그녀의 목을 쥔 손이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꾸만 조여들었다. 제 손아귀에 잡힌 목은 현실과 똑같이 가냘프기 그지없었다. 목이 졸린 아란이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안 돼……. 안 돼!
대공이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죽어가면서도 즐거운 듯이 웃었다.
숨넘어가는 소리, 웃음소리, 비명이 어지럽게 뒤섞여 귓가를 세차게 때렸다.
대공은 눈을 번쩍 떴다. 아란의 모습은 사라지고 보이는 것은 어둠뿐이었다. 먹먹한 귀로 제가 내뱉는 가쁜 숨소리가 공허하게 울렸다.
지독한 악몽이었다.
그는 길게 숨을 내뱉으며 손으로 이마를 감쌌다. 양손이 볼품없이 떨리고 있었다. 아직도 손바닥에 가느다란 목이 부러지는 감촉이 남아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타르처럼 끈적하게 들러붙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대공은 자신이 누워있는 곳이 제 침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멍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곳은 황제의 침실이었다. 어젯밤, 술에 취해 정신이 나간 채로 이곳에 기어들어 왔던 기억이 났다.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이미 맨정신으로도 몇 번이나 이곳을 찾았다. 결국엔 문을 열지 못하고 돌아가곤 했지만 말이다. 그 알량한 인내가 이제 한계를 맞은 모양이었다.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그는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침구엔 아직도 아란의 체향이 남아있었다.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 같은 희미한 흔적이었지만 그는 놓치지 않았다.
그 냄새를 맡자 대공은 그녀가 못 견디게 그리워졌다. 입술부터 뱃속까지 바짝 말라 갈라지는 듯한 갈증이 일었다. 유혹적으로 안겨 오던 꿈속의 그녀가 떠올랐다.
그런 꿈을 꾼 것도 당연했다. 침구뿐만이 아니라 방 안 공기 전체에 아란의 향기가 녹아 있었다. 그에겐 그녀만이 유일한 자극이었으니, 몸도 마음도 그녀의 흔적에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이럴 줄 알고 이 방에는 들어오지 않으려 했는데, 제 본능은 이성보다 강했다.
그는 잠시라도 놓칠세라 베개에 남은 잔향을 들이마시고 또 들이마셨다.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그녀의 흔적을 찾는 것을 멈추지 못했다. 하는 꼴이 꼭 백치가 된 것 같았다. 대공은 베갯잇을 움켜쥐며 괴롭게 신음했다. 갈구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해 미칠 것 같았다.
악몽에서 눈을 뜨니 현실 또한 지옥이었다. 이럴 바엔 차라리 아란이 있는 꿈속이 더 나은 것 같기도 했다. 비록 그가 원하는 모습으로 나타나 주지 않더라도, 그녀를 볼 수만 있다면 그는 기쁘게 잠들 수 있었다.
새벽이 어둠을 파랗게 몰아낼 무렵에야 그는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아란의 침실은 아직 정리되지 않은 짐 따위로 어수선했다. 그녀는 그가 보낸 물건들을 고스란히 되돌려 보냈다. 단 하나, 시녀만 제외하고.
시녀를 거절하지 못하리라는 건 예상했었다. 그러나 그 외 다른 것들을 전부 돌려보낼 줄은 몰랐다. 하다못해 좋아하던 책 한 권이라도, 황후가 물려준 장신구 하나라도 가져갈 줄 알았다.
그것이 정말로 황궁을 잊어버리겠다는 의지인지, 아니면 단순히 그가 보낸 것들은 꼴도 보기 싫다는 건지, 대공은 아란의 의중을 짐작하려 애썼다. 그러나 어제 마신 술의 여파 때문인지 생각할수록 두통만 일었다.
그는 대신 시녀가 보낸 서신을 떠올렸다. 최근 아란이 낚시에 취미를 붙였으며, 사일러스 공작이 아란을 살뜰히 챙기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문장들이 그의 머릿속을 헤집고 엉뚱한 상상을 떠오르게 했다. 대공이 초조하게 입술을 씹었다. 제 선물을 거절한 건, 이미 공작의 것을 받았기 때문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그를 의지하고, 그가 주는 것을 받고, 그리고…….
그리고 저와 했던 그 행위를 그와 하고 있을까 봐 애가 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