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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의 밤-78화 (78/146)

78화

곤란해하면서도 결국 자신을 받아들인 아란을 보며 시녀, 로지나는 제 진짜 주인을 떠올렸다.

궁에 불어닥치던 피바람이 잠잠해져 가던 어느 날, 그가 갑자기 자신을 불러냈었다.

그의 집무실로 찾아가자 오만한 자세로 의자에 앉아 있던 대공은 자신에겐 시선조차 주지 않고 하던 일만을 계속했다.

부쩍 살이 빠진 얼굴은 평소보다 더욱 날카롭고 차가워 보였지만 그마저도 서늘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러나 로지나는 그의 외모에 조금도 설렘을 느끼지 못했다. 저 겉모습에 홀려 가까이 다가갔던 여자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그녀는 익히 알고 있었다.

대공은 한참 지난 후에야 고개를 들어 로지나를 바라보았다.

‘폐하께 가라.’

그가 짧게 내뱉었다. 갑작스러운 명에 로지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가 알기로 황제는 달아나는 중에 크게 다쳐 다나르에서 치료를 받고 지금은 요양 중이었다.

대답이 늦어지자 곧장 대공의 차가운 시선이 닿았다.

‘예.’

로지나는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대공의 눈동자가 칼날처럼 제 몸을 훑는 것 같았다.

그 일이 있고 난 후로, 대공은 때때로 그녀를 저렇게 바라보았다. 당장이라도 끌어내 짓밟아버리고 싶은 충동이 가득 들어찬 눈으로. 그건 아마 그녀가 황제를 사일러스 공작에게 넘긴 장본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로지나는 꿀꺽, 마른 침을 삼켰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흐르며 참혹하게 잘려 내걸린 백작의 목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몇 대에 걸쳐 대공가를 모셔온 충신도 무참히 베어버린 사내가 일개 시녀에 불과한 자신을 죽이지 못할 리 없었다.

그러나 로지나는 대공이 제게 해를 입히지 못할 거라고 확신했다. 어쨌거나, 황제를 살린 건 로지나 자신이었으니까.

‘전에 했던 대로, 폐하의 언행을 살피고 보고드리면 되겠습니까?’

놀랍게도, 대공은 잠시 망설였다. 무언가를 생각하던 그가 고개를 저었다.

‘……그분께서 불편하지 않게 돌봐드리는 것을 우선으로 여겨라.’

‘예.’

황제를 향한 대공의 집착은 퍽 이상했다. 가학적이고, 잔인하게 굴면서도 결국 황제가 원하는 것은 다 들어주었다. 아니, 때로는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못해 안달인 것처럼도 보였다.

그녀는 그가 황제에게 품은 감정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새로 바뀐 시녀들이 수군거리는 걸 들어보면 이른 새벽 태양보다 일찍 입궁한 대공이 황제의 침실 문 앞에서 우두커니 서 있다 간다고 한다.

마치 방 안에 누군가 있는 것처럼 한참을 기다리다가 어떤 때는 노크를 하기도 하지만, 끝내는 잠겨있지도 않은 문을 열지 못하고 등을 돌려버리는 일이 매일같이 반복되었다.

충심 그 이상이 아니냐며 시녀들은 볼을 붉히기도 했지만, 약탈자처럼 밤에만 침실을 찾아왔던 과거의 대공을 기억하는 로지나는 쓴웃음만이 나왔다.

제 마음도 모른 채 그저 휘둘리고 싶지 않으니 상대를 휘두르던 이에게 어울리는 결말이 아닌가.

그러나 황제는 그의 마음을 받아줄 만한 인물이 못 되었다. 황제가 아니더라도, 평범한 여자라면 절대 그를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로지나는 제 생각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사실, 다나르로 오면서도 그녀는 황제가 자신을 돌려보낼 거라고 생각했다. 정 안 되면 매달려서라도 그 옆에 붙어있을 생각이었다. 굳이 대공과 비교하지 않아도 황제는 꽤 편한 주인이었고, 황제의 곁에 있는 유일한 제 사람에게 대공이 아무 보상도 하지 않을 리는 없었으니까.

그러나 마음 약한 황제는 간청하기도 전에 선뜻 그녀를 받아주었다. 일이 잘 풀려 정말 다행이라고 로지나는 생각했다.

* * *

“안색이 좋아지셨습니다, 폐하.”

아란의 머리를 매만져주던 시녀가 사근사근하게 웃으며 말했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처럼 조급하고 거칠던 태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아란은 대답하지 않고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갸름한 턱 언저리부터 목까지 이어진 흉터를 발견했다. 화장을 짙게 하여 가려보려 한 것 같은데, 그럼에도 흉하게 남은 흔적을 전부 가리지는 못했다. 분명 이전엔 없던 것이었다.

어쩌다 그런 흉터가 생겼느냐고, 아란은 차마 물을 수가 없었다.

“왜 그렇게 보시나요?”

시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란은 흉터에서 눈을 떼고, 대신 줄곧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이름이 뭐지?”

“로지나입니다, 폐하.”

“로지나.”

아란은 그 이름을 각인하듯 한 번 더 중얼거렸다.

“그래. 로지나. 사일러스 공에게 말해 방을 내어줄 테니 편히 지내렴.”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그리고 그 폐하라는 호칭은, 여기선 자제해 주었으면 한다.”

“예? 아, 죄송합니다.”

딱딱한 어조에 놀란 로지나가 당황한 낯으로 사과했다. 아란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외면했다. 화가 난 줄 알았는지, 로지나가 제 눈치를 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아란은 괜찮다고 말하거나 미소를 지어주지 않았다.

여전히 고맙고, 미안한 사람이었으나 정을 주어서는 안 됐다. 로지나는 대공의 수족이었다. 아란이 틈을 보이는 순간 대공은 또다시 그녀를 이용해 저를 휘두르려 들 것이다.

고마운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표할 수 없게 만드는 대공이 원망스러웠다. 아란은 입매를 더 딱딱하게 굳혔다.

그 사이 로지나는 단정하게 땋은 머리를 둥글게 틀어 올리려고 했다.

“이만하면 된 것 같구나.”

로지나의 손길을 거절한 아란이 몸을 일으켰다. 로지나는 조금 당황했다. 길게 땋아 늘어뜨린 머리 모양은 나쁘지 않았지만 그 위에 장신구 같은 건 하나도 꽂지 못한 채였다. 원래 황제가 화려한 치장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긴 했으나 지금 그녀의 차림은 너무 수수했다. 공작성 시녀들 앞에서 제 실력을 한껏 뽐내려던 로지나의 계획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로지나가 멍하니 있는 사이, 황제는 심지어 손수 문을 열고 침실을 나서려고 했다. 어디로 가는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로지나는 허둥지둥 그녀의 뒤를 따라가면서, 황제가 조금 변했다고 생각했다.

‘아프시다더니, 그래서 그런가?’

하지만 황제는 생각보다 멀쩡했다. 불편한 곳도, 아픈 곳도 없어 보였다. 외려 황궁에 있을 때보다 더 건강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을 받아준 것을 보면 무른 성정은 여전한 것 같은데, 묘하게 거침없어졌다. 그리고 냉정했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지만, 정말로 황족 같았다.

로지나는 목적지가 어디인 줄도 모르고 아란을 따라가다 어렵사리 물었다.

“저, 어디를 가시나요?”

“낚시.”

그리고 돌아온 대답에 귀를 의심했다.

‘다나르에서는 낚시라는 단어가 다른 의미로 쓰이나? 혹시 은어 같은 건가?’

어쩌면 황제가 다른 행동을 비유한 것일지도 몰랐다. 가령 독서를 통해 지식을 낚는다거나, 혹은 사교를 통해 인맥을 낚는, 그런 것들 말이다.

그러나 황제는 도서관에 들르지도, 사람을 만나지도 않았다.

어리둥절한 채로 따라오는 로지나를 뒤로한 채 황제는 마차에 오를 준비를 했다. 그 옆엔 시종들 몇이 낚싯대와 커다란 바구니 따위를 들고 서 있었다. 막 마차에 오르려던 황제가 뒤늦게 생각난 듯이 로지나를 돌아보았다.

“따라오지 않아도 좋아.”

“아니, 아닙니다.”

로지나는 냉큼 그녀를 따라나섰다. 아무리 대공이 그녀의 안위를 먼저 살피라고 했으나 그녀는 제 임무의 본질이 감시임을 잊지 않았다. 그녀는 황제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펴야 할 의무가 있었다. ‘낚시’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내어 대공에게 보고해야 했다.

황제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대공이 무서운 건 어쩔 수 없었다. 동생이 입은 은혜는 이미 충분히 갚았다. 로지나는 두 번이나 그녀를 위해 목숨을 걸 만큼 황제에게 충정이 깊지 않았다.

제 속내를 모르지 않을 텐데도 황제는 그녀를 막지 않았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평범한 해변이었다. 보석처럼 오묘하게 빛나는 바다와 흰 모래사장이 아름답긴 했지만 그뿐으로, 딱히 대단한 비밀을 품은 것 같지는 않았다.

황제는 말없이 모래사장을 지나 가파른 바위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갔다. 로지나는 그때까지도 그녀가 말한 낚시가 말 그대로 물고기를 잡아 올리는 행위임을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황제가 갯바위 위에 자리를 잡고 시종에게 낚싯대를 건네받은 후에야, 로지나는 그녀가 진심으로 낚시를 할 생각이라는 걸 알았다. 로지나는 얼빠진 얼굴로 눈만 깜박이다, 시종이 뒤이어 지렁이가 가득 든 상자를 내려놓는 것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으아악!”

그 비명을 들은 아란은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얼마 전 제 모습이 저렇게 바보 같았겠구나 싶어 낯이 뜨거우면서도 우스운 건 어쩔 수 없었다. 로지나는 지렁이를 피해 달아나느라 그 맑은 웃음소리를 듣지 못했다.

잠시 후,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로지나는 바위에서 내려가 모래로 장난을 치는 척하며 황제를 힐끔거렸다. 황제가 손수 바늘에 미끼를 끼우는 모습을 보았을 때, 로지나는 눈을 의심했다. 그러다 지렁이의 체액으로 번들거리는 손을 아무렇지도 않게 손수건에 문질러 닦는 장면을 보고는 그만 불경하게도 헛구역질을 했다.

로지나가 구역질을 하거나 말거나, 아란은 묵묵히 낚시에 집중했다.

“폐하께서 낚시를 자주 하시나요?”

로지나가 희게 질린 얼굴로 황제를 따라온 시종에게 물었다.

“날씨가 궂지 않다면 대체로 그러십니다.”

시종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로지나는 대공에게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잠시 고민했다. 자유롭게 바위 위에 걸터앉아 물고기가 잡히길 기다리는 황제의 모습과 하루하루 까칠해지는 대공의 낯이 사뭇 비교되었다.

존경하는 대공 전하. 전하께서 폐하를 그리워하시는 동안 폐하께서는 낚시에 심취하시어…….

거기까지 생각한 로지나는 바다를 향해 시선을 돌리며 피식 웃었다. 오만한 제 주인이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속이 뒤틀릴지 생각하니 조금은 고소한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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