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하의 밤-77화 (77/146)

77화

첫 낚시는 말 그대로 대실패였다. 아란은 손바닥보다 작은놈들을 두세 마리 잡아 전부 풀어주었고, 공작은 단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두 사람은 대부분의 시간을 가신이 물고기를 낚아 올리는 장면을 구경하는 것으로 다 보냈다.

가신 역시 황제와 대공이 빈손인데 저만 수확을 올릴 수 없다며 잡은 물고기를 풀어주었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세 사람 모두 소득은 없었다. 대공성으로 돌아가는 손이 가벼웠지만 아란은 낙담하지 않았다. 애초에 물고기를 욕심낸 것이 아니었다.

“초보들이 의외로 월척을 낚기도 한다는데, 나와 공은 그런 행운이 없나 보다.”

아란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바닷바람에 그녀의 머리와 옷차림은 흐트러져 있었지만 얼굴은 묘하게 생기가 돌았다. 인형 같았던 전과는 사뭇 다른 낯이었다.

“다음번엔 분명 월척을 낚으실 겁니다.”

아란이 마차에 오르는 것을 도우며 공작이 대답했다. 그 역시 즐거운 기색이었다.

“내게 잡힐 정도면 정말 운이 없는 물고기가 아닐까.”

마차 의자에 등을 기댄 아란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날 이후, 아란은 정말 낚시에 재미를 붙였다.

공작성에서 그녀의 일과는 아주 간단했다. 주로 책을 읽거나 산책을 하고, 시간이 나면 바닷가에 나가 낚시를 했다. 여전히 수확은 신통치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공작은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아란을 찾아왔다. 해가 저물 때까지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으면 어느샌가 슬그머니 공작이 옆에 앉아있었다. 바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묘한 낯빛으로 ‘요 근래 곤란했던 일들이 갑자기 해결되어 여유롭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얼마나 잡으셨습니까?”

파도에 흔들리는 찌를 바라보고 있는데, 언제 왔는지 공작이 말을 걸었다. 그는 아란 옆에 놓인 통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엔 바닷물만 가득 들어있을 뿐, 물고기는 없었다. 아란이 머쓱하게 웃었다.

“오늘도 전부 놓아주신 겁니까?”

“실은 한 마리도 잡지 못했어. 소득도 없는데 오늘은 이만 들어갈까.”

아란이 자리에서 일어나 낚싯대를 거둬들였다. 낚싯줄 끝을 본 공작이 미간을 미미하게 찌푸렸다.

“브린 님.”

“응?”

“미끼를 끼우지 않으셨습니다.”

“아.”

그제야 아란은 제 실수를 깨달았다. 종일 기다려도 잡히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요즘은 늘 이렇게 사소한 실수를 했다.

“그러게.”

공작은 머쓱하게 웃는 아란의 얼굴을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쓸쓸한 옆모습에선 이곳에 있어도 금방 사라질 것 같은 아슬아슬함이 느껴졌다.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바다를 응시하는 그녀를 볼 때면 공작은 늘 그런 기분이 들었다.

그는 아직도 대공이 왜 순순히 그녀를 놓아줬는지 궁금했다. 그 역시 사내라 연적을 질투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다. 그건 대공도 마찬가지일 텐데 어째서 물러난 것일까. 자신이 자리를 비웠던 그 새벽,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었다. 대공이 아는 그녀의 모습을 그 역시 알고 싶었다.

그러나 아란은 그 앞에서 뭐든 감추려고만 들었다. 그녀를 방어적으로 만든 건 대공이었다.

그 벽을 부수고 싶었다. 대공에게 받은 상처를 자신이 감싸주고 싶었다. 이렇게 곁에 있으니 그 마음은 점점 커지기만 했다.

공작은 아란의 어깨를 껴안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이 마음을 들키면, 아란은 당장이라도 제 곁을 떠날 것이다. 지금은 나란히 앉은 이 한 뼘만큼의 거리에 만족하기로 했다. 저 멀리 존재하던 그녀가 이렇게나 가까이 있었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어조로 화제를 돌렸다.

“한데, 왜 잡은 물고기를 전부 놓아주시는 겁니까?”

“난 낚시를 하고 싶은 거지, 물고기를 잡고 싶은 게 아니야.”

아란이 알쏭달쏭하게 대답했다. 공작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채, 그녀는 무심히 주변을 정리했다. 탐스러운 머리채엔 짭짤한 바다 냄새가 배어 있었다. 그것이 그녀가 조금씩 다나르에 적응하고 있다는 증거 같았다. 공작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 * *

아란은 오늘도 미끼 없는 낚싯대를 드리웠다. 다나르의 뜨거운 태양과 해풍은 한 달도 되지 않아 그녀의 얼굴을 그을려 놓았다. 잘 타지 않는 피부라 여전히 희었지만 예전처럼 창백한 느낌은 없었다.

마냥 마음이 편한 건 아니었지만, 아란은 하루하루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그녀는 자신이 한가롭게 낚싯대나 드리우며 지내게 될 줄 몰랐다.

그녀는 체통 따윈 버린 것처럼 갯바위 모서리에 다리를 늘어뜨리고 앉았다. 풀어진 자세가 언뜻 말괄량이처럼 보이기도 했으나, 수평선을 바라보는 눈빛만큼은 아득했다.

생각하고 싶지 않아도, 그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 너머에 두고 온 것들이 떠오를 때가 있었다. 황위, 황궁, 그리고 대공에 대해서.

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했다. 그것들이 스무 해 동안 그녀가 알던 세상의 전부였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처음에 아란은 억지로 그 생각들을 눌러두려 했으나, 억눌린 생각들은 밤에, 꿈에서 그녀를 괴롭혔다. 결국 번민에서 벗어나게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후에는 그냥 내버려 두었다. 당장은 괴로워도 자연스럽게 떠올리다 보면 어느 순간 생각나지 않을 때가 올 것이다.

“저, 아가씨.”

동행한 시종이 생각에 잠긴 그녀를 조심스레 불렀다. 사일러스 공작이 일러 놓은 덕에 공작성의 사람들은 밖에선 그녀를 아가씨라고 불렀다.

“응?”

“비가 올 것 같은데 이만 들어가시는 게 어떠십니까.”

“비?”

아란이 고개를 들었다. 시종의 말대로 조금 전까지 맑던 하늘에 먹구름이 낀 것이 심상치 않았다. 그러고 보니 바람 역시 아까 전보다 확연히 거세졌다.

“그래야겠구나.”

아란은 얼른 낚싯대를 거두었다. 마차에 오르기가 무섭게 무거운 빗방울이 마차 천장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시종의 말을 듣길 잘했다.

그녀는 창문 너머로 젖어 드는 세상을 바라보았다. 이제 제법 다나르의 지리도 눈에 익었다. 이제 공작성에서 바다로 향하는 길과 그 주변은 혼자서도 충분히 오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공작성의 시종과 시녀들이 그렇게 놔두지 않을 테지만 말이다.

그녀가 공작성에 도착해 막 마차에서 내렸을 때였다. 아란은 성의 분위기가 평소와 조금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무심코 주변을 둘러보는 그녀의 눈에 성 입구 근처에 서 있는 마차들이 들어왔다. 그 마차들에 새겨진 문장을 확인한 아란이 그대로 멈춰 섰다. 로아크 대공가의 문장이었다. 그것만으로도 그녀는 순식간에 맨몸으로 황야에 내팽개쳐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가, 대공이 왔으면 어쩌지?

대공이 자신을 찾아왔을까 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란은 가빠지는 숨을 간신히 고르며 대공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당장이라도 그가 나타나 강제로 황궁까지 끌고 갈 것 같았다. 몸을 숨겨야 하는데, 발에 뿌리가 내린 듯 움직이지 않았다.

“……린 님.”

그녀는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는 대공에 정신을 집중하느라 옆에서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것도 몰랐다.

“브린 님.”

그러다 조심스럽게 어깨를 건드리는 손길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돌리니 공작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아란이 지켜보고 있던 것을 보곤 다른 사람들이 들을 수 없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괜찮습니다. 그는 오지 않았습니다.”

그제야 아란은 깊게 숨을 내쉬며 고개를 떨구었다. 공작 앞인데도 겁에 질린 기색을 숨길 여유가 없었다. 공작은 그녀에게서 눈길을 돌리며 못 본 척해주었다. 그게 못내 고마웠다.

잠시 후, 두려움을 추스른 그녀가 태연을 가장하고 물었다.

“대공가의 사람들이 왜 여기에 왔지?”

“그가 브린 님께 보낸 것이 있다더군요.”

“…….”

공작이 아란의 눈치를 살피며 대답했다. 조금 전보단 나았지만 그녀의 얼굴엔 여전히 긴장이 어려 있었다.

“껄끄러우시다면 돌려보내겠습니다.”

“아니.”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피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그가 보낸 물건 따위가 무서워 보지도 않고 돌려보낸다면 자신은 영원히 이 상태 그대로일 것 같았다.

공작은 아란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더 묻지 않고 그녀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그곳엔 이미 대공이 보낸 사람들이 와 있었다. 낯익은 자들도 있었고, 처음 보는 자들도 있었다. 아란을 알아본 사람들이 고개를 조아렸다. 아란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두려움을 숨긴 채 명령했다.

“대공이 무엇을 보냈는지 보여라.”

명이 떨어지자 곧 사람들이 줄줄이 들어와 가지고 온 것들을 내려놓았다. 손에 땀이 밸 정도로 긴장한 것이 무색하게 사소한 것들이었다. 크고 작은 상자마다 사용감이 있는 드레스, 보석, 향수, 책, 하다못해 깃펜부터 잉크까지, 그녀가 조금이라도 즐겨 썼던 물건들이 들어있었다.

아란은 무심한 눈으로 그것들을 바라보았다. 분명 애정이 담겼던 물건들인데, 놀랄 만큼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가지고 돌아가라.”

“하지만 대공께서 폐하를 위해 손수 골라 보내신 것들입니다.”

가장 신분이 높아 보이는 사내가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그가 쓸모없는 짓을 했구나.”

아란이 완강하게 나오자 사내는 마지못해 물건들을 물렸다. 뒤늦게 아란은 보석 몇 개를 챙겨두는 것도 나쁘지 않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제 와서 말을 번복해도 될까? 그러나 그가 보낸 것은 어떤 것이든 받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더 컸다.

망설임을 누를 무렵, 사내가 다시 말했다.

“그리고 시중을 들 시녀도 데려왔습니다.”

아란은 이번에야말로 불쾌감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대공이 제게 사람을 붙이려는 이유는 뻔했다.

“됐다. 돌려보…….”

드물게 냉랭한 목소리로 명령하려 했을 때, 사내 뒤에 가려졌던 시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탈출을 도와주었던 그 시녀였다. 아란은 저도 모르게 말끝을 흐렸다.

“오랜만입니다, 폐하.”

공손하게 인사하는 소녀를 보자 숨이 턱 막혔다.

교활한 대공, 비열한 대공.

그는 자신이 저 시녀를 돌려보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란은 대공이 제 사람에게도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 알았다. 그녀가 시녀를 돌려보내면 저 가여운 아이가 어찌 될지 장담할 수 없었다.

아픈 동생이 있다고 했었지.

그 말이 메아리처럼 머릿속을 맴돌았다. 고민하던 아란은 이번만은 뜻을 굽히기로 했다.

“시녀를 빼고 다 돌려보내라.”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침울했다. 여기까지 와서도, 그는 여전히 그녀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 들었다.

공작 역시 시녀를 알아보고 낯을 굳혔다.

“브린 님.”

대공의 의도를 눈치챈 그가 나직하게 아란을 불렀다.

“괜찮아. 공이 걱정할 일은 없을 거네.”

아란은 공작을 돌아보지 않은 채 대답했다. 지금 그녀의 머릿속엔 온통 대공뿐이었다. 그 사실이 아란을 분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시녀를 붙이고, 물건 따위를 보내 마음을 흔들려고 들어도 이제 대공이 원하는 대로 해줄 생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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