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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의 밤-76화 (76/146)

76화

다행히 공작의 말대로 정확히 이틀이 지나자 커다란 항구의 모습이 보였다. 그간 아란이 내내 토한 건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다나르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는 반짝였다.

아란이 불쑥 입을 열었다.

“헤시온.”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아직도 어색했다. 그러나 공작의 마음을 설레게 하기엔 모자람이 없었다. 그는 팔딱거리며 뛰는 심장을 억누르고 아란을 돌아보았다.

“예.”

“나, 하고 싶은 게 생겼어.”

아란이 먼저 그런 말을 꺼낸 건 처음이라, 공작은 무척 놀랐다.

“무엇을 하고 싶으십니까?”

“낚시.”

돌아온 대답도 의외였다. 그리고 지나치게 소박했다. 그래도 공작은 그녀에게 뭐라도 할 의지가 생겼다는 사실이 기꺼웠다. 아란이 고개를 돌려 공작과 눈을 맞췄다.

“그대가 가르쳐 줬으면 좋겠어. 아직 다른 사람은 불편하니까…….”

“…….”

당연히 그가 낚시를 할 줄 알 거라고 믿는 듯한 아란의 말에 사일러스 공작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송구하지만, 우선 먼저 제가 브린 님보다 먼저 낚시를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흐음, 그렇게 어렵나? 낚싯대만 던지면 알아서 잡히는 거 아니야……?”

아란이 어깨를 으쓱했다. 공작은 낚시를 하려면 미끼가 필요하고, 그 미끼가 지렁이라는 것을 알려주어야 하는지 잠시 고민하다, 묻어두기로 했다. 겨우 아란에게 하고 싶은 것이 생겼는데, 시도도 하기 전에 포기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공작의 속내를 모르고 그를 따라가던 아란이 무언가 깨달은 듯, 앙상한 손을 들어 올려다보았다. 황제의 인장을 끼고 있던 왼손 검지는 이제 자국만 남아 있었다. 그러나 아란의 시선이 향한 곳은 그 옆 손가락이었다. 중지에서 은은하게 빛나는 보석이 반짝였다.

분명 하루 묵었던 그 농가에 두고 왔었는데…….

아란은 저도 모르게 반대쪽 손가락으로 반지를 매만졌다. 반지는 그녀의 온기로 달구어져 미지근했다. 오래 착용했던 반지였던 데다 그간 너무 많은 일을 겪다 보니 다시 돌아온 줄도 모르고 있었다.

아마도 반지를 다시 끼운 사람은…….

아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사일러스 공작은 줄곧 그녀와 함께 있었으니, 이 반지를 도로 끼울 사람은 대공뿐이었다.

아란은 부디 그가 가여운 농부와 그 가족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기를 바라며 반지를 뺐다. 그리고 그대로 바다로 던지려다, 마음을 바꿔 다시 손가락에 꼈다. 지금은 다나르로 왔지만 언제까지 공작에게 신세를 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중엔 이런 사치품이 도움이 될 것이다.

게다가 반지는 아란에게 한 가지를 알려주었다. 이런 값비싼 물건을 함부로 팔거나 흘리면 제 위치를 들키게 될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다음번엔 누구도 자신을 쫓지 못하게 생활 반경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가서 팔아야겠다고 아란은 다짐했다.

그리고 그땐, 정말로 남부끄럽지 않게 잘 살아서…….

“브린님?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겁니까?”

가만히 멈춰선 아란을 공작이 의아하게 돌아보았다. 상념에서 깨어난 아란이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태연히 대답한 그녀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다시 공작과 향해 걸었다.

* * *

아란과 공작은 갯바위 위에 서 있었다. 두 사람 다 낚시 경험이 없거나 일천한지라, 공작의 가신 중 낚시가 취미인 이에게 배우기로 한 것이다.

“위험하니 조심하십시오.”

가신이 주의를 주었다. 아닌 게 아니라, 바위는 멀리서 보는 것보다 가팔라 잘못 발을 디뎠다간 그대로 바닷속으로 추락할 것 같았다.

“바람이 심하게 불면 낚시를 하기 어렵겠구나.”

깊은 물 속을 들여다보던 아란이 말했다.

“예. 그런 날엔 절대 여기까지 나오시면 안 됩니다. 풍랑에 휩쓸릴 수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그 모든 위험을 감수할 만큼 낚시는 매력이 있지요!”

가신이 호탕하게 외쳤다.

“그런가.”

아란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낚시에는 미끼가 필요하다는 것도 모르는 그녀였지만, 황궁에 있을 때 낚시에 미쳐버린 자들을 종종 보았다. 어떤 백작은 낚시를 아주 좋아하여 정규 회의에 매번 불참할 정도였다.

그에게 징계를 내리면서도 내심 낚시의 매력이 어떤 것인지 궁금했었다. 언젠가 시간이 나면 직접 해보리라 생각한 일 중 하나가 낚시였다.

아란은 가신이 시키는 대로 안전한 곳으로 물러났다. 공작은 그 옆에서 아란을 힐끔거렸다. 긴 머리채를 하나로 질끈 묶고, 풍성한 드레스 대신 편한 차림을 한 모습이 색달랐다.

반면, 그는 낚시하러 나온 사람답지 않게 말쑥한 차림이었다. 나름대로 신경을 쓴 모습이었지만 애석하게도 아란은 가신의 설명에 관심이 쏠려 공작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가신이 챙겨온 조그만 상자를 꺼내 들자 아란이 호기심을 드러냈다.

“그게 뭐지?”

하얗게 드러난 목덜미를 바라보던 공작이 아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이건…….”

공작은 저도 모르게 제 몸으로 상자를 가리며 말끝을 흐렸다. 미끼라고 말해야 하는데, 보여주기가 꺼려졌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란이 겁도 없이 공작을 제치고 가신에게 다가가더니, 곧바로 상자 안을 들여다보았다. 설마 미끼를 모를 거라고 생각 못 한 가신은 대수롭지 않게 그 안을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악!”

바구니 안엔 지렁이들이 서로 엉켜 꿈틀거리고 있었다. 아란이 기겁하며 후다닥 뒤로 물러섰다. 급히 뒷걸음질치다 발을 헛디뎠으나, 반응을 예상한 공작이 그녀를 받아주어 넘어지는 꼴은 면할 수 있었다.

그의 품 안에서 벗어나는 것도, 그에게 감사를 표하는 것도 잊고 아란은 경악스러워 정신이 없었다. 미끼는 꿈틀거리는 모양도 충격적이었지만 냄새도 심했다. 비린내와 흙내가 뒤섞여 코를 찔렀다.

처음 보는 그녀의 격렬한 반응에 공작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이상한 소리를 냈다. 품속의 아란은 너무나 귀여웠다.

제 추태를 깨달은 아란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이, 이건 왜 가지고 온 건가?”

뒤늦게 물러선 그녀가 원망스레 공작을 노려보며 물었다. 그가 장난을 친다고 생각한 게 분명했다.

“낚시를 하려면 미끼가 있어야 합니다.”

“미끼?”

아란도 미끼라는 단어는 알았다. 다만 낚시와 미끼를 한 번에 생각해본 적이 없었을 뿐이었다. 낚싯대는 사냥할 때 쓰는 덫 같은 건 줄 알았다. 아란은 제가 얼마나 무지한지 새삼 느꼈다.

“물고기가 아무것도 없는 빈 바늘을 덥석 물지는 않지요.”

가신이 억지로 웃음을 삼키며 대답했다. 아란이 황제가 아니었다면 진작 폭소를 터뜨렸을 것이다.

“지렁이는 제가 꿰어드릴 테니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공작이 태연하게 상자 안에 손을 넣어 지렁이를 꺼냈다. 가신을 시켜도 되지만 이 기회에 아란에게 남자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유치한 마음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아름다운 손안에서 지렁이들이 세차게 꿈틀거리는 모습에 아란이 다시 한번 오만상을 썼다.

“정말 이것들을 바늘에 꿰어야 한단 말인가?”

아란이 공작을 올려다보았다. 제발 아니라고 말해달라는 듯한 얼굴이었다. 공작은 제 잘못도 아닌데 죄책감을 느꼈다.

“거부감이 심하시면 그만두겠습니다.”

“……아니.”

아란은 조금 머뭇거리다 고개를 저었다. 시작하기도 전에 미끼 때문에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는 침을 꼴깍 삼키곤 힘주어 대답했다.

“나도 할 수 있어.”

“괜찮습니다.”

공작의 못 미더운 시선이 그녀의 오기를 부추겼다. 아란은 눈을 질끈 감고 바구니 안에 손을 넣었다. 지렁이에 손이 닿기 직전, 그녀가 슬그머니 눈을 뜨곤 마지막으로 확인하듯 물었다.

“깨물지는 않겠지……?”

지금 이 순간, 그녀에겐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처럼 보였다. 공작은 황급히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이렇게 겁이 많으면서, 어떻게 그 드세빠진 귀족들 앞에선 한 치의 양보도 없이 꼿꼿하게 굴었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예. 이놈들은 이빨이 없는 놈들입니다.”

가신이 냉큼 대답했다.

“……좋아.”

아란은 얼굴을 찡그리며 지렁이를 꺼내 들었다. 지렁이가 손가락에 얽혀드는 감촉에 하마터면 또다시 비명을 지를 뻔했지만, 용케 참아냈다.

“으…….”

아란은 몸을 부르르 떨면서도 지렁이와 바늘을 노려보았다.

할 수 있다.

크게 숨을 들이쉰 아란이 지렁이를 단번에 바늘에 꿰었다. 뾰족한 찌가 물컹한 살덩이를 꿰뚫는 느낌이 소름 끼쳤지만 그래도 해냈다. 할 수 있다고 말했지만 정말로 해낼 줄 몰랐던 일이기에 성취감이 더 컸다.

“됐다!”

아란이 자랑스럽게 바늘을 공작 앞에 내보였다. 공작도 그녀가 한 번에 성공할 거라고는 조금도 예상 못 했기에 상당히 놀랐다. 옆에 서 있던 가신도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대단하십니다!”

이런 일로 칭찬받는 게 한심스럽다는 걸 알지만,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성대를 통해 깔깔거리는 진동이 울렸다. 공작이 그 웃음소리에 넋이 나간 줄도 모르고, 아란은 기분이 고양되어 가신에게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 바다에 던지면 되나?”

“예. 제가 하는 걸 보시고 잘 따라 하십시오.”

“알겠네.”

“미끼를 손수 꿰셨으니 이미 성공하신 것과 다름없습니다, 폐하.”

들떴던 아란의 얼굴이 가신이 덧붙인 호칭을 듣고 굳어졌다.

아란도, 사일러스 공작도, 그녀가 다나르로 오게 된 사연을 굳이 다른 이들에게 말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공이 수도에서 반란군의 잔당을 처리하는 동안 그녀는 잠시 안전을 위해 다나르에 머무는 것뿐이며, 언젠가 황궁으로 돌아갈 거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실제로 대공이 황위를 탐내는 낌새가 전혀 없었으므로, 그 추측은 힘을 얻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여전히 황제였다.

사람들의 입에서 ‘폐하’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아란은 어서 황궁으로 돌아가라고 등을 떠밀리는 기분이었다. 그녀의 기분이 가라앉은 것을 눈치챈 공작이 가신에게 한소리 했다.

“알 만한 사람이 그리 경솔하게 굴면 어떻게 하나. 늘 듣는 귀가 있다고 생각해야지.”

“송구합니다.”

“아니야. 괜찮으니 어서 시범을 보이게.”

아란이 곧 표정을 지우고 상냥하게 말했다. 공작도, 그의 가신들도 전부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이런 사소한 일로 난처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밝은 어조에 눈치를 보던 가신의 표정이 펴졌다.

“바늘이 바위나 조가비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히 던지셔야 합니다. 이렇게요.”

아란은 가신의 시범을 유심히 보며 그대로 따라 했다. 힘이 없어 그처럼 멀리 던지지는 못했지만 모양새는 그럴싸했다.

“그리고 낚시를 하실 땐 될 수 있으면 조용히 하셔야 합니다. 기척을 듣고 물고기들이 도망치면 안 되니까요.”

아란은 이번에도 가신이 시키는 대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의 행동을 전부 지켜보던 공작도 질세라 미끼를 끼워 낚싯대를 드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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