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하의 밤-75화 (75/146)

75화

그가 다시 수도로 귀환했을 때, 그곳의 분위기는 찬물을 끼얹은 듯 가라앉아 뒤숭숭하기 그지없었다. 대공을 본 귀족들은 흡사 귀신을 본 듯 숨을 죽였다. 그들 중 일부는 대공이 돌아와 곧바로 황위를 차지할 거라 예측하고 미리 선물까지 준비했다가 대공보다 먼저 돌아온 렌스 백작의 목을 보고 얼이 빠져 있었다.

돌아온 대공은 태연하게 사태를 정리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반란을 주동했던 자들을 전부 색출하여 처형시킨 일이었다. 그건 그에게도 상당히 큰 손실이었지만 망설임은 없었다.

난데없는 반란에, 황가가 몰락한 지 채 2년도 되지 않아 다시 피바람이 불자 말단 하인부터 지체 높은 대귀족들까지 전부 숨을 죽였다. 죽은 사람이 그들과는 상관없는 인물이고,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짓기도 했기에 큰 반발은 없었지만 꼭 살얼음판을 걷는 듯 아슬아슬했다.

귀족들은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기 위해 애썼으나 대공은 황제가 반란의 충격으로 요양 중이라는 말만 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이 일전 그와 황제의 사이가 틀어졌던 일을 연상시켰다. 이번에야말로 완전히 황제가 대공의 눈 밖에 난 것은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황제를 해하려 한 제 심복들을 전부 죽인 걸 보면 그들이 알던 충성스러운 대공이 맞는 것도 같았다.

어찌 됐건, 황좌의 주인이 바뀐 건 아닌 것 같다는 의견엔 전부 동의했다. 그럼 왜 황제가 돌아오지 않고 있는 건지 모를 노릇이지만 성급히 떠드는 자는 없었다. 다나르에 머물고 있다곤 하나 아직 확실치는 않은 황제의 행방과 달리, 렌스 백작의 목이 광장에 걸린 건 모두의 눈으로 확인한 사실이었다. 그의 몸통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는데, 벌판에 버려져 들짐승의 먹이가 되었다는 흉흉한 소문이 들려왔다.

사람들은 조부 때부터 로아크 대공가를 모셨던 충신의 비참한 최후에 진저리를 쳤다. 물론 무모하고 어리석은 짓이긴 했다. 그러나 그 행동 역시 대공을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타당했지만 지나치게 잔인했다.

귀족들은 공통적인 생각을 했다. 대공이 황제가 되면 늘 언제 죽을지 모르는 불안감을 안고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

물론 현황제가 즉위한 이후 황궁 분위기가 좋았던 적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처럼 말 한마디 나누는 것도 조심스러울 정도로 살벌했던 적은 없었다. 기본적으로 유한 성격의 황제는 원칙만 잘 지키면 누구에게나 관대한 데다, 뒤끝도 없는 성정이라 회의장에선 얼굴을 붉혀도 사석에선 늘 모두를 공평히 대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오랜만에 입궁한 비에른 후작이 얼어붙은 공기를 참지 못하고 혼자 중얼거렸다. 드세기 짝이 없는 그조차 지금은 함부로 나서지 못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대공은 잠도 줄인 채 밤낮으로 국정을 정상화하는데 몰두했다. 바쁠 땐 아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몸이 편해질 때면 미칠 것 같았다. 그는 아직도 아란이 자신을 버렸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아예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한다면 모를까, 누구와 어디에 있는지 뻔히 아니 더 미칠 것 같았다. 그의 뒤틀린 감정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당장 다나르로 달려가 공작을 죽이고 아란을 끌고 오고 싶었다. 그 충동은 밤이 되면 더 심해졌다.

‘그대가 미워.’

그러나 언제나 마지막에는 아란의 말이 그를 멈추게 했다. 그는 이제 제가 내키는 대로 한다면 그저 아란의 원망만을 받을 뿐이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억눌린 감정은 어느새 공작 옆에서 웃는 아란을 그려내고는 스스로를 괴롭혔다.

제가 생각하기에도 치졸하기 이를 데 없는 질투였다. 눈만 감으면 사랑의 도피 운운하던 이름 모를 농부의 말이 자꾸만 귀에 맴돌았다. 나란히 서 있던 두 사람의 모습은 빌어먹게도 잘 어울렸다. 그는 매일같이 잠을 이루지 못하고 침실을 뛰쳐나가 말 위에 올랐다가 다시 침실로 돌아오길 반복했다.

그가 다나르로 향하지 못한 건, 제가 곁에 있으면 정말로 아란이 죽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죽여달라고 빌던 얼굴이 끈질기게 그의 머릿속에 달라붙어 놓아주지 않았다.

지금 그녀가 얼마나 위태로운 상황인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황위를 버린 것처럼, 자신을 버린 것처럼, 살겠다는 의지마저 버릴 것 같았다. 그는 그녀가 그것만이라도 강하게 움켜쥐어 놓지 않았으면 했다. 거기에 그는 아무 도움도 되지 못했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그는 치미는 격정을 잊을 겸 서류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 끝이 아니었다. 그녀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 반드시.

가장 높은 자리는 오로지 그녀만이 앉을 수 있었다. 가장 좋은 것은 그녀만을 위해 바쳐져야 했다.

대공은 아란이 다나르에 그리 오래 머물지 않을 거라 예상했다. 그녀가 제게 돌아올 거라는 오만함이 아니라, 그녀의 책임감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아란은 이대로 제국이 주인 없이 돌아가는 모습을 두고 보지 못할 것이다. 대책을 세우기 위해서라도 그녀는 돌아올 것이다.

그것이 대공을 움직이는 희망이었다.

* * *

대공이 돌아간 후, 아란은 곧 정신을 차렸다. 대놓고 묻지는 않았지만, 대공이 떠났다는 것을 알아챈 후 그녀의 회복력은 놀랍도록 빨랐다.

어느 정도 아란이 몸을 추스르게 되자 두 사람은 다나르로 떠나기로 했다. 아란은 저를 돌봐준 의원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의원은 그 덩치 큰 흑발 사내가 어느 순간 보이지 않게 된 것을 잠시 궁금해했으나, 이내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있어 봐야 무섭기만 했다.

그녀는 떠날 채비를 마친 황제를 바라보았다. 긴 백금발은 다시 비단천으로 꼼꼼히 가린 채였다.

“폐하.”

의원의 말에 아란은 화들짝 놀랐다. 그간 내내 머리카락을 보았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기에 모르는 줄 알았다. 실제로 수도에서 떨어진 지방에 사는 평민 중엔 황족의 머리칼이 무슨 색인지 관심 없는 자들이 대다수였다. 그녀는 너무 당황한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의원을 바라보았다.

의원이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아란은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들었다. 삶은 계란이었다. 갓 삶았는지 아직 따뜻했다.

“이건…….”

“가는 길에 드십시오. 무슨 일이신지는 모르겠지만 괜찮아질 겁니다.”

아란은 난처하게 시선을 피했다. 그 농부도, 의원도 아란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녀는 그들의 소박한 호의마저도 갚아줄 수 없는 사람이었다. 반응을 오해한 의원이 한걸음 성큼 다가섰다.

“볼품없겠지만 드릴 게 그것뿐이라…….”

“그런 의미가 아니네.”

“잘 돌아가셨으면 좋겠어요.”

의원이 진심으로 말했다. 무슨 사연 때문에 여기에 이런 모습으로 나타났는지 몰라도, 그녀의 눈에 아란은 남달라 보였다. 또래와 다른 차분함도, 그 무서운 사내를 아무렇지 않게 부리는 모습도 그랬다. 선한 눈빛 역시 특히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황제였다. 비록 이제 갓 소녀티를 벗은 어린 여자라도 제국의 주인이자 만인지상의 절대자이니 마냥 대단해 보이는 것이다.

의원의 얼굴에 떠오른 기대감을 본 아란은 제가 황위를 버리고 도망쳤다는 사실을 도저히 그녀에게 말할 수 없었다. 아란은 부끄러움에 결국 고개를 떨구었다. 도저히 얼굴을 들 수 없었다. 손에 든 의원의 호의가 무거웠다.

“브린 님.”

공작이 조용히 그녀를 재촉했다. 아란은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허둥지둥 그곳을 떠났다. 그러다 무심코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의원은 아직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란은 뜨거운 불에 닿은 것처럼 놀라 다시 정면을 보았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이제 폐하를 얽매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남은 일은 대공이 알아서 하겠지요.”

공작이 속삭였다. 그는 대공이 이 사태를 잘 처리하길 진심으로 바랐다. 그래서 아란이 아무 걱정하지 않고 제 곁에 머물렀으면 했다.

“그래.”

아란이 힘없이 대답했다. 공작은 품 안에 든 황제의 인장을 만지작거렸다. 대공이 인장을 두고 간 것을 말해야 할지 고민했으나, 그는 입을 다무는 쪽을 택했다. 인장을 아란에게 돌려주면 언젠가 그녀가 다시 황궁으로 돌아갈 것 같아서였다.

“배는 처음 타보신다고 하셨죠?”

“응.”

“아주 큰 배를 탈 테니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공작이 태연하게 말했다. 품 안에 든 인장이 묵직했다.

* * *

“으윽…….”

한참 속을 게워낸 아란이 희게 질린 얼굴을 들었다. 사일러스 공작이 다가와 그녀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며칠 더 쉴 걸 그랬습니다.”

“괜찮, 우욱…….”

아란이 고개를 젓다가 다시 토했다. 배를 난생처음 타보는 그녀는 뱃멀미라는 게 이렇게 무서운 건지 미처 몰랐다. 그래도 토기가 멎을 때면 파란 바닷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짠 바닷바람도 나쁘지 않았고, 이따금 해수면 가까이에서 날 듯이 튀어 오르는 이름 모를 물고기도 신기했다. 그 물고기를 구경하다 다음 순간 또 토하고 말았지만.

종일 토하느라 그녀는 의원이 챙겨준 계란은 입에 대지도 못했다. 모순적이게도, 뱃멀미를 할 때는 마음이 아픈 줄도 몰랐다. 온갖 추한 감정을 쏟아내던 자신도, 망연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던 대공의 얼굴도, 몸이 괴로우니 생각나지 않았다.

“얼마나 더 가야 해?”

“열흘은 더 가야 합니다.”

“열흘이라고?”

아란이 저도 모르게 입을 떡 벌렸다. 그 얼굴에 공작은 결국 웃음을 참지 못했다.

“실은 이틀입니다.”

“…….”

아란이 기가 막힌 눈빛으로 공작을 노려보았다. 공작은 괜히 머쓱해져 얼굴을 가린 천을 만지작거리는 척하며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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