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폐하,”
대공이 더 말을 잇기 전에 아란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황궁으로 날 다시 끌고 가서 뭘 어쩌려고? 처음부터 그 짓거리를 다시 시작하자고?”
“……폐하.”
“그 말을 어떻게 믿어? 이제 그렇게 살지 않을 거야. 그럴 바엔 그냥 이 자리에서 죽여!”
절규가 비명처럼 터졌다. 며칠간, 백작을 피해 도망치며 아란은 절실히 느꼈다. 그런 건 사는 게 아니었다. 그냥 천천히 죽어가는 것이었다. 코앞의 죽음이 두려워 그 주위만 빙빙 돌다 마침내 고꾸라지고 마는 꼴이었다.
한번 비명을 지르자 도저히 멈추어지지 않았다. 도대체 자신의 어디에 이런 분노가 숨어 있었는지 놀라웠지만, 아란은 그것을 드러내길 주저하지 않았다.
“죽이라고!”
“진정하십시오, 폐하!”
갑작스러운 반응에 놀란 대공이 그녀를 일으켜 세우려고 했다. 아란은 있는 힘껏 그를 밀쳐냈다. 그리고 손가락에서 황제의 인장을 빼 그의 가슴팍에 집어 던졌다.
“이딴 건 이제 필요 없어! 넌 아무것도 되돌릴 수 없어. 그러니 그냥 죽이라고! 이 못된, 이 지독한, 이……!”
호되게 욕설을 내뱉고 싶은데, 아는 게 없었다. 그게 더 화가 났다. 그래서 그냥 고함을 지르며 자신을 말리려는 대공을 때리고 할퀴었다. 손목이 잡히면 다리로, 다리가 잡히면 이로 깨물었다. 그럴 때마다 낡은 진료소 침대가 위태롭게 삐걱거렸다.
워낙 몸이 약한 데다 지친 상태라 반항은 아무런 위력도 없었지만, 대공에겐 모든 것이 충격적이었다. 그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아란을 꼭 껴안아 그녀가 진정하길 기다렸다.
안긴 채로도 한동안 발악하던 아란이 마침내 지쳐 나가떨어졌다.
대공은 마침내 안도의 한숨을 쉬며 그녀를 놓았다. 그때, 아란이 떨리는 손으로 그의 손을 잡았다. 대공이 파드득 몸을 떨었다. 아란은 주저 없이 그의 손을 제 목에 갖다 댔다. 대공이 놀라 그녀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아란이 놓아주지 않았다. 그녀는 온 힘을 다해 그의 손을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연약한 피부 아래 미약하게 뛰는 맥박이 느껴졌다.
“그냥 죽여……. 어렵지 않잖아. 그렇게 살게 할 바엔 그냥 끝내줘.”
그를 올려다보며 아란이 간청했다.
“나는 너무 무서워서, 내 손으론 도저히 못 하겠어. 그러니까 네가 해줘. 넌 많이 해봤으니까 쉬울 거 아니야. 안 아프게 죽여줄 수 있지? 응?”
지금 그녀의 말투는 어린 날, 아란이 에녹에게 무언가를 조를 때와 아주 비슷했다. 그것이 대공의 가슴을 후벼팠다. 아무것도 되돌릴 수 없다는 그녀의 말을 증명하는 것 같았다. 대공의 얼굴이 울 듯이 일그러졌다.
“왜 그런 얼굴이야? 원하는 거 들어줄 테니 뭐든 말하라고 했잖아.”
그 얼굴을 본 아란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못 죽입니다.”
한참 후에 대공이 대답했다. 그 사이 완전히 진이 빠진 아란의 손이 풀렸다. 대공이 그대로 손을 올려 그녀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 소원만은 들어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니 제발 그 말만은 하지 마세요.”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대공의 얼굴이 우스꽝스러웠다. 그러나 아란은 그를 비웃을 수 없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대공은 그녀를 미워했다. 재회한 그 순간부터, 아란은 그의 증오를 생생히 느꼈다. 순종적으로 고개를 숙여도, 다정한 척 밀어를 속삭여도, 때때로 그의 붉은 눈엔 감추지 못한 증오가 묻어나왔다.
그렇게 미웠다면 그는 아란을 죽였어야 옳았다. 그리하여 완벽한 복수를 끝내고 그들이 서로를 망치는 것을 막았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기회를 전부 날렸다.
아란은 앞으로도 그가 자신을 해하지 못할 거라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구걸하듯 자신의 시선을 좇는 대공의 눈을 마주 보았다. 지금 그의 눈에서 증오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걱정, 연민, 애틋함 따위가 떠올라 있었다. 아란은 그것들이 전부 진심이라는 것을 느꼈다. 한때 그녀도 저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으니까.
그는 그녀를 사랑했다.
그 사실이 그리 놀랍지 않은 걸 보니 아마 자신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대공 스스로 그 마음을 자각하기도 전부터. 다만 인정하고 싶지 않아 외면했을 뿐이다. 헛웃음이 나왔다. 우습지도 않은 상황에 겨우 참았던 눈물이 기어이 터졌다. 그는 아란의 마음에 증오를 심고, 그녀가 품은 애정을 가져가 버렸다.
깨닫는 순간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대공, 나는…… 그대가, 미워.”
아란은 제 말이 비수처럼 파고들어 그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을 생생히 보았다. 우습게도 그는 그녀에게서 비롯된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가 그에게 줄 수 있는 건 이제 증오뿐이었다. 거울에 비춘 것처럼 상황이 완벽하게 뒤바뀌었지만 어떤 우월감도, 만족감도 느낄 수 없었다.
아란은 제 안의 증오를 곱씹어 보았다. 놀랄 만큼 격렬하고 뜨거운 감정이었다.
그러나 애정이 그렇듯, 증오 역시 언젠간 사그라들 것을 아란은 이제 알았다. 애초에 없던 것처럼 묻어두면 홀로 타올라 재가 되고, 더 시간이 흐르면 애초에 존재한 적도 없는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그땐 대공은 아란에게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는 것이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아무리 죽을 것 같아도 언젠가는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당장은 아니었다. 증오는 뜨거웠고, 고통은 여전했다. 눈물이 넘쳐 숨이 찼다. 갑자기 아란이 숨을 헐떡이자 놀란 대공이 서둘러 그녀의 코와 입을 막았다. 죽이려는 게 아닌, 살리고자 하는 몸짓이었다.
“천천히 숨을 쉬십시오. 괜찮습니다.”
그가 시키는 대로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내뱉자 조금씩 호흡이 돌아왔다. 그러나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대공이 부지런히 그 눈물을 훔쳤다. 아란은 그를 내버려 둔 채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시야가 핑핑 돌았다.
제 안의 감정이 너무 격렬해서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마지막 눈물까지 떨군 아란이 고개를 돌려 대공을 외면한 채 중얼거렸다.
“……다 그만두고 싶어. 그대에게 휘둘리는 것도, 매일 매일 무력한 내 모습을 확인하는 것도.”
이번엔 뻔뻔스러운 대공도 대답하지 못했다. 그 말을 할 때 그녀는 몹시 지치고 피로해 보였다. 아예 그에게 이골이 나 마주하는 것조차 질린 사람 같았다. 대공은 이런 상황에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자신을 원하지 않는 그녀는 너무 생소하고 막막했다.
어떻게 해야 아란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그녀를 위로할 수 있을까.
그는 아란에 대해 너무 몰랐다. 간신히 그녀가 원하는 것을 알아냈지만 그건 그가 줄 수 없는 것이었다.
아란은 눈을 감고 아예 반대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런 소극적인 거부는 전에도 종종 보아왔다. 그때마다 그는 우악스럽게 그녀를 잡아 돌려 기어이 저를 보게 했지만, 지금은 작은 어깨가 거대한 성벽처럼 견고해 보여 손도 댈 수 없었다. 다시 싫다는 말을 들을까 겁이 났다.
망설이는 사이 차분하지만 단호한 목소리가 저 너머에서 들려왔다.
“다나르로 갈래. 아니, 다나르가 아니라도 상관없어. 네 옆이 아니라면 어디든 좋아.”
아란의 말에 대공이 허겁지겁 고개를 끄덕였다. 죽겠다는 말만 아니라면, 죽여달라는 간청만 아니라면 뭐든 좋았다.
“예, 폐하. 그렇게 하십시오.”
그녀는 살아야 했다. 살아서, 제게 명령을 내려주어야 했다. 오로지 그것만이 자신의 유일한 삶의 이유였으므로.
“황궁으로 돌아가.”
그녀의 명령에, 그가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기다리겠습니다.”
“…….”
“기다리겠습니다, 폐하.”
그가 거듭 힘주어 말했다. 끝끝내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 * *
“대공 전하? 어디 가십니까?”
어젯밤까지만 해도 저를 노려보며 황제 옆에 뿌리내린 듯 움직이지 않던 대공이 갑자기 떠날 차비를 하자, 사일러스 공작이 의아하게 물었다. 대공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공작은 그가 다시 정신이 나갔나 싶어 유심히 얼굴을 살폈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또렷했다. 오히려 번득이는 빛이 어딘가 잔뜩 억눌린 듯 형형했다. 공작은 하룻밤 사이에 그의 얼굴이 몰라보게 상했다고 느꼈다. 그간 거의 먹지도, 자지도 않았으니 당연한 결과겠지만, 그것만이라기엔 석연치 않았다.
밤새 무슨 일이라도 있던 건가?
공작은 서둘러 문을 열고 진료소 안을 살폈으나 어제와 딱히 달라진 점은 보이지 않았다.
“황궁으로 돌아가시는 겁니까?”
대공은 공작의 말을 무시하고 아란이 있는 진료소 안쪽을 한 번 더 바라보았다. 새벽에 나누었던 대화를 마지막으로, 아란은 다시 혼절해 버렸다. 그는 결국 아란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이대로 황궁을 내버려 둘 수는 없으니까요”
그가 떠나는 이유를 지레짐작해 혼자 맞장구치는 것을 무시하고 대공이 공작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얼떨결에 받고 보니 황제의 인장이었다.
“폐하께서 깨어나시면 전해드리십시오.”
“아니…….”
다시 돌려주기도, 그렇다고 받아두기도 곤란한 물건에 공작이 당황한 사이, 대공은 문득 그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섰다.
“그리고, 처신 똑바로 하십시오.”
“예?”
“넘볼 수 없는 상대에게 눈독 들이지 말라는 소립니다.”
그 말에 공작이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냈다.
“이보십시오, 아무리 전하라 하셔도…….”
그의 항의를 무시한 대공은 허리를 굽혀 공작의 귓가에 제 입을 가져다 댔다.
“똑바로 행동하라고. 허튼짓하면 죽여버릴 거니까.”
천박한 어조에 말문이 막힌 공작을 뒤로 한 채 대공은 걸음을 옮겼다. 패배한 것처럼 발이 무거웠다. 그러나 좌절도 그에겐 사치였다. 이렇게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하루라도 빨리 황궁으로 돌아가 모든 사태를 정리해야 했다. 아란의 자리를 더럽히고 있는 놈들을 없애야, 나중에라도 그녀가 돌아올 마음이 생길 테니.
대공은 물끄러미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간밤에 그녀가 깨물었던 흔적이 엷게 남아 있었다. 깊지도 않고 스쳐 지나간 것처럼 아주 엷게. 아란은 상처마저도 그에게 남겨주지 않았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는 상흔에 입을 맞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