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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의 밤-73화 (73/146)

73화

아란이 눈을 뜬 건 나흘이나 지나서였다. 사일러스 공작이 눈을 붙이러 잠시 자리를 비운 새벽, 예고도 없이 조용히 눈꺼풀이 열리고 녹색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먹는 것도, 자는 것도 잊은 채 밤낮으로 아란만 바라보던 대공은 기적을 마주한 사람처럼 저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그 장면을 지켜보았다.

꿈을 꾸듯 허공을 바라보는 눈동자는 몽롱했다. 두어 번 눈꺼풀을 깜박이고 나서야 비로소 약간 초점이 돌아왔다. 장소를 파악하려는 듯 주변을 살핀 후, 마침내 아란의 눈동자가 대공을 향했다. 그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가장 기다렸으면서, 한편으론 가장 두려워했던 순간이었다.

그는 심판을 기다리는 죄인처럼 꼼짝도 하지 못한 채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아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멍하니 눈만 깜박이는 모습은 아직 완전히 정신이 돌아오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대공은 초조하게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차라리 그녀가 화를 내거나, 소리를 지르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았다. 하다못해 여기가 어디냐는 질문이라도 해줬으면 했다. 이 순간 침묵이 너무나 무거워 온몸이 짓눌리는 것 같았다.

“폐하.”

무거운 공기를 참지 못한 대공이 아란을 부르며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을 더 강하게 쥐었다. 그 열기가 아란을 완전히 현실로 되돌렸다.

“놔!”

잡힌 손이 지옥 불에 덴 것 같이 뜨거워, 아란은 몸을 떨며 손을 빼냈다.

기절한 내내 그녀는 악몽을 꾸었다. 끔찍한 몰골로 죽어가며 저를 노려보던 렌스 백작, 부모님의 죽음, 저를 감싸려다 다친 에녹, 형제의 피를 뒤집어쓰고 제게 다가오던 대공까지, 그녀가 겪은 모든 슬픔과 고통이 악몽이 되어 따라붙었다. 그러나 그 어떤 꿈도 현실처럼 처참하지는 않았다.

이곳이 어디인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됐는지는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저 여전히 대공이 제 곁에 있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모든 일의 시작이 사랑하던 아비였다는 사실에 심장이 산산이 조각났다. 아비의 죄가, 형제들의 죄가 너무 깊어 헤아릴 수도 없었다.

내게서 그들의 그림자를 보았을까. 그래서 그런 일들을 내게…….

아란은 그를 마주 보지 못하고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마냥 대공을 원망할 수 있었던 때가 그나마 나았다. 아란은 이제 그에게 무슨 감정을 가져야 할지 몰랐다. 거침없던 패악의 이유를 이해하면서도, 그의 악랄함이 원망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이기적이라고 해도 좋으니 이젠 그냥 도망치고 싶었다. 그녀는 너무 지쳐 있었다. 실패작인 그녀에겐 애초부터 그 죗값을 치를 능력이 없었다.

아란은 다시 잠들기 위해 눈을 감았다. 기다리는 것이 악몽이라도 좋으니 대공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아란이 눈을 감자 대공은 다시 그녀가 정신을 잃으려는 줄 알고 덜컥 겁을 먹었다. 그가 다급하게 아란을 몇 번이나 불렀다.

“폐하, 폐하!”

꿈속으로 도망치지도 못하게 따라붙는 목소리에 아란이 결국 다시 눈을 떴다. 그리곤 물었다.

“왜…….”

그러나 목이 잔뜩 가라앉아 쇳소리만 새어 나왔다. 그러자 대공이 그녀의 상체를 안아 들고는 물잔을 채워 입술에 대주었다. 아란은 그의 손길을 거부하려 했으나 입술에 물이 닿자 갈증을 참을 수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잔을 완전히 비운 채였다. 꿀을 탔는지, 우습게도 달콤한 맛이 입 안에 감돌았다.

물잔이 입에서 떨어지자마자 아란이 숨을 몰아쉬었다. 대공이 버릇처럼 엄지손가락으로 젖은 입술을 훔치려 했다. 그러나 곧 정신을 차린 아란이 바로 그를 쳐냈다. 대공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그녀를 눕히곤 순순히 손을 거두었다.

“정신이 드십니까? 몸은 좀 어떠십니까, 폐하.”

“왜 날 그렇게 부르는데? 내가 아직도 황제야?”

투명한 녹색 눈동자가 대공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대공은 그물에 잡힌 사냥감처럼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아니, 아란은 그를 포획하지 않았다. 그가 그 시선에 매달린 것이었다.

그가 우려했던 대로, 정신을 차린 그녀는 두려웠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그랬다. 동시에 벅찰 만큼 감격스럽기도 했다. 그는 그 눈동자에 정신이 팔려 조금 늦게 대답했다.

“……예, 폐하.”

“왜?”

“제 주인은 오직 폐하 한 분뿐이니까요.”

아란이 기괴한 농담을 들은 듯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단 한순간도 그대의 주인이었던 적 없었어.”

한때는 그의 연인이었고, 그 후에는 그의 노리개가 되었으니 주인이라는 표현은 당치 않았다. 그리고 이제 그녀는 그의 무엇도 아니길 원했다.

그 목소리에서 묘한 싸늘함을 느낀 대공이 뭔가를 확인하듯 그녀의 눈동자 깊은 곳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엔 한 톨의 애정도, 미련도 없었다. 그가 보고 싶었던 빛은 이미 오래전에 꺼졌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허파를 쥐어짜는 것처럼 숨이 턱 막혔다. 놓아달라는 건 겁에 질려 내뱉은 말이 아니었다. 아마도 전부터 바랐던 소원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정말로 그를 놓아버렸다. 그러나 그는 아직 그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대공이 고집스럽게 중얼거렸다.

“폐하만이 저의 주인이십니다.”

“…….”

“이제 정신을 차리셨으니, 하루라도 빨리 황궁으로 모시겠습니다.”

“아니, 돌아가지 않을 거야.”

아란이 차게 고개를 돌렸다.

“황궁은 이제 내가 있을 곳이 아니야. 이제 남은 일은 공이 알아서 해. 그대가 황위에 오르든, 적당한 사람에게 넘기든. 애초에 내겐 걸맞지 않은 자리였으니.”

진작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받아들이는 것이 늦었다. 아란은 드디어 남은 미련을 전부 털어냈다. 깜냥도 안되는 것을 그리 악착같이 짊어지고 있으니 매사 휘청이는 건 당연했다. 그간 했던 모든 노력은 그저 미련이고 고집이었다. 그것을 너무 오래 외면하고 있었다. 씁쓸했지만 내려놓기로 하자 마음은 후련했다.

“폐하를 위한 자리입니다. 누구도 자격이 없습니다.”

“자격이 없는 건 나 역시 마찬가지야. 애초에 그대가 아니었다면 그 자리에 앉을 일도 없었을 테니. 그리고 이제 나보다 더 자격 없는 사람도 없겠지. 황위를 버리고 도망친 그 순간부터, 나는 황제로서 죽은 것과 마찬가지일 테니까.”

마치 자기 자신에게 말하듯, 아란이 중얼거렸다.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변란이 일어났을 때 군주가 몸을 피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제가 모든 것을 되돌리겠다고 약조하겠습니다.”

대공이 맹세했다. 동시에 애원했다. 그러나 애원하는 순간에도 그는 오만했다. 아란이 씁쓸하게 웃었다. 이제 보니 세상을 모르는 건 자신이 아니라 그였다. 그는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다.

“말했잖아. 아무것도 되돌릴 수 없다고.”

“되돌릴 수 있습니다. 반드시 되돌릴 겁니다. ”

대공은 자신 있었다. 그는 능력도 있고, 운도 좋았다. 부모가 죽었을 때도 그만은 살아남았고, 서쪽 국경에서도 사지 멀쩡하게 돌아와 권력을 되찾고 복수까지 성공시켰다. 그러니 이번에도 해낼 수 있었다.

“무엇을 되돌릴 건데?”

“폐하의 영광을…….”

기다렸다는 듯 대답하려던 대공이 문득 말을 멈췄다. 영광이라니, 그녀는 단 한순간도 영광스러운 황제였던 적이 없었다. 그녀를 무력한 황제로 만든 게 그 자신이니 그 역시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이제 와 그런 말을 하는 건 기만이었다.

되돌리고 싶은 것.

그가 정말로 되돌리고 싶은 건 아란의 마음이었다. 왜 되돌리고 싶을까. 어디로 되돌리고 싶은 것일까. 그녀가 황제가 되기 전에, 아니, 최소한 그녀와 재회했을 때로. 그냥 그녀를 처음 만났던 어린 시절이 가장 좋을 것 같았다. 아무 걱정 없는 얼굴로 웃고, 제게 사랑을 속삭이는 그때의 아란으로 되돌리고 싶었다.

“그래, 영광 같은 건 애초에 있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쳐. 그걸 되돌려서 뭘 어쩌려는 거야.”

“폐하께 영광을 돌려드리고, 저는 그냥…….”

대공이 마른 침을 삼켰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시선은 아란의 얼굴에서 떼지 못했다. 수척해져 더욱 커 보이는 눈, 날렵한 콧날, 거스러미가 일어난 입술. 어디 하나 애틋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지금도 그는 그녀의 얼굴에 입 맞추고 싶었다. 그는 간신히 나머지 말을 내뱉었다.

“저는 그냥 이대로 폐하 곁에 있고 싶습니다.”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그는 제 진짜 속내를 깨달았다. 이대로 아란 곁에 있고 싶었다. 그녀를 사랑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그녀에게 말하고 싶어 참을 수 없어졌다.

“난 싫어. 아무것도 되돌리고 싶지 않아. 네 곁에 있고 싶지도 않고.”

대공과는 반대로, 아란이 진저리를 치며 대답했다. 진심으로 끔찍했다. 만약에, 정말로 되돌릴 수 있다면 그녀는 아예 대공을 모르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래서 두 번 다시 그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영영 타인으로 남고 싶었다.

“내 부모가 네 부모를 죽였어. 그들의 자식들은 널 죽이려 했어.”

“상관없습니다.”

“복수를 원한다면…….”

아란이 꺼낸 단어에 대공의 얼굴이 매섭게 굳었다. 아란은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깊게 숨을 들이쉰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복수를 완성하고 싶으면, 그냥 날 죽여. 그러면 모든 것이 끝나잖아. 이렇게 수고를 들일 필요 없어.”

“복수는 이미 끝났습니다. 다들 죗값을 치렀습니다.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대공의 목소리는 침착했으나, 그의 눈은 전에 없이 흔들렸다.

“또 나를 속이는구나.”

“믿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제 마음은 변함없습니다.”

“그래서, 나를 다시 황궁으로 데려가겠다고?”

“그곳이 폐하께서 계실 곳이니까요.”

둘이 함께 있어 좋을 일은 하나도 없었다. 이미 여러 번의 경험으로 아란은 그 사실을 깨달았다. 아란이 아는 것을 대공이 모르지 않을 텐데 그는 막무가내였다. 그는 아란 뿐만 아니라 제 상처까지 외면하기로 마음먹은 것 같았다.

그의 마음은 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것일까.

그사이 충동을 참지 못한 대공이 결국 그녀의 손을 끌어당겨 입 맞췄다.

“싫어. 안 갈 거야.”

“괜찮습니다, 폐하. 앞으로 제가 폐하께……, 함부로 구는 일은 없을 겁니다.”

“안 간다고 했잖아!”

반복되는 대화에 질린 아란이 결국 그의 손을 뿌리치며 소리를 질렀다. 여기서 그에게 지면, 정말로 그녀는 다시 황궁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리고 그 후엔 다시 모든 것이 되풀이될 것이다. 기생충처럼 그에게 빌붙어 눈치를 보면서, 그의 폭력을 고스란히 감내하는 일이. 상상만으로도 끔찍하고 두려워 몸이 떨렸다. 이제 그런 식으로는 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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