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하의 밤-72화 (72/146)

72화

공작은 그길로 곧장 선착장 근처 마을로 향했다. 그리고 근방에서 가장 유명한 의원이 있다는 진료소를 찾았다.

“어서 오세…….”

심드렁하게 인사하던 의원이 공작의 모습을 보고 흠칫했다. 비록 먼지를 뒤집어쓰고 몰골이 말이 아니었지만 타고난 기품은 가려지지 않았다. 보기 드문 미남자의 등장에 잠시 정신이 팔렸던 그녀는 조금 늦게 그의 등에 업힌 여자를 발견했다. 그리고 여자의 상태를 확인한 의원은 이번에야말로 헉 소리를 낼 정도로 놀랐다. 여자는 온통 피투성이였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에요! 일단 저기 눕혀요!”

놀란 그녀가 서둘러 침대를 가리켰다. 촌동네라고 표현할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소박한 소도시에서 이런 환자를 보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혹시 끔찍한 사고라도 난 게 아닐까, 의원의 몸이 떨렸다. 그 모습을 본 사일러스 공작이 침착하게 그녀를 안심시켰다.

“괜찮습니다. 피는 다른 사람의 것입니다.”

“그, 그런가요.”

그 말 역시 무시무시한 건 사실이지만, 의원은 일단 시체를 치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의원은 수건에 따뜻한 물을 적셔 아란의 얼굴과 드러난 곳을 닦았다. 핏물이 지워지면서 태어나 햇빛이라고는 받아본 적 없는 사람처럼 흰 피부가 드러났다. 닦아놓고 보니 남자처럼 여자 역시 보기 드문 미인이었다.

섬세한 이목구비에 감탄하던 의원은, 문득 여자의 머리카락 빛깔이 특이하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어린 시절, 수도에 놀러 갔다가 우연히 선선대 황제의 행렬을 본 적 있었다. 그의 머리카락이 꼭 이런 색이었다.

이렇게 색이 옅은 백금발은 직계 황족들만이 타고 난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가 듣기로 직계 황족 중에 현재 살아있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그렇다면 아마도 눈앞의 여자는…….

의원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 언제 다가온 건지, 어느새 그녀의 등 뒤에 남자가 서 있었다. 그가 조금 전과 똑같이 태연한 어조로 속삭였다.

“여기서 본 건 전부 비밀로 하세요. 천수를 누리다 편안하게 죽고 싶다면 말입니다.”

의원이 겁먹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가 다시 멀어졌다. 그제야 의원은 크게 숨을 내쉬었다. 긴장으로 손이 덜덜 떨렸다. 오늘따라 진료소에 환자가 없길 다행이었다. 아마 두 사람이 머무는 중에는 한동안 진료소 문을 닫아야 할 것 같았다. 눈치 빠른 그녀는 머리를 굴리면서 다시 태연하게 아란을 닦아주곤 상태를 살폈다.

그 모습을 확인한 사일러스 공작이 잠시 숨을 돌리고 있을 때, 진료소 입구에 기다란 그림자가 늘어졌다. 대공이 열린 문으로 성큼 들어오자 피비린내가 훅 끼쳤다. 공작은 그가 할 일을 전부 마쳤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공은 공작에겐 시선도 돌리지 않고 곧장 아란이 누워있는 침상으로 다가갔다. 어찌나 기척이 없는지, 아란을 살피던 의원이 뒤늦게 그의 존재를 확인하곤 펄쩍 뛰어오르며 비명을 질렀다.

“아악! 누구세요?”

대공은 대답 없이 누워있는 아란만 바라보았다.

깊이 가라앉아 있던 그의 분위기는 환자 앞에 서자 더더욱 침잠하여, 마치 이 세상 모든 절망을 다 끌어안은 것 같은 음울함을 보였다. 아마도 황제의 신하인 모양이었다. 의원은 속으로 제 운수 없음을 한탄하며 입을 다물었다.

남자의 옆모습은 조각처럼 수려했지만 지나치게 분위기가 냉혹하여 한눈에 외모가 들어오지 않았다. 의원은 직감적으로 이 남자의 심기를 조금도 거슬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용태는 어떠하신가.”

남자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큰 상처는 없으시지만…….”

의원의 눈이 수척한 아란의 뺨과 눈 밑을 향했다.

“평소에도 몸이 많이 약하셨던 것 같습니다. 타고나길 허약하신 데다 피로가 누적되어 혼절하신 겁니다.”

“그건 의원이 아니라도 알 수 있는 사실 아닌가. 내가 궁금한 건 언제쯤 정신을 차리실 수 있느냐는 거다.”

오만한 어조에 의원은 잠시 울컥했으나, 곧 공손히 대답했다. 말대꾸하기엔 남자가 지나치게 두려웠다.

“그건 환자의 의지에 따라 달렸다고 봐야 합니다.”

“의지…….”

그 단어를 한 번 중얼거린 그가 마법처럼 입을 다물었다. 그는 아란이 제 의지로 깨어나지 않는 것을 택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척했다.

돌기둥처럼 우뚝 서 있는 대공에게 공작이 말했다.

“여기서 이러고 계실 여유가 있습니까? 한시바삐 수도로 돌아가셔서 일을 완전히 마무리 지으셔야지요.”

“사람을 보냈으니 괜찮습니다.”

“하, 이 꼴을 보고서도 아직 수하를 믿으십니까?”

“제 수하를 믿는 게 아니라, 그들의 공포를 믿습니다.”

공작이 빈정거림에 대공이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한동안 적막이 흘렀다.

두 사람 사이에 낀 의원은 한동안 눈치를 보다가, 진료소 밖으로 나가서 오는 환자들을 전부 돌려보냈다. 그리고 해가 지기 무섭게 도망치듯 집으로 돌아갔다. 대공은 딱히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대신 본인이 밤새 아란의 곁을 지켰다.

공작 역시 진료실 한편에 놓인 긴 소파에 앉아 밤을 지새웠다. 그는 석상처럼 미동도 없는 널따란 등을 노려보았다.

정말이지, 한심한 작자였다. 저런다고 하여 황제가 마음을 돌릴 거라 생각한다면 오산이었다.

공작이 속으로 욕을 하거나 말거나, 대공은 하염없이 아란의 얼굴만 응시했다. 그 역시 며칠이나 잠을 이루지 못해 지친 상태였지만 피로한 줄도 몰랐다.

그는 까칠한 얼굴을 몇 번이나 쓰다듬었다. 그 손길이 성가셨는지, 아란이 눈썹을 찡그렸다. 대공은 공작이 듣지 못하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무슨 꿈을 꾸십니까, 폐하.”

대공은 부디 그녀가 행복한 꿈을 꾸길 바랐다. 그러나 아무래도 오늘은 그의 뜻이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는 날인 듯했다. 악몽을 꾸는 모양인지, 아란이 괴롭게 숨을 토했다. 이마엔 식은땀이 맺혔다. 대공은 물수건으로 그녀의 이마를 닦아주었다. 잔뜩 찡그린 얼굴이 안쓰러웠다.

꿈을 꾸는 그녀는 괴로움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아무리 몰아붙여도 늘 꼿꼿하게 목을 쳐들고 고집스럽게 입술을 다물던 현실의 그녀와는 달랐다.

그는 그 표정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그가 그렇게 보고 싶어 하던, 감정에 솔직한 그녀의 민낯이었다. 그러나 성취감은 없었다.

대공은 스스로의 긍지를 지키고자 하는 그 발버둥을 가소롭게 여기면서도 늘 거슬려 했다. 그는 아란의 단단한 껍데기 속에 숨은 속내를 보고 싶어 그녀를 늘 한계까지 몰아세웠다. 그렇게 해도 괜찮을 줄 알았다. 이처럼 이미 속이 전부 썩어, 멀쩡한 건 껍데기뿐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엘케인 후작의 말이 맞았다. 그녀는 특별하지 않았다. 상처를 받으면 아파하고 슬프면 눈물을 흘리는, 자존심 외에는 스스로를 지킬 무기가 하나도 없는, 지극히 평범하고 나약한 사람이 바로 그녀였다. 그것을 그 혼자만 몰랐다. 그러나 여전히 그에겐 그녀만이 특별했다.

대공은 축 늘어진 아란의 손을 잡고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그리고 품 안에서 그녀가 농부에게 주었던 반지를 꺼내 가느다란 손가락에 다시 끼웠다.

다시 제 주인을 만난 반지가 손가락에 완벽하게 맞물렸다.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엇갈린 가운데 그 반지만이 유일하게 딱 들어맞았다. 그 사소한 안정감에도 대공은 안도했다.

그는 반지를 끼워준 후에도 아란의 손을 놓지 않고 멍하니 바라보았다. 고생이라곤 해본 적 없는 고운 손에 군데군데 생채기가 나 있었다.

오랜 충신의 숨을 제 손으로 끊어놓았을 때도 무정하던 마음이 그 작은 생채기 앞에서 한없이 물러 터져 쓰리고 아렸다. 그는 상처마다 입을 맞추다가, 조그만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맥없이 늘어진 손은 그때처럼 뺨을 쓰다듬어주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를 밀어내지는 않았다. 대공은 그 사실에 만족했다.

그는 그대로 아란의 손을 구명줄처럼 부여잡고 그녀가 마지막으로 한 말을 몇 번이나 곱씹었다.

놓아 달라고 했다. 그건 아란이 저에게 처음으로 바라는 소원이었다.

들어주고 싶었다. 대공은 이미 그녀의 부탁이라면 뭐든 들어주겠다고 약조한 적 있었다. 그러나 그 이후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만약 이루어진다면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 소원이 될 테니까. 그는 두 번째도, 세 번째도 원했다. 가능하면 평생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고 싶었다.

무엇보다, 그는 아란을 놓는다는 전제를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었다.

그는 늘 두 사람의 관계를 붙잡고 있는 건 제가 아니라 아란이라고 여겼다. 그녀에겐 그가 절실히 필요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몬 자가 자신이라는 건 모르는 척했다. 치졸하고 비겁한 일이었다.

그 와중에도 그는 한 줄기 희망을 놓지 못했다. 반란을 일으킨 게 그의 수하들이니 상황을 오해하고 두려운 마음에 내뱉은 말일지도 몰랐다. 선선대 황제의 죄를 알게 되어 충격을 받은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녀가 깨어나면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고 안심시키자. 이번 반란은 절대 그의 의지가 아니었으며 선대들 사이에서 있었던 일 역시 수하들이 꾸며낸 거짓말이라고 속여 넘기면 아란도 어느 정도 마음을 돌릴 것이다…….

마음을 돌려?

그의 마음속에서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지금껏 오만하게 그녀를 내려다보며 내뱉은 모욕과 조롱이, 그리고 아란의 애원과 울음이 한꺼번에 떠올라 그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그간 몇 번이나 그녀를 울렸는지 손에 꼽을 수도 없었다. 애초에 재회한 순간부터 잘못 끼워진 단추였다. 그가 아는 아란은 유약하지만 절대 한번 내뱉은 말을 번복하지는 않았다.

서서히 발밑이 꺼져 들어가는 것 같았다. 오로지 제 손안의 서늘한 체온만이 선명했다. 축 늘어진 손을 붙잡고 있는 것은 제 손뿐이었다. 이걸 놓는다니, 저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대공은 불현듯 과거의 자신을 떠올렸다. 이미 한번 그녀를 놓아버렸던, 그런 줄 알았던 치기 어리고 오만했던 그때를.

사랑이 아닐 거라고 확신했다. 그녀를 떠올리며 느꼈었던 포근하고, 따스하고, 간지러운 감정 따위는 쉽게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에 분노와 증오가 덕지덕지 달라붙어 제 속은 온통 흉물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그 마음이 그를 살게 했다. 굳게 감긴 눈꺼풀 뒤 눈동자 색이 궁금하여 그는 끝끝내 살아남았다. 사실은 그때조차 저는 아란을 버린 적이 없었다는 걸, 그는 이제야 깨달았다.

황위도, 제국도 아무래도 좋았다. 아란이 아니라면 그에게도 무의미한 것들이었다. 세상에서 그녀만이 특별했다. 놓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대공은 문득 중얼거렸다.

“폐하. 어쩌면 제가 폐하를…….”

사랑.

그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믿을 수 없었다. 사랑이라는 게 이토록 추악할 리 없었다. 아란이 알려준 사랑은 그렇지 않았다. 연한 녹색 눈동자 안에 넘실거리도록 차올라 반짝이는 빛이 그가 아는 사랑이었다.

그렇지만 이토록 질기고 맹목적인 마음이 사랑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라고 명명해야 하는 걸까.

대공은 어서 아란이 눈뜨길 바랐다. 그녀의 눈동자를 다시 보고 싶었다.

동시에 두려웠다. 텅 빈 눈을 마주하는 것이 무서워, 차라리 아란이 눈뜨지 않은 지금 이대로 시간이 멈추길 바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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