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대공은 아란을 안고 어찌할 바를 모른 채 그대로 앉아 있었다. 머릿속이 텅 빈 것처럼 새하얬다. 힘겹게 제 이름을 부르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돌아와 그를 후려쳤다. 그 충격에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아란의 뒤를 쫓는 내내, 그는 그녀에게 다시 삶을 주고 싶다는 생각만 했다. 둘 사이에 있었던 일은 전부 덮고 새로운 빛깔로 칠하고 싶었다. 고집을 부려도 결국엔 늘 그의 뜻대로 휘둘렸던 아란이었기에, 대공은 이번에도 그렇게 될 거라 한 치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녀 앞에서 그는 늘 자신만만했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아란의 인생에서 자신만큼 중요한 사람은 없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그녀가 꿈꾸던 삶에 그의 자리는 없었다. 아란은 그를 버렸다. 수치와 모멸을 견디면서도 끝내 놓지 못했던 어린 날의 연인에게도 마침내 작별을 고했다.
“안 됩니다. 놓아드릴 수 없습니다.”
괴롭게 중얼거린 대공은 제 품에 안긴 파리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를 거부하듯 두 눈은 굳게 닫혀 있었다. 아까까지 그를 가득 채웠던 충만함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지독한 상실만이 남았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그녀를 놓을 수 없었다. 아란이 사라진 제 인생을 상상할 수 없었다.
“폐하…….”
대공이 갈라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반복해서 부르면 아란이 다시 정신을 차리고 자신을 봐줄 것 같았다.
“뭘 하고 계십니까, 대공.”
그의 곁으로 다가온 공작이 물었다. 대공은 그 물음을 듣지 못한 듯 여전히 아란만 부둥켜안고 있었다.
“설마 폐하를 그대로 두실 겁니까?”
그러자 대공이 조금 더 고개를 내려 아란의 전신을 살폈다. 뒤늦게 엉망이 된 그녀의 행색이 들어왔다.
그래, 명색이 황제이신데 이런 모습으로 계셔서는 안 되지. 대공은 멍한 머리로 생각했다. 아란은 신하들 앞에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걸 유달리 싫어했다. 분명 이대로 황궁에 돌아가면 부끄러워할 것이다.
그는 제 옷소매로 아란의 뺨을 적신 피를 닦고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빗어넘겼다. 그 꼴을 보는 공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잠시 후, 그가 어이없음을 숨기지 않는 어조로 물었다.
“뭐하십니까?”
대공은 말없이 아란의 머리카락만 빗었다. 손끝이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공작은 그 꼴이 한심스러웠다. 자신도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눈앞의 남자는 아예 판단력을 상실한 듯했다. 하지만 못내 놀랍기도 했다. 늘 냉정하던 그가 이렇게까지 이성을 잃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거기다 황제를 바라보는 눈빛이 어찌나 애틋한지, 공작은 대공이 지금 당장 눈물을 흘려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지금 대공은 누가 보아도 혹독한 사랑의 열병에 걸린 남자의 모습이었다.
한심하기는.
공작은 속으로 빈정거렸다. 제 마음 하나를 몰라 이런 사달을 낸 어리석은 자를 동정할 마음 따윈 없었다.
“대공, 이제 그만 정신 차리십시오!”
보다 못한 공작이 큰소리로 외치며 대공의 어깨를 세게 쥐었다. 그제야 대공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친 공작은 한순간 흠칫했다. 핏발 선 눈이 꼭 귀신처럼 성성했다. 그 눈동자에 깃든 살의는 진심이었다. 당장이라도 그가 다시 검을 들어 제 가슴을 찌를 것 같았다. 황제는 기절했으니 이제 그를 막아줄 수 없었다. 그러나 공작은 물러서지 않고 대공을 재촉했다. 이대로 아란을 내버려 둘 순 없었다.
“폐하를 이리 넘기십시오. 당장 의원에게 보여야 합니다.”
“잠시 혼절하신 것뿐입니다.”
대공이 아란을 더욱 세게 안으며 대답했다. 말을 듣지 않는 모습에 공작이 대공의 품에서 아란을 빼앗으려 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대공이 아란을 안아 든 채로 몸을 일으켰다.
대공은 새삼 그녀의 무게가 가볍다는 것을 느꼈다. 호리호리한 체형은 타고난 것이었으나 소녀 시절과 그리 달라지지 않은 것 같았다. 대공은 애써 그것을 모르는 척하며 제가 타고 온 말을 향해 발을 옮겼다. 그런 그의 어깨를 공작이 날쌔게 낚아챘다.
“지체할 시간 없습니다. 어서 폐하를 이리 주십시오.”
그러나 대공은 끝까지 아란을 내놓지 않았다.
“물러서십시오. 제가 모실 겁니다.”
대공의 말에 공작이 비소를 지었다.
“어디로요? 혼절하신 폐하를 당장 어디로 데려가시렵니까?”
“마차를 준비할 겁니다. 황궁까지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시도록.”
“완전히 돌았군.”
공작은 결국 참지 못하고 험한 말을 내뱉었다.
“자신을 죽이려던 무리들이 득실대는 황궁에 폐하를 다시 모시겠다고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대공이 정신을 차린 듯 멈춰 섰다. 공작은 그 꼴이 한심스러웠다.
“그게 폐하께서 원하는 일이라고 정녕 생각하십니까?”
“……폐하를 잘 안다는 척 말하지 마십시오.”
씹어뱉듯 튀어나온 말은 간신히 존대의 형태를 띠고 있었지만 난폭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공작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잘 아신다는 분이, 이렇게 약해지신 분을 데리고 그 먼 길을 가시겠다고요? 소금에 절인 청어도 그런 판단은 안 할 겁니다!”
“…….”
“되지도 않는 고집 부리지 마시고 합리적으로 생각하십시오. 여기서 이틀만 배를 타면 다나르가 나옵니다. 아니, 다나르까지 갈 필요도 없습니다. 선착장 근처에 제법 큰 마을이 있으니 급한 대로 그곳 의원에게라도 보이면 됩니다.”
“귀하신 몸을 아무에게나 함부로 보일 수는 없습니다.”
공작은 진심으로 그의 낯을 한 대 후려치고 싶었다.
“여기까지 오는 내내 폐하께서는 제대로 쉬지도, 드시지도 못하셨습니다! 대공은 어린 시절부터 곁에서 보필하셨으니 폐하의 몸이 얼마나 연약한지 누구보다 잘 아시겠지요. 그런데도 그런 같잖은 이유를 내세워 제 고집만 부리시는군요. 그간 폐하께서 얼마나 괴로우셨을지, 지금의 태도로 충분히 알겠습니다.”
대공은 분노로 눈앞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으나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란이 계속 괴로워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건 제 탓이 아니라 그녀의 성정 때문이었다. 그녀를 괴롭게 하는 것은 단지 그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제가 모시겠습니다. 폐하께서는 대공을 원하지 않으시니까요.”
그 말에 대공이 죽일 듯이 공작을 노려보았다. 아란 때문에 겨우 억누른 살의가 다시 스멀스멀 올라왔다. 이전부터 상상했듯이, 감히 아란을 담았을 두 눈을 뽑고, 같잖은 위로를 건넸을 혀를 뽑고, 그녀를 부축했을 사지를 잘라내야 했다. 그래도 성이 차지 않을 것 같았다. 아란이 아니었다면 공작은 이미 백 번은 더 목이 떨어졌을 것이다.
“닥치십시오, 공이 뭘 안다고……!”
“두 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저는 모릅니다. 하지만 폐하께서 얼마나 괴로워하셨는지는 압니다. 이 며칠간, 곁에서 전부 지켜보았으니까요.”
공작이 냉정하게 대답했다.
대공은 귀를 막고 싶은 것처럼 고개를 돌렸다. 저 간사한 혀에 현혹되어서는 안 됐다. 놈은 아란을 연모하니, 분명 그녀와 자신의 사이를 질투하고 있을 것이었다.
이건 전부 자신과 아란을 갈라놓으려는 수작이다. 아란이 자신을 버린 건 전부 공작이 옆에서 그녀를 홀렸기 때문이 분명했다. 대공의 상상은 제동을 잃고 점점 비약되었다.
그래, 전부 저자 때문이다. 상황이 너무 힘들어 폐하께서 잠시 저자의 교활한 혀에 넘어가신 것뿐이다.
그는 공작의 몸에서 가장 먼저 잘라내야 하는 부분을 결정했다. 혀는 잘라도 보이지 않으니 황제는 모르겠지.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공작은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 대공을 거부하시는 한, 저도 물러설 수 없습니다.”
“……폐하께선 절 버리지 못하십니다. 제가 없으면 안 되는 분입니다. 예전부터 지금까지.”
오로지 자신만이 그녀를 도와줄 수 있었다. 그러니 그녀는 자신을 버려서는 안 되었다.
대공의 말에 공작은 이번에야말로 비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계속 그렇게 외면하십시오. 이제껏 하셨듯이, 그렇게요. 그럼 폐하께선 전하를 더 원망하실 테고, 그만큼 제게 더 의지하실 테니 그편이 제게도 좋습니다.”
그 말이 대공의 가슴에 화살처럼 박혔다. 이성은 날아갔지만 본능이 공작의 말대로 될 것이라고 강하게 경고했다.
그렇게는 둘 수 없었다.
대공의 얼굴이 아주 잠깐,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그사이 공작은 빼앗듯 그에게서 아란을 넘겨받았다.
“전 폐하를 모시고 먼저 떠날 테니, 대공께선 저 시체부터 치운 후에 따라오든지 말든지 하십시오. 그래도 퍽 아끼던 심복 같던데.”
공작이 죽은 렌스 백작을 향해 턱짓했다. 대공의 시선이 처참한 꼴로 죽어있는 렌스 백작을 향했다. 백작의 시신은 여전히 대공을 향해 예를 갖춘 채였다. 대공의 눈가가 아주 잠시 떨렸다. 그러나 그게 전부였다. 곧 시체를 바라보는 눈빛이 차게 가라앉았다.
“아, 그리고 여기까지 오신 김에 다나르에 들러 말린 생선 대가리라도 가져가시지 그러십니까. 차라리 그것과 머리를 바꾸시는 편이 나을 것 같으니까.”
공작은 한껏 비아냥거린 후 아란을 데리고 떠났다.
그 이후로도 오래도록, 대공은 그 자리에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 그의 주변에 점차 하나둘씩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중 하나가 머뭇머뭇하며 말을 걸었다.
“대공 전하, 렌스 백작님의 시신은…….”
대공은 시선 하나 돌리지 않고 냉담하게 대꾸했다.
“반역을 꾀한 자이니 이대로 들짐승의 먹이로 내주어라.”
아무리 아끼던 수족이라도, 감히 황제를 시해하려는 자는 용서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곳엔, 그 말도 안 되는 일을 저지르려던 수하들이 전부 모여 있었다. 대공이 몸을 돌려 싸늘하게 그들을 노려보았다. 그의 눈동자엔 어느새 완전히 이성이 돌아와 있었다.
“당분간 들짐승들이 배를 곯을 일은 없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