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행운의 여신이 가호를 내렸는지, 아니면 간절함이 그의 두 발에 날개를 달았는지, 그는 마침내 아란을 발견했다. 그때는 이미 무도한 심복이 그녀를 향해 칼날을 세우는 중이었다.
“검을 거둬라, 백작!”
대공이 다급히 외쳤다. 그는 뒤늦게라도 제 수하의 어리석은 짓을 막으려 했다. 그 외침에 두 사람이 그를 돌아보았다. 대공이 백작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백작은 다시 등을 돌려 조금 전보다 더 높게 검을 쳐들었다.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대공이 이를 악물었다. 그와 두 사람의 거리는 상당했다. 아무리 빨라도 백작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대공은 주저 없이 옆에서 나란히 달리고 있던 병사의 창을 빼앗았다. 그리고 그것을 제 조부부터 3대째 가문을 모신 충신을 향해 힘껏 던졌다.
대공이 던진 창은 백작의 활처럼 빗나가지 않고 목표물의 가슴팍에 정확히 명중했다.
가슴이 꿰뚫린 채로도 백작은 한동안 검을 놓치지 않았다. 그러다 뒤늦게, 그가 비틀거리며 팔을 아래로 떨구었다. 검이 맥없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백작이 다시 고개를 돌려 믿기지 않는 눈으로 대공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보는 그의 주군은 늘 빛나던 모습 그대로 서 있었다. 그는 그 모습을 더 자세히 보고 싶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시야가 자꾸 어두워졌다. 이명이 귓가를 왕왕 울렸다. 백작은 느릿느릿 대공을 향해 완전히 몸을 틀었다.
어서 일을 마무리해야 하는데. 주군이 영광스러워질 순간이 바로 눈앞에 있는데.
그러나 지금은 그보다 대공에게 예를 갖추는 것이 먼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할 수 없다는 예감이 그를 사로잡았다. 백작은 천천히 대공을 향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대공이 서둘러 두 사람을 향해 달려왔다. 그는 자신을 향해 마지막 인사를 올리고 죽은 심복에겐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그의 시선 끝엔 오로지 쓰러진 아란만이 존재했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그녀 한 명뿐인 것 같았다.
“폐하!”
대공은 제 목소리가 얼마나 간절한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아란의 귀에는 그 간절함이 닿지 않았다. 그녀는 완전히 넋이 나간 채였다. 백작의 끈적한 피가 바닥에 스며들고도 모자라 그녀의 옷과 손을 적셨다. 아란은 숨을 헐떡이며 그곳에서 도망치려 애썼다.
악몽 같은 기억이 그녀를 덮쳤다. 피로 얼룩진 바닥, 무력하게 지켜보아야 하는 자신, 그리고 태산처럼 제 앞에 우뚝 선 대공까지, 모든 것이 결혼식 때와 똑같았다.
“오지 마…….”
아란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뒤따라 달려오는 말발굽 소리에 대공은 그 속삭임을 듣지 못했다.
“오지 마……!”
아란이 비명처럼 외쳤다. 그녀는 간신히 몸을 반쯤 일으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바닥을 짚은 손이 피에 미끄러져 다시 우스꽝스러운 꼴로 처박혔다.
대공이 서둘러 아란을 안아 들었다. 그녀에게 묻은 피와 흙먼지가 손과 옷을 더럽혔지만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그는 더러워진 아란의 뺨과 손에 미친 듯이 입 맞췄다. 따뜻한 체온을 확인하자 거짓말처럼 내내 그를 괴롭히던 불안이 가셨다.
“이제 괜찮습니다, 폐하.”
그가 몇 번이고 되뇌었다. 그러나 겁에 질린 아란은 그 입술을 피하며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버둥거렸다.
그는 그녀가 그렇게 겁을 먹은 것이 백작 때문이라고만 여기고 더 가까이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새 까칠해진 얼굴이 안쓰러웠다. 다행히 크게 다친 부분은 없는 것 같았다.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정말 괜찮았다. 다시 황궁으로 데려가 정성껏 보필하면 상한 얼굴도 원래의 윤기를 되찾을 것이다. 그는 그녀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고 다시 찾은 온기를 만끽했다. 아란을 뒤쫓는 며칠간, 그는 상실감이 무엇인지 뼈저리게 느꼈다. 텅 비었던 내부가 이제야 다시 차오르는 것 같았다.
대공은 이제 확실히 알았다. 그녀야말로 제 마음에 들어올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한편, 대공의 품에 갇힌 아란은 얼어붙은 채 꼼짝도 못 하고 그의 가슴에 얼굴을 기댄 채 박동하는 심장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오늘따라 더 크고 불규칙했다. 머리카락과 뺨을 쓰다듬는 손길은 절박했다.
어쩐지 아란은 그 손길을 참을 수 없었다.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먹은 것도 없는데 속이 울렁거리며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았다.
“그만해……!”
아란이 발작하듯 대공을 밀어냈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강한 거부에, 꿈에서 깬 것처럼 대공이 무력하게 밀려났다. 아란이 눈물 가득 고인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왜 죽였어? 왜……!”
내가 아닌, 네 사람을 죽였어?
목 안쪽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그녀는 채 말을 끝맺지 못했다. 대공이 당연하다는 듯한 어조로 대답했다.
“폐하의 충복으로서 감히 폐하를 해하려는 자를 그냥 놔둘 수 있겠습니까.”
아란이 오열 섞인 웃음을 터뜨렸다. 그 단어는 차라리 사일러스 공작에게 더 어울리는 말이었다. 그러고 보니 공작은 어떻게 되었지? 뒤늦게 그를 떠올린 아란이 연달아 질문을 던졌다.
“사일러스 공은? 그를 만났어? 어떻게 되었어?”
며칠 사이 퍽 가까워진 듯, 그의 안부를 확인하는 아란의 모습에 대공이 이를 사리물었다. 한참 후에야 그가 툭 내뱉었다.
“그자는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러나 아란은 대공을 외면하고 그의 어깨너머를 응시했다. 그 모습이 대공의 눈엔 공작을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사일러스 공작이 때맞춰 나타났다. 공작은 대공의 품에 안긴 아란을 보고 그대로 멈춰 섰다. 그리고, 아란의 눈동자에 떠오른 반가움을 확인한 대공의 가슴 속엔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몰아쳤다. 그는 격렬한 분노로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저도 모르게 옆에 떨어진 검을 쥐었다. 조금 전 백작이 떨어뜨렸던 바로 그 검이었다. 하지만 지금 칼날은 아란이 아닌 공작을 향해 있었다. 아란이 날카롭게 숨을 삼켰다.
“안 돼!”
아란은 남은 힘을 전부 쥐어짜 그의 팔에 매달렸다. 대공은 눈에 불이 이는 것 같았으나, 우습게도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결국 검을 쥔 팔을 늘어뜨렸다. 이제 그는 그녀의 명령을 거절할 수 없었다.
“죽이지 마.”
“……예.”
대공의 목소리는 공손했으나, 그녀는 그 말을 믿지 못하고 한참을 더 그의 팔에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대공은 그녀를 뿌리치는 대신 다시 제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뒤에 선 남자에게 그 모습을 과시하듯 다정하면서도 진득하게. 아란은 완전히 진이 빠져 더 그를 밀어내지 못했다.
그는 무슨 마음으로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일까.
이젠 그 이유가 궁금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갈라진 입술을 열어 물었다.
“날 죽이러 온 게 아니야?”
“제 수하들이 벌인 일은 제 뜻이 아니었습니다.”
대공은 뻔뻔스럽게도 변명했다. 제 결백함을 밝히고 아란의 마음을 풀고자 했다. 이상했다. 분명 그는 평소와 다름없이 뻔뻔하고 당당했는데, 묘하게 비굴해 보였다. 아란은 손을 뻗어 그의 뺨을 만졌다. 별것도 아닌 접촉에 대공이 어깨를 움찔거렸다.
“……부황께서, 네 부모에게 죄를 지었어?”
아란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백작이 아니라 그의 입을 통해 확인하고 싶었다. 대공은 고개를 저었다.
“제 부모는 죗값을 치렀을 뿐입니다.”
그의 말투는 평상시와 같았다. 아란은 그가 언제나 이런 식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을 속여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눈앞이 아득해졌다.
그래서 그가 나를 이렇게 미워했구나. 정말로 부황이 그의 부모에게 죄를 지어서. 그리고 내가 그의 딸이라서.
그녀는 모든 것을 이해했다. 동시에 절망이 해일처럼 아란을 덮쳤다. 그를 이해하게 되니 그가 얼마나 망가져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그녀의 가족이 그의 부모를, 그를 망쳤다. 그리고 그는 그 대가로 그녀를 서서히 죽였다. 아란의 눈에 또다시 눈물이 고였다. 얌전해진 모습에 지나치게 안도하여 그녀의 속내를 읽지 못한 대공이 속삭였다.
“이제 괜찮습니다, 폐하. 제가 모든 것을 되돌리겠습니다. 이 세상 모든 영광을 폐하의 발치에 바치겠습니다.”
따스한 엄지손가락이 떨어지는 눈물을 훔쳤다. 그 온기를 느끼며, 아란은 애당초 자신이 그를 지켜준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알고 말았다. 죄인의 피를 타고났으니 그녀가 그에게 한 모든 일이 죄가 되었다. 대공이 그녀를 기만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그를 기만했다.
“에녹.”
그 이름을 들은 대공의 어깨가 굳었다. 그는 한순간 숨 쉬는 것도 잊었다. 그러면서도 홀린 듯 그녀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또 한 번, 그 이름으로 그녀가 자신을 불러주었으면 했다.
오래전 언젠가 그녀에게 이름을 불리웠을 때 느꼈던 마음속 일렁임의 정체가 사실은 너무나 큰 희열이었다는 것을 대공은 비로소 깨달았다. 너무 느리게 대답하면 아란이 영영 입을 다물까 봐, 그는 허겁지겁 대답했다.
“예, 말씀하십시오, 폐하.”
놀랍게도, 아란은 그의 바람을 들어주었다. 그녀가 다시 그 이름을 불렀다.
“에녹.”
“예, 폐하. 무엇이든 말씀해 주십시오.”
“나는 실패작인가 봐. 왜 난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을까. 너도, 황좌도……. 아무것도 지키지 못하고…….”
그녀는 대공이 본 것 가장 절망적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왜 그런 말씀을…….”
“너는, 우리는…… 아무것도 되돌릴 수 없어, 에녹.”
가냘픈 속삭임이 돌이킬 수 없는 선고 같았다.
“그러니까 이제 그만 날 놓아줘…….”
그리고 아란의 눈이 서서히 감겼다. 그 순간에도 눈물은 눈꼬리를 타고 하염없이 굴러떨어졌다. 대공은 무너지는 아란을 꽉 부여잡았다.
부상은 그리 크지 않았다. 체력이 다하여 정신을 잃은 것뿐이다. 그 증거로 그녀의 호흡과 맥박은 일정했다. 그러나 대공은 아란이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잡고 있어도 어쩐지 자꾸만 손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마침내 그녀가 축 늘어졌을 때, 그는 세상이 끝났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