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한창 황제를 추적하던 렌스 백작은 제 앞을 가로막은 사일러스 공작을 발견하곤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공작에게 인사를 했다. 공작은 인사를 받아주는 대신 그를 노려보았다.
“황제, 아니, 그 여자는 어디 있습니까.”
먼저 백작이 입을 열었다.
“경은 대공을 반역자로도 모자라 아예 찬탈자로 만들 셈인가?”
공작은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냉소적으로 되물었다. 렌스 백작의 얼굴이 험하게 일그러졌다.
“절 도발하지 마십시오, 각하. 아무리 각하라 해도 절 화나게 하신다면 안위를 장담할 수 없으니까요. 그러니 얌전히 물러나시지요. 그럼 각하와 다나르가 다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대공께서 다른 건 몰라도 사람 보는 눈은 없으신가 보군. 경처럼 아둔한 자를 심복이랍시고 두고 계셨으니.”
“대공 전하를 모욕하지 마십시오, 각하. 제 인내심이 바닥나고 있으니까요.”
백작의 위협에도 공작이 코웃음을 쳤다.
“글쎄. 과연 전하께서 그것을 원하실까. 장담하는데, 경은 실패할 걸세. 안될 일에 힘 빼지 말고 이제라도 돌아가는 걸 권하고 싶은데.”
최대한 시간을 끌며 공작은 초조하게 아란이 어디쯤 갔을지 생각했다. 예상보다 너무 일찍 뒤를 잡혔다.
하루만 더 시간을 벌었어도…….
공작이 속으로 탄식했다. 하루 더 백작의 발을 붙잡아 놓기에 그들은 수적으로 너무 열세였다. 이제는 아란이 놀라운 속도로 선착장에 도착해 배를 타거나, 아니면 대공이 몇 시간 안에 이곳에 도착해 상황을 종결하길 바라는 것밖엔 방법이 없었다.
그럼에도 공작은 아란을 위해 최대한 시간을 벌어 놓을 생각이었다. 조금이라도 그녀가 살아남을 가능성을 높일 수 있도록.
공작과 그의 병사들은 사투를 벌였지만, 결국 완전히 제압되고 말았다. 공작이 입술을 짓씹었다. 백작은 그 작은 승리를 기뻐하지도 않고 곧장 아란을 뒤쫓아 사라졌다.
그 모습에 공작이 거칠게 반항하며 제 말을 향해 달려갔으나, 백작의 병사들이 달라붙어 그를 바닥에 꿇리고야 말았다. 점차 멀어지는 백작의 등을 바라보며 공작은 절망에 차 몸을 늘어뜨렸다.
제발……!
그는 간절히 대공이 어서 도착하기만을 빌었다. 이렇게 그 남자를 기다리게 될 줄은 몰랐다. 기가 막혔지만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지금쯤 필사적으로 도망치고 있을 황제를 생각하면 조금도 웃을 수 없었다.
“제발, 전하……. 폐하를 살리려면 어서 오셔야 합니다.”
그가 애타게 대공을 부르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의 부름에 응한 것처럼, 멀지 않은 곳에서 다가오는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대공이라는 것을 알아챈 사일러스 공작이 반색하며 소리쳤다.
“대공! 이쪽입니다!”
그의 목소리에 당황한 군사들이 정말로 뒤이어 나타난 대공을 보고 놀란 기색이었다.
“전하! 어째서 여기에…….”
지금쯤 수도에 있어야 할 대공이 예기치 못하게 등장하자, 젊은 기사 한 명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째서 여기까지 왔냐고 물으려던 기사는 구르듯이 말에서 내려와 이쪽을 살피는 대공의 모습에 입을 다물었다.
대공은 눈앞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설명을 듣지 않아도 상황을 파악하기엔 모자람이 없었다. 공작은 붙잡혀 있었고, 아란과 렌스 백작도 보이지 않았다.
아직 추적 중인가? 혹은……, 목적을 마치고 돌아오는 중인가?
“폐하께선? 폐하께선 어찌 되셨나?”
한 번도 본 적 없는 대공의 낯빛에 렌스 백작을 따라왔던 군사들은 눈치를 보며 말을 아꼈다. 대공의 목소리는 침착했지만 얼굴은 본 적 없이 창백했고, 눈동자는 이상한 빛으로 번들거렸다. 그 때, 사일러스 공작이 외쳤다.
“뭘 하고 계십니까? 이럴 틈이 없습니다. 전하의 수하가 폐하의 뒤를 쫓은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서두르십시오!”
그 외침에 대공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래, 아란은 죽지 않는다. 자신이 그녀에게 삶을 선물할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영원히 고귀한 황제로 남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또다시 그녀를 따라가야 했다. 한순간도 눈을 붙이지 못하고 달려왔지만, 대공은 피곤한 줄도 몰랐다. 오로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황제의 모습만 눈에 선했다. 그는 자신이 아란에게 새 삶을 주게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 * *
그사이 아란과 병사는 숲을 벗어나 너른 들판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렌스 백작이 다시 따라붙었다는 것을 깨달은 아란은 심장이 저 아래로 추락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번엔 말발굽 소리가 지척에서 들릴 정도로 가까웠다.
공작은 어떻게 되었을까. 다른 병사들은?
그러나 뒤돌아볼 수 없었다. 그럴 겨를이 없었다. 아란은 입술을 깨물며 앞만 보고 달렸다. 그 때, 날카롭게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들리며 나란히 달리던 병사가 말에서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기겁한 아란이 고삐를 늦추며 그쪽을 돌아보려 했다.
“뒤돌아보지 마십시오! 몸을 낮추고 계속 달리십시오!”
그러나 그 전에 병사가 소리쳤다. 아란은 이를 악물며 그가 시키는 대로 했다. 귀 옆으로 화살이 몇 발이나 스쳐 지나갔다. 그것만으로도 힘이 풀려 금방이라도 낙마할 것 같았다. 어느새 아란은 고삐도 놓친 채 말의 목에 힘껏 매달렸다. 절대 뒤돌아보지 않았다.
자신을 도와준 사람들에게 전부 등을 돌리면서까지 그녀는 살고 싶었다. 구차하고 한심한 인생일지언정 버리고 싶지 않았다. 살아서 누린 것들, 누리지 못한 것들마다 미련이 철철 넘쳐흘렀다. 아란은 자신이 오열하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자꾸만 가쁜 울음이 나오는 건 숨이 차기 때문이고, 시야가 흐린 것은 떠오르는 태양에 눈이 부셔서 그런 줄로만 알았다.
렌스 백작 역시 나름 필사적이었다. 그는 저만치 앞서 달리는 작은 등을 보며 재차 활시위를 당겼다.
그러나 황제를 시해한다는 압박감 때문이었을까, 그의 화살은 좀처럼 목표를 맞추지 못했다. 한참 만에야 겨우 화살 한 발이 아란이 탄 말의 뒷다리를 파고들었다. 고통을 못 이긴 말이 날뛰며 아란은 낙마했다. 천만다행으로 그녀가 떨어진 곳은 부드러운 풀밭이라 큰 부상은 없었으나, 머리를 세게 부딪혀 어지러웠다.
도망쳐야 하는데.
아란은 다시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렌스 백작이 말에서 내려 다가왔다. 그를 올려다보는 녹색 눈에 절망이 가득 들어찼다.
“제법 애를 먹였지만 이제 정말로 끝이다.”
렌스 백작이 증오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백작의 눈에 아란은 전 주군에 이어 현 주군까지 망치려는 요물로만 보였다. 그가 검을 뽑아 높이 쳐들었다. 칼날이 더 이상 여명이라고 부를 수 없는, 선연한 햇빛을 받아 번쩍였다.
싫어……!
아란은 살고 싶었다. 아주 간절히. 그녀는 흐느낌처럼 내뱉었다.
“왜 이렇게까지……. 선양을 하라면 난 기꺼이 그리했을 것이다.”
제 말이 비굴하다는 것을 아란은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수치를 느끼지 못할 만큼 그녀는 절박했다. 백작의 얼굴에도 조소가 떠올랐다.
“선양이라고? 뻔뻔한 건 핏줄 탓인가? 하기야, 그 부모에 그 자식이 나오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
그가 사납게 웃으며 말했다. 아란은 그의 말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다. 섬약한 눈썹이 찌푸려졌다.
“무슨 말을…….”
그런 그녀를 보며 백작이 허망한 웃음을 흘렸다.
“그래,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겠지. 전 대공 전하와 대공비 전하의 억울함도, 주군을 잃고 떠돌아야 했던 우리의 원한도 말이오.”
아란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두려운 와중에도 그녀는 용기를 내어 자신이 아는 사실을 늘어놓았다.
“원한이라니, 반역을 일으킨 건 전 대공이었고 부황께선 그에 합당한 벌을 내렸을 뿐…….”
“반역? 그게 진짜 반역이라고 생각하는 거요? 단 한 번도 그 사실을 의심한 적 없는 건가?”
백작의 낯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아란은 여전히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백작의 깊은 분노는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전말을 알고 나면 당신이 하늘 아래 그 뻔뻔한 낯을 들고 있지 못할 거요. 나는 더 그 꼴을 볼 수 없으니 말하겠소. 당신 부모가 저지른 짓을 전부.”
아란은 귀를 막고 싶었다. 그의 말을 들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손을 올릴 수가 없었다.
“당신의 아비는 나의 전 주군을 질투하고 미워하였소. 그가 더 존경받는 군주라는 사실을 참을 수 없어 했지. 그러더니, 반역이 누명이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어.”
“뭐……?”
아란이 믿기지 않는 얼굴로 되물었다.
“반역이 아니었소. 두 분께선 무고하게 사형당하신 거요. 대공 전하께선 그 사실을 전부 알면서도 당신을 감쌌던 거고.”
백작이 다시 한번 힘주어 말했다.
“아니야…….”
넋이 나간 듯 부정하는 아란을 무시하고 백작은 재차 말을 이었다.
“죄 없는 신하를 내치고 가문을 멸문시킨 걸로도 모자라 그 아들까지 사지로 밀어 넣으려 하다니…….”
백작이 거기까지 말했을 때, 땅이 울리며 세찬 진동이 느껴졌다. 바닥에 엎드려 있던 아란이 그것을 먼저 느꼈다. 아란의 시선이 백작의 등 뒤를 향했다.
“아…….”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남자가 그녀를 향해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다.
“검을 거둬라, 백작!”
뒤늦게 대공의 외침을 들은 백작도 고개를 돌렸다. 대공의 모습을 확인한 백작의 얼굴이 아란과는 다른 의미로 희게 질렸다.
백작이 서둘러 대공을 외면하곤 다급히 아란 쪽으로 돌아섰다. 아쉽지만 제 원한을 말할 시간 따윈 없었다. 대공이 완전히 그를 따라잡기 전에 모든 일을 끝마쳐야 했다. 백작은 주군의 명을 무시한 채 검을 더 높이 쳐들었다. 복수심과 주군의 미래에 대한 기대로 그는 온몸을 떨며 전율했다.
“억울하게 돌아가신 선대공 전하와 대공비 전하의 원수를 지금 이 자리에서 갚겠다……!”
칼날을 피할 길 없는 아란은 눈을 질끈 감았다.
푹, 하고 날카로운 쇠붙이가 살을 파고드는 소리가 생생히 울렸다.
곧 뜨거운 선혈이 그녀의 몸을 타고 흘렀다. 그러나 고통은 없었다. 의아함을 느낀 그녀가 슬며시 눈을 떴다. 그리고 백작의 황망한 낯을 마주했다. 어째서인지 그가 갑자기 피를 왈칵 토했다. 이제 보니 피는 그의 가슴에서도 흘러나오고 있었다. 뜨겁고 질척한 피가 아란의 몸 위로도 쏟아졌다. 그녀의 몸에도 흐르는 그 붉은 체액이 닿은 부분이 화끈거리고 아팠다. 피가 아니라 피부를 녹이고 뼈를 부식시키는 산 같았다.
“아……아아…….”
백작이 칼을 떨어뜨렸다. 그는 무슨 말을 할 듯 입술을 달싹였으나 바람 빠지는 소리만 났다. 그렇게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그의 얼굴에 고통스러운 기색은 없었다. 다만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영문을 모르는 표정이었다.
소리가 나오지 않자 백작이 제 가슴으로 시선을 내렸다. 같은 곳을 보고 있던 아란이 멍청히 입을 벌렸다. 백작의 가슴 한가운데엔 굵고 날카로운 쇳조각이 튀어나와 있었다. 백작은 눈을 깜박였고, 아란은 비명을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