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마을에 도착한 기사는 곧 전서구를 보내왔다. 전서구의 발엔 반짝이는 반지가 묶여 있었다. 대공은 그 반지를 바라보았다.
눈부시게 빛을 발하는 그 반지는 어느 빈농이 팔러 나왔다고 했다. 한눈에 보아도 값비싸 보이는 것이 비천한 이가 지닐 물건이 결코 아니었다. 그 점을 수상하게 여긴 보석상이 곧바로 신고했고, 운 좋게 병사가 그것을 발견하여 대공에게 보낸 것이다.
대공은 그 반지가 누구의 손을 장식하던 물건인지 한눈에 알아보았다. 복잡한 기분으로 그는 반지를 손에 꽉 쥐었다.
그의 추측대로, 공작이 다나르로 가기 위해 택한 길은 육로가 아니었다. 그는 배를 타고 다나르로 들어갈 생각이었다. 확실히 배를 타면 육로보다 추적이 힘들 것이다. 게다가 다나르는 육로와 해로로 들어가는 길이 달라 미리 도착해 기다릴 수도 없었다.
그리고……. 오랜 승마에 지친 아란에게는 해로가 더욱 편안할 것이다.
그는 곧바로 말머리를 돌려 그 농부가 산다는 곳으로 향했다. 그 농부가 반지를 훔쳤든, 아니면 황제가 직접 주었든, 그녀가 그 농부와 마주친 건 자명했다.
영문도 모르고 갑작스레 대공 앞에 끌려온 농부는 가련할 정도로 몸을 덜덜 떨었다. 그러나 대공은 그의 사정을 배려해줄 생각 따윈 조금도 없었다. 그는 농부에게 반지를 보여주며 물었다.
“이 반지, 네가 팔았나?”
“예? 아, 아닙니다. 저는 모릅니다.”
사나운 그의 기세에 겁먹은 농부가 일단 잡아뗐다. 그러면서 속으로 후회했다.
이래서 돌아가신 아버지가 무슨 일로도 귀족들과 엮이면 안 된다고 했나 보다. 침대 위에서 반짝이는 것을 발견했을 땐 웬 횡재냐 했는데, 이제 보니 저승길 노자였던 게 틀림없었다.
게다가 눈앞의 사내는 앞서 머물렀던 두 귀족과 달리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냉혈한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농부는 일단 바닥에 납작 엎드려 빌기 시작했다.
“아이고, 나으리! 전 아무것도 모릅니다. 정말입니다. 가진 것도, 배운 것도 없는 무지렁이일 뿐이니 제발 아량을 베풀어 주십시오.”
발을 잡고 매달린 농부를 보며 대공이 미미하게 인상을 썼다. 이런 작자와 말싸움이나 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그는 매몰차게 농부를 뿌리치며 말했다.
“벌주려는 게 아니니 솔직하게 대답해라. 내가 원하는 정보를 준다면 합당한 보상을 받게 될 거다. 하지만 어쭙잖게 날 속이려 한다면 처벌을 받는 건 네놈 한 명으로 끝나지 않겠지.”
대공이 위협하듯 구석에서 떨고 있는 농부의 아내와 자식들을 힐끗 바라보았다. 농부는 이제 거의 울고 있었다.
“살려주십시오, 나으리! 다 말하겠습니다. 다, 말하겠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아무것도 모릅니다. 두 분께서 저의 집에 머문 건 사실이나, 금방 떠나시는 바람에 다른 것을 여쭤볼 겨를 같은 게 없…….”
“그분께서 언제 네 집에 머무르셨지?”
대공이 그의 말을 자르며 물었다.
“이틀, 아니, 아니. 하루하고 한나절 전입니다.”
하루하고 한나절. 확실히 아란과 거리를 좁혔다.
그는 다급해지는 마음을 붙들고 서둘러 가장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여자 쪽의 상태는 어땠나. 다치거나 아파 보이지는 않았나?”
농부는 필사적으로 여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피로에 지쳐 창백하긴 했으나 병자 특유의 냉기는 느껴지지 않았었다.
“피로해 보이긴 하셨는데, 딱히 병색이 있지는 않으셨습니다.”
농부의 대답에 대공은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서 이토록 안도가 되는지 모르겠다. 그는 재차 성급히 물었다.
“불편한 점을 말씀하지는 않으셨나?”
그가 낡고 비좁은 농부의 오두막을 돌아보며 물었다. 이런 가축우리 같은 곳에서 아란이 머물렀다고 생각하니 기가 막혔다.
농부가 고개를 저었다.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전 그분들과는 거의 대화를 나누지 못했습니다. 그나마도 그 여자분 옆에 있던 키 큰 남자분과 몇 마디를 나눈 게 다입니다.”
그 남자라 하면 아마도 사일러스 공작일 것이다.
대공이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그것만으로도 험악해 보여, 농부는 잔뜩 몸을 움츠렸다.
“자기들끼리는 서로 이야기하지 않던가? 뭐든……. 하다못해 중간에 어느 마을을 들른다는 이야기는?”
“그런 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애초에 엿들을 마음도 없었고요. 저는 그냥 그 두 분이 철없는…… 아니, 젊은 혈기에 사랑의 도피라도 하는가 싶어……”
농부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대공은 그 한마디에 기분이 바닥까지 추락했다. 농부는 삽시간에 서늘해진 기세에 눌려 뒷말을 잇지 못했다.
“…….”
그는 한순간 농부의 입을 후려치고 싶다는 충동에 빠졌으나, 아직 아란이 어느 쪽으로 향했는지 듣지 못했기에 참았다. 다행히 농부는 시간을 더 끌지 않고 아란 일행이 어느 방향으로 향했는지 일러주었다. 그것이 그의 목숨을 부지하게 했다.
대공은 농부가 알려준 방향으로 말을 몰았다. 렌스 백작은 육로로 갔으니, 자신이 서두른다면 그보다 먼저 아란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안도감이 들었다.
그러나 마냥 안도할 때는 아니었다. 얼마쯤 지나자 육로쪽 방향에서부터 온, 제 수하들이 지나간 흔적을 발견한 것이다. 막 패인 듯한 자국을 보니 다행히 그들이 지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였다. 전력으로 뒤쫓는다면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었다.
대공은 곧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올 거라고 자신을 달래면서도, 자꾸만 조급해지는 마음을 숨기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 * *
시간이 촉박하다는 것을 아란은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조급한 마음과 달리 그녀와 공작 일행의 속도는 점점 느려지고 있었다. 공작은 모르는 척 여러 핑계를 댔지만 실은 전부 아란의 체력 때문이었다. 제대로 쉬지도, 먹지도 못한 탓에 그녀는 거의 탈진 상태였다. 밤새 말을 달려도 모자랄 상황에 그들은 자꾸만 멈춰 쉬어야 했다.
“미안하네.”
또다시 공작이 말을 멈추게 하자 아란이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괜찮습니다. 쉰 만큼 따돌리면 그만이니까요.”
공작이 태연하게 말했다. 여태 그들이 렌스 백작의 추격을 피한 건 전부 공작 덕분이었다. 그는 보는 이가 신묘하다고 느낄 정도로 백작의 추적을 잘도 따돌렸다. 그 덕에 선착장은 이제 이틀 거리밖에 남지 않았다.
“이제 배만 타면 편히 쉴 수 있으실 겁니다.”
오히려 그는 짜증을 내는 대신 피로에 지친 그녀를 위로했다. 아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무 기둥에 머리를 기댔다. 백작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요 며칠 간은 여관이나 민가를 찾는 대신 숲에서 야영을 했다. 여름임에도 숲의 밤은 서늘했다. 아란은 모포를 목까지 끌어올리며 아마 자신은 죽을 때까지 야영에 익숙해지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원래대로라면 진작 도착했어야 했는데 나 때문에 자꾸 늦어지는구나.”
“불편한 곳으로 모셔서 오히려 제가 죄송할 따름입니다.”
공작의 사과에 아란이 고개를 저었다.
“불편한 건 공도 마찬가지 아닌가.”
공작의 얼굴 역시 며칠 만에 놀랄 만큼 초췌해진 채였다. 그 얼굴을 보면 아란은 불평을 한마디도 꺼내 놓을 수 없었다. 자신 때문에 공작은 하지 않아도 될 고생을 하고 있고, 자신은 그런 그에게 도움은커녕 짐만 더 지우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인내뿐이었다.
사일러스 공작이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야영이 불편해서가 아니라, 아란이 부르는 호칭 때문이었다. 그는 무엇을 말할 것처럼 입술을 달싹이다가, 결국 그만두었다. 아란은 보는 눈이 없는 곳에선 절대 그를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다.
그 사실이 못내 서운하지만 공작은 더 바라서는 안 된다는 걸 알았다. 지금 아란에게 그는 어디까지나 조력자에 지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마음을 드러내면,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의 곁을 떠날지도 몰랐다. 공작은 태연한 척 화제를 돌렸다.
“다나르에 도착하면 뭘 하고 싶으십니까?”
“글쎄. 실은 아직도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란이 조금 솔직한 속내를 털어놓았다. 무엇을 할 상황이 오긴 올까. 사일러스 공작은 대공이 그녀를 해치지 않을 거라 말했지만, 사실 아란은 그 말을 신뢰하지 않았다. 이제 그녀는 대공의 무엇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의 모든 것이 그녀를 기만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천천히 생각해보십시오. 우선은 폐하께서 뱃멀미를 하지 않으시길 기도해 볼까요.”
다시 기분이 우울해지려 했을 때, 공작이 농담을 건넸다. 그녀는 물끄러미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호의는 부황과 모후의 애정처럼 마냥 달콤하지 않았다. 외려 얹힌 것처럼 불편했다. 그러나 오라비들의 위로처럼 음흉하거나 대공의 자비처럼 잔인하지도 않았다. 불편하면서도 차분하고 따스한 느낌이었다. 아란은 살면서 한 번도 누군가와 이런 관계가 되어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건 무슨 사이라고 할까. 다른 황제들에게도 이런 신하가 있었을까?
어쩌면 이런 게 진정한 군신 관계일지도 모른다. 아직 공작을 완전히 신뢰하는 건 아니었지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의 충정에 보답할 길이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그러나 감상은 오래가지 못했다.
“군사들이 옵니다!”
멀리서 보초를 서던 병사 한 명이 허겁지겁 달려와 렌스 백작이 코앞까지 다가왔음을 알렸다. 그 말에 아란도, 사일러스 공작도 벌떡 일어났다. 병사의 말대로 저 멀리 횃불이 아른거리는 것이 보였다. 공작이 놀라 그대로 굳은 아란을 잡아당겼다.
“서둘러 떠나야 합니다.”
“그, 그래.”
뒤늦게 정신을 차린 아란이 급히 말에 올랐다.
그러나 이미 말도 사람만큼이나 지쳐 있었다. 열심히 달렸지만, 백작의 군사들과 거리가 점점 좁혀졌다.
“안 되겠습니다.”
공작이 갑자기 말을 멈추더니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그 목소리에 아란이 움찔했다. 추격당하면서도 내내 여유로운 태도로 아란을 안심시켰던 그였기에 정말로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이 더 와닿았다.
공작이 아란을 돌아보았다. 그 눈빛 역시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란은 그가 무슨 말을 할지도 모르면서 먼저 고개를 저었다.
“공.”
“제가 저들을 막을 테니 폐하께선 그사이에 도망치십시오.”
“어떻게 그런단 말인가. 여기까지 공이 아니면 오지 못했을 텐데, 공을 버리고 나 혼자 도망치라고?”
“전 괜찮습니다. 병사를 한 명 딸려 보내겠습니다. 그가 길을 안내할 겁니다.”
공작이 서둘러 짐을 뒤져 그의 인장이 찍힌 통행증을 꺼내 아란의 손에 쥐여주었다. 아란은 억지로 그것을 받아들었지만 선뜻 발을 옮기지는 못했다.
“그럼 공은 어떻게 되는 거지?”
불안하게 묻자, 그녀를 안심시키듯 공작이 미소 지었다.
“전 괜찮습니다. 저자들이 절 죽이지는 못할 겁니다. 저들의 목표는 제가 아닌 폐하니까요. 그리고 이래 뵈어도 공작이니, 섣불리 절 죽여 부스럼을 만들고 싶지는 않을 겁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아란이 걱정할 것은 공작이 아니었다. 위태로운 건 그녀뿐이었다. 아란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부디 조심하게.”
“예.”
그것으로 대화가 끝났다. 아란은 곧바로 달리기 시작했다. 이 산만 넘으면 선착장이 나온다고 했다. 반드시 배를 타서 살아남을 것이다. 아란은 지쳐 헐떡이는 말을 달래며 앞으로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