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하의 밤-67화 (67/146)

67화

아란은 자꾸만 감기는 눈을 억지로 뜨려고 했으나 생각대로 잘되지 않았다. 공작 앞에서 무방비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는 걸 알아도 잠의 유혹이 너무나 강렬했다.

그 사실을 눈치챈 공작이 물러나겠다는 인사를 올렸다.

간신히 답한 그녀는 그가 돌아서자마자 긴장이 풀렸다. 곧 등불이 꺼지듯, 의식이 한순간 까무룩 사라지며 체면을 차려야 한다는 생각도 지워졌다.

쿵, 하는 소리에 뒤를 돌아본 공작은 엎드린 채 어린아이처럼 조는 모습에 헛웃음을 지었다. 한편으로는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목이 불편해 보였다.

공작이 조심스레 손을 뻗어 침대 위에 그녀를 바로 눕혔다. 많이 고단했는지 타인의 손길이 닿았는데도 깨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침대에 눕자 기다렸다는 듯 몸을 축 늘어뜨렸다.

아란이 편히 잠들 수 있도록 신발을 벗기던 공작은 드러난 발이 제 생각보다 너무나 작아서 놀랐고, 그 작은 면적조차도 곳곳이 잔뜩 짓무르고 쓸려서 부어 있다는 것에 다시금 놀랐다.

그런데도 내색하지 않은 아란에 대해 마음이 저려오는 것을 느끼며, 그는 저도 모르게 그녀의 발을 살짝 쓰다듬었다. 그나마도 뒤척이는 움직임에 놀라 금방 손을 거두었지만.

밀짚으로 만든 침대에 옹송그리고 누워있는 모습은 황제라는 신분이 믿기지 않을 만큼 초라해 보였다. 그러나 공작은 그 초라함을 의식하지 못했다. 둥글고 고운 어깨, 아담한 목덜미만이 눈에 들어왔다. 고른 숨을 내쉬는 입술은 그새 거칠어져 각질이 일어난 채였지만, 그의 머릿속엔 온통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그저, 닿고 싶었다.

공작은 어쩌면 이대로 다나르에서 함께 머무르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제 그건 헛된 망상이라고만 할 수는 없었다. 대공의 뜻이 아니라 한들, 그의 수하들이 사달을 벌인 이상 그는 이제 황제를 묶어둘 명분을 잃었다.

이런 식으로 황제가 제게 오길 바란 건 아니지만, 그녀를 연민하는 마음 뒤에는 분명 저열한 기쁨이 있었다. 공작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바로 곁에 음험한 마음을 품은 사내를 두고도 그녀는 잘도 잤다.

콧날이 닿을 듯 거리가 가까워졌다. 규칙적인 숨결이 그의 뺨을 간질였다. 조금만 더 입술을 내리면, 그는 원하던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공작의 입술은 방향을 바꿔 색 옅은 머리카락을 향했다. 서늘하고 매끄러운 감촉이 입술에 닿았다.

그것만으로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분명 먼지를 뒤집어썼을 텐데 은은한 향기가 감도는 것 같았다. 그는 난생 처음 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한동안 그대로 숨을 죽였다. 그리고 잠시 후, 아란이 깨지 않도록 조용히 방을 나섰다.

다음날, 그들은 새벽처럼 길을 떠났다. 때맞춰 돌아온 농부는 고맙게도 아란이 간단하게나마 세수를 할 수 있도록 귀한 장작을 때서 데운 물을 내주었다. 세수를 마친 아란은 고마운 농부를 위해 손가락에 낀 반지를 하나 빼 침대 위에 올려두었다. 그것으로 농부의 어린 자식들이 한동안은 걱정 없이 배를 채우길 바라며.

그녀가 마당으로 나오자 이미 공작과 다른 병사들은 준비를 마치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최대한 빨리 나섰는데도 꼴찌라는 사실에 아란은 민망함을 느끼며 서둘러 말 위에 올랐다.

“한데, 다나르에 도착하기까지 호칭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계속 이전처럼 부를 수는 없으니까요”

“그것도 문제구나.”

공작의 질문에 아란이 고심에 잠겼다.

“이름은 안 되겠지요.”

공작이 은근슬쩍 사심을 담아 물었다. 그 말에 아란이 미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건 너무 갑작스러운데.”

사실 이런 상황에서까지 예의를 따지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 이름을 부르는 건 싫었다. 그걸 들으면 마지막으로 대공과 밤을 보냈을 때가 떠올랐다.

맞닿은 피부와 꽉 쥐어오는 손.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녀를 몇 번이나 가지면서, 그는 끈질기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었다. 마치 이 행위에 이름을 붙인다면 바로 그것이라는 듯이.

아란은 서둘러 머리를 흔들어 그의 기억을 떨쳐냈다.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공작은 머쓱함을 떨치려 어깨만 으쓱거렸다.

“그럼, 브린이라고 불러다오.”

브린은 아란의 어머니인 전 황후의 이름이었다.

“알겠습니다.”

대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란이 재차 말했다.

“나는 그대를 뭐라고 불러야 하지?”

이번엔 공작이 고민할 차례였다.

“음…….”

아란은 생각에 잠긴 그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실, 호칭을 바꾸는 정도로는 완전히 신분을 숨길 수 없을 것이다. 물정 모르는 아란이라도 그건 알았다. 당장 농부의 가족들만 하더라도 대번에 그들이 평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보지 않았나. 아란은 그게 공작 탓이라고 믿었다.

일단 그녀가 보기에도 그는 지나치게 귀족처럼 보였다. 살면서 만난 사람 대부분이 귀족이었으니 귀족다운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지난번 다나르를 방문했던 경험과 이번 일로 그의 분위기가 확실히 이질적이라는 건 인지했다. 옷차림이나 외모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리고 공작은 귀족들 사이에 있어도 유독 시선을 끄는 사람이었다. 대공과 마찬가지로.

도망쳤는데도 자꾸만 떠오르는 대공의 생각에 아란은 괴로웠다.

“그럼 헤시온이라고 불러주십시오.”

“헤시온?”

“제 이름입니다.”

“그대의 이름이 헤시온이었나……?”

“설마 모르고 계셨습니까?”

아란은 눈만 깜박였다. 후계 교육을 받은 형제들과 달리 그녀는 어릴 때부터 또래 귀족 몇몇을 빼면 교류가 없어, 가까운 사이가 아닌 귀족들의 풀네임까지는 몰랐다. 즉위 초에 중요 인사들의 이름을 외워두긴 했지만, 그들을 이름으로 부를 일이 없으니 점차 잊어버리게 되었다.

그러나 공작은 그녀가 제 이름을 모른다는 사실에 새삼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아란은 괜히 미안한 마음에 헤시온, 하고 한 번 더 중얼거렸다.

공작은 갑자기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저 의미 없는 중얼거림마저 달콤하게 들리는 걸 보면 자신은 정말 정신이 나간 게 분명했다. 그는 붉어지려는 낯을 숨기기 위해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그럼 이제 가실까요.”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아란 일행은 다시 목적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 * *

달아나는 사일러스 공작의 병사들을 한참이나 뒤쫓고 나서야, 렌스 백작은 목표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황제가 날아드는 화살을 저렇게 날렵하게 피할 수 있는 실력의 소유자였다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었다. 다시 한번 화살을 피한 여자가 유유히 백작을 돌아보았다. 건강한 빛깔로 그을린 얼굴에 선명한 비웃음이 걸려 있었다.

“아니다! 그쪽이 아니야! 속임수다!”

당황한 백작이 외쳤다. 그는 분노로 이를 갈았으나, 자신을 기만한 가짜 황제에게 징벌을 내릴 시간 따위는 없었다. 그는 그대로 저를 조롱하는 공작의 병사들을 뒤로한 채 말을 돌렸다.

“육로가 아니라 해로였군……. 방향을 바꿔라! 선착장으로 간다!”

유인당해 거리가 다소 벌어졌지만, 그럼에도 황제가 붙잡히는 건 시간문제였다. 대공을 위하는 사람은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았고, 황제를 위하는 사람은 한 손에 꼽을 정도이니 당연한 말이었다. 다만, 대공이 돌아오기 전까지 일을 마무리할 수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쥐새끼 같은 것!”

백작은 초조한 목소리로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이대로 대공이 돌아와 그의 손으로 일을 처리하게 된다면, 그의 주군은 찬탈자가 되고 만다. 그 전에 모든 일을 끝내야 했다. 반드시.

* * *

백작이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무렵, 대공도 아란을 추적하는 중이었다.

뒤늦게 사일러스 공작이 그녀를 데려갔다는 것을 전해 들은 그가 이를 악물었다. 황제가 탈출한 건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하필 지금 그녀 곁에 있는 사람이 공작이라는 사실이 미치도록 거슬렸다. 공작이 아란을 바라보던 눈빛이 어땠는지 떠올리자 당장 그를 끌어내려 푸른 눈을 파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무엇보다 지금 그녀가 가장 의지하고 있는 사람이 공작이라는 사실이 그를 견딜 수 없게 했다. 혹 그의 손길이 아란에게 닿은 건 아닌지, 애틋한 눈길이라도 주고받은 게 아닌지, 망상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만일 그녀에게 손끝 하나만이라도 댔다면 이번에야말로 아란의 우는 얼굴을 보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죽여버릴 거라고, 대공은 몇 번이고 다짐했다.

그러나 지금은 감정에 휩쓸릴 때가 아니었다. 렌스 백작보다 그녀를 먼저 찾아내려면 어느 때보다 냉정해져야 했다. 그는 터질 것 같은 살의를 억지로 억눌렀다.

제 수하들을 너무 믿은 것이 패착이었다. 과한 충정이 언제고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가능성을 늘 염두에 두었어야 했다. 그와 그의 수하들의 어리석음 때문에 아란의 목숨은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로웠다. 그 희미한 불이 꺼질까 두려워 대공은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그러나 대공은 희망을 놓지 않았다.

다행히 그의 신하들의 계획은 엉성하고 어설프기 그지없었다. 아란의 생사를 확인하고 이성이 돌아오자마자, 대공은 이 모든 사태가 급조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다른 것들은 전부 제쳐두고서라도 저항할 방도가 없는 황제가 도망친 것부터 제 수하들의 허술함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거기다 분하지만, 어쨌거나 그가 아는 공작은 그리 허술한 자가 아니었다. 렌스 백작이 아직 돌아오지 않는 것을 보면 그는 역시 아란을 찾아내지 못한 게 분명했다. 백작은 이런 상황에서 쉽게 흥분했고, 아마 지금쯤 공작의 술수에 말려 허둥거리고 있을 것이었다. 덕분에 승산은 대공 쪽으로 조금 더 기울었다.

육로를 통해 다나르로 향하고 있는 렌스 백작을 뒤쫓으려던 그는 제 뒷덜미를 휘어잡는 감각에 잠시 멈칫했다. 무언가가 마음에 걸리는 듯 불쾌한 기분이었다.

공작이 이렇게 뻔한 길로 아란을 이끌어 위험에 빠뜨릴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우습게도, 그는 감히 그녀를 마음에 품고 있으니 더 필사적일 것이다.

마음에 품었다고.

대공은 자신이 공작의 입장에서 생각하게 될 날이 올 거라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는 그저 제 주제도 모르고 눈부신 것을 탐내는 뻔뻔한 놈일 뿐이다. 그런, 남자로서의 흑심이 가득한 이가 할법한 생각을 제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그러나 지금은 어쩐지, 그의 머릿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내가 그 작자라면 어느 길로 향했을까. 비이성적인 직감과 논리가 합쳐져 대공의 머릿속에 다른 경로를 그렸다.

대공은 다나르로 통하는 해로 방향 근처 마을에 기사를 한 명 보냈다. 시간은 촉박했지만 작은 가능성조차 놓쳐서는 안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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