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하의 밤-66화 (66/146)

66화

백작이 혀를 찼다.

“그 여자는 네가 희생하면서까지 살릴 가치가 없는 자다.”

“…….”

“벙어리처럼 그러고 있지 말고, 무슨 말이라도 해보아라!”

결국 백작은 화를 이기지 못하고 벌컥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그래도 시녀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모든 일이 끝나면, 네 죄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시녀가 모든 것을 감수하겠다는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 일견 후련하게까지 보이는 그 모습이 백작의 신경을 거슬렸다.

백작이 차게 등을 돌렸다. 그의 뒤를 병사들이 따랐다.

“다나르로 간다!”

백작은 찜찜한 기분을 털어버리려 더 큰 목소리로 명령했다.

* * *

“추격이 붙었습니다!”

한참을 달리던 중, 주변을 살피던 병사 중 한 명이 외쳤다. 아란은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병사의 말대로 저 멀리 그들을 따라오는 무리가 보였다. 한눈에 보기에도 숫자가 많았다. 전투가 벌어진다면 필시 지고 말 것이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속도가 무척 빠릅니다. 이대로라면 붙잡힐 겁니다. 일단 저희가 저들을 따돌리겠습니다.”

병사가 재차 말했다.

“알았다.”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돌아보는 그녀에게 공작이 태연한 어조로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 병사들은 이런 일에 능숙하니까요. 전원 모두 다나르까지 무사히 도착할 겁니다.”

“맞아요. 저희 실력을 믿으세요, 폐하.”

아란으로 분장한 병사가 그녀를 보며 씩 웃었다. 그러나 아란은 웃음을 되돌릴 수 없었다. 병사는 그 사실을 별로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우선, 그들은 적들의 시야에서 벗어나기 위해 빽빽이 자라나 있는 나무들 틈 사이를 이리저리 달렸다. 그러다 공작이 신호를 내린 순간부터 두 조로 나누어 달렸다. 먼저 출발한 쪽은 아란으로 변장한 병사가 있는 조였다. 그사이 공작은 아란을 데리고 숨었다.

변장한 병사를 본 대공의 수하들은 별 의심 없이 그들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확인한 후에, 공작은 아란을 데리고 다른 길로 들어섰다.

한참 달리고 난 후에 그들은 완전히 추격을 따돌렸다는 것을 확신했다. 곧 다른 추격이 붙겠지만, 한동안 시간을 벌긴 했다.

“이걸로 한시름 놓았…….”

안도한 얼굴로 아란을 돌아보던 사일러스 공작은 거의 쓰러질 것 같은 그녀의 창백한 낯을 보고 말끝을 흐렸다.

“괜찮으십니까, 폐하!”

아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걱정은 말게. 그리고, 그렇게 크게 날 폐하라고 부르면 저들을 따돌린 보람이 사라지지 않을까. 이젠 폐하라고 불릴 자격도 없고 말이야.”

“아.”

공작이 뒤늦게 눈을 깜박였다. 그 모습이 꽤 우스웠지만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들은 사람은 없는 것 같으니 다음부터 주의하면 되겠지.”

그렇게 말하는 와중에도 아란의 얼굴은 점점 희게 질려가고 있었다.

“쉬었다가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란이 고개를 저었다.

“지체하면 금방 따라잡힐 거야. 어서 한걸음이라도 더 가야지.”

“당장은 찾지 못할 겁니다. 무리하시다 탈진하시기라도 하면 일정이 더 늦어집니다.”

그 말에 별수 없이 아란은 고집을 꺾고 공작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이미 수도에서 멀어져 인적이 드문 시골로 들어선 탓에 마땅한 여관이나 숙소가 없었다. 그 탓에 그들은 민가에서 신세를 지게 되었다.

가난한 농부는 아란과 공작의 행색을 보고 귀한 분들이 머물 곳이 못 된다며 손사래를 쳤지만, 공작이 내민 금화를 보고는 결국 마음을 돌렸다.

농부는 고맙게도 자신의 집에서 가장 좋은 방을 내어주었다. 아란이 혼자 그 방을 쓰고, 공작과 남은 병사들은 헛간에서 자기로 했다. 그래 봐야 밀짚을 넣어 만든 침대가 있다는 것 말곤 헛간과 거의 차이가 없었다.

아란은 조심스레 방안으로 들어섰다. 낮은 천장 때문에 한껏 목을 숙여야 했다.

태어나 이런 곳은 처음이었다. 방 안엔 의자도, 테이블도 없었다. 아란은 별수 없이 낡은 침대에 걸터앉았다. 침대는 황궁의 것처럼 푹신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불평을 해서는 안 되는 처지였다. 짚으로 채운 침대를 신기하게 눌러보고 있는데, 농부의 아내가 이 빠진 사발에 묽은 수프를 담아 가져왔다.

“이것 좀 드셔보세요. 귀한 분께 드릴 건 못되지만 그래도 뭐 좀 드셔야 할 것 같아서.”

생각지도 못한 호의에 아란은 놀랐다. 호의를 베풀고도 도리어 어쩔 줄 모르는 것 같은 여자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는, 아란은 수프 그릇을 받아들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건더기가 떠다니는 묽고 희끄무레한 수프는 무슨 맛인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예의가 아닌 건 아나, 그녀는 저도 모르게 수저로 수프를 한번 휘저었다. 다행히 아란에겐 그 건더기의 정체가 무엇이냐 물어보지 않을 만큼의 분별은 있었다.

그녀는 억지로 수프를 한 입 넣었다. 밍밍하여 별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맛보다도 식욕이 없는 게 더 문제였다. 전날부터 제대로 먹지도 못했는데 얹힌 것처럼 속이 답답했다. 그래도 아란은 부지런히 수저를 놀렸다. 그나마 덜 짐이 되려면 최대한 체력을 비축해 두어야 했다. 그녀가 싹 비운 그릇을 내밀자 비로소 농부 아내의 얼굴에 안도가 떠올랐다.

고맙다고 하고 싶은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아란이 망설이는 사이 그녀는 빈 그릇을 들고 나가버렸다.

식사를 마치고, 아란은 멍하니 벽에 기대어 생각에 잠겼다. 앞날에 대한 걱정으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러나 복잡하기만 할 뿐, 묘안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가 한숨을 푹 내쉬었을 때, 문밖에서 공작의 목소리가 들렸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비틀린 문설주 때문에 다 닫지 못한 문틈으로 공작의 잘생긴 얼굴이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조금 웃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래.”

사실 누구와도 대화하고 싶지 않았지만, 눈이 마주친 상황에서 돌아가라고 하기도 민망해 아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방의 천장이 낮은 편이라, 키가 훤칠한 공작은 한껏 몸을 숙여야 했다. 대공 앞에서도, 그녀 앞에서도 묘하게 꼿꼿한 그가 몸을 웅크리는 모습이 퍽 우스웠다.

좁은 방에 남자가 들어오니 방 안이 꽉 찬 것 같았다. 아란은 반사적으로 주춤주춤 몸을 뒤로 물렀다. 공작은 그걸 보면서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다.

“식사는 괜찮으셨습니까?”

“그래.”

거짓말이라는 걸 아란도, 공작도 알았으나 서로 눈감아 주었다.

“앞으로의 계획은 생각해 보셨습니까.”

“……아직.”

“괜찮습니다. 천천히 생각해 보십시오. 사실 다나르로 간 후에 고민하셔도 그리 늦지는 않을 겁니다.”

아란은 입을 꾹 다물었다. 생각이 많아 보이는 모습이라, 공작은 어떡하면 그녀를 다나르로 무사히 데리고 갈 수 있을지 고민하느라 덩달아 말을 멈췄다.

주변이 적막해지자 좁은 방 안에 그들의 숨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문득 그녀는 공작이 너무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경황이 없어 잠시 미뤄두고 있었지만, 그는 그녀에게 고백한 사내였다.

그걸 깨닫는 순간, 아란은 이 자리가 너무나도 불편해졌다.

“공작. 그대는 사실 이렇게까지 해줄 필요가 없어. 난 이제 황제도 아니고, 가진 것도 없으니까. 그대에게 이득이 되는 건 아무것도 없을 거야. 더구나 그대가 나를,”

아란은 잠시 말을 멈췄다.

“나를…… 마음에 두고 있다면 더욱 이래선 안 되지 않나.”

공작은 깨달았다. 그녀는 여기서 그를 밀어내려고 하는 것이다. 받아줄 수 없는 상대에 대한 예의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차라리 상황이 이러니 어쩔 수 없다며 더 이기적이고 약게 굴어도 좋을 텐데……. 그의 생각보다 그녀는 애정이라는 감정에 대해 모르지 않았고, 또한 진지했다.

그들의 시작은 좋지 않았고, 적어도 그녀는 지금 이 상황에서는 자신에게 남자로서의 여지를 주지 않을 것 같았다. 공작이 예리하게 제 가능성을 따져보는 사이, 아란은 결정한 듯 말을 이었다.

“이렇게까지 도움을 받아 놓고 염치없으나 내일…….”

공작은 서둘러 그녀의 말을 끊고 말했다.

“이전에 제가 섣부른 말씀을 드려 폐하를 곤란하게 한 것에 대해 많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그는 감정을 자각하기 이전에 황제를 대했던 제 눈빛을 떠올리려고 애를 썼다.

다행히 아란은 그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폐하를 흠모하는 제 마음은 거짓이 아닙니다.”

“그…….”

직접적인 고백에 놀란 아란이 움찔거렸다.

“여자가 아닌, 주군으로서 폐하를 흠모합니다. 폐하께서 국민과 나라를 생각하시는 마음이 얼마나 깊은지 알고 있습니다.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폐하의 의지를 존경합니다. 부디, 신하로서 폐하를 생각하는 제 충정을 헤아려주십시오.”

아란이 살짝 비껴두었던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맞춰왔다.

황제로서 실패했다고 생각하고 있던 그녀에게 공작의 말은 더없이 놀랍고 또한 기꺼운 것이었다.

그의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 혹은 다른 꿍꿍이가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진심이라고 믿고 싶었다.

아란은 손에 낀 인장을 만졌다. 그녀가 흔들리는 것을 포착한 그는 서둘러 못을 박았다.

“제가 신하의 예를 다할 수 있도록, 잠시만이라도 다나르에 머물러 주십시오.”

“…….”

무언의 승낙이었다.

혹여라도 그녀가 맘을 바꿀까 싶어 공작은 서둘러 다른 화제를 꺼내 들었다.

“며칠간 많이 놀라셨지요.”

“그렇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전부 나의 무능함이 불러온 일이니 누굴 탓할 수는 없겠지.”

아란은 담담한 척 대답했지만 실은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제 상황을 떠올리자니 벼랑 앞에 선 것처럼 아득하기만 했다.

어둡게 침잠하는 눈동자를 공작이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공작은 황제의 웃는 얼굴을 좋아했지만, 지금처럼 언뜻 드러난 우울함이 더 마음을 잡아당겼다.

“마음이 복잡하시겠지만, 내일 일찍 떠나야 하니 오늘은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주무십시오.”

“그리 피곤하지 않아. 늦지 않게 일어날 테니 너무 걱정은 말게.”

하지만 그 말이 무색하게 아란은 곧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억류되어 있는 내내 한숨도 자지 못하다가 조금 긴장이 풀리니 잠이 해일처럼 몰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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