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하의 밤-65화 (65/146)

65화

두 사람이 바닥에 박힌 돌을 따라 겨우 산을 타고 내려왔을 땐 이미 밤이 걷히고 동이 트려는 시각이었다.

“정말 도시가 나왔군요. 대단하십니다.”

공작이 순수하게 감탄했다. 이런 일로 칭찬을 받는 것도 우스워서, 아란은 못 들은 척 눈만 깜박였다.

“자, 이제 가시지요. 날이 어두워 다행입니다. 쉬지 않고 말을 달리면 이레 안에 다나르에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공작의 말에 아란이 고개를 저었다.

“짐은 다나르로 가지 않겠네.”

“예?”

“짐을 데려가면 대공이 추적해올 것이 분명해. 그러면 공과 다나르 시민들이 위험해지지 않겠는가. 죄 없는 사람들이 화를 당하게 둘 수 없네.”

“그럼 어디로 가시려고 합니까?”

“레탄 땅으로 갈까 하네.”

그곳은 원래 아란의 외가였던 아모스 공작가가 다스리던 지역이었다. 그녀의 결혼식 날 아모스 공작가 역시 숙청당하며 지금은 주인이 바뀌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그곳 외엔 달리 갈 곳도, 아는 곳도 없었다. 아란은 그곳을 통해 국외로 망명할 생각이었다. 신분도 다 버리고, 그냥 혼자 숨어 살고 싶었다.

그러려면 돈이 필요하겠지.

무엇을 해서 돈을 벌어야 할까. 아란은 제 흰 손을 바라보았다.

태어나 펜대와 보석 말고는 무거운 것을 들어본 적 없던 손은 그저 매끈하고 부드럽기만 했다. 하다못해 그녀는 다른 귀족가의 여식들처럼 수를 놓거나 그림을 그리고, 악기를 다루는 재능조차 없었다.

황족이라는 배경을 걷어내니 이렇게 무력할 수가 없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껏 그녀가 배우고 공부한 것은 전부 무용지물이었다. 심지어 얼마 전까진 돈을 벌어야 한다는 개념조차 몰랐다. 순행에서 야시장에 들르지 않았다면 지금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녀는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였는지 실감했다.

“너무 무모한 일입니다.”

공작이 말했다. 아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하지만 이젠 황제도 아닌데, 언제까지 다른 사람들에게 기대 살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나.”

아란은 현실을 깨우쳤다. 스스로 황위를 버리고 도망쳤으니 이제 그녀는 더 이상 황제라고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대공이 황위에 오르는 순간부터는 황족도 아니었다.

딱히 혈통이 아쉽지는 않았다. 애초에 다른 사람을 위해 버릴 수도 있던 혈통이었다. 결국은 그렇게 되지 못했지만.

아란은 자꾸만 움츠러들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살고 싶어 황궁을 나왔으니 이제 뭐든 해야 했다.

“걱정은 말게. 설마, 이렇게 넓은 대륙에 내 몸 하나 숨길 곳이 없겠는가.”

아란이 제법 씩씩한 어조로 말했다. 공작은 그녀의 허세를 눈치채지 못한 척하며 물었다.

“레탄으로 가신 후에 계획은 있으신 겁니까?”

기껏 용기를 낸 것이 무색하게, 그 한마디에 아란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공작이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일단은 저와 함께 가십시오. 어차피 폐하께서 다나르로 향하지 않으셔도 전 이미 폐하를 빼돌린 죄목으로 그들의 추격을 받게 될 겁니다. 그리고, 레탄은 이미 폐하와 연이 끊어진 지방이니 그리로 가신다 한들 별다른 수가 생기지는 않을 겁니다.”

조목조목 내놓는 그의 말에는 반박의 여지가 없었다. 그럼에도 망설이는 그녀를 향해 공작이 계속 말을 이었다.

“폐하의 뜻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지금은 준비가 되어있지 않아 생각하신 계획을 실행하기 힘드실 겁니다. 계속 다나르에 머무시라는 뜻이 아닙니다. 도중에라도 이후 행선지가 결정되면 그곳으로 가실 수 있도록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공작의 말은 무척 달콤하게 들렸다. 그러나 아란은 그에게 더 짐을 얹을 수 없었다.

대공은 곧 돌아올 것이다. 자신이 다나르로 향했다는 걸 그가 알면 어떻게 나올지 상상이 잘되지 않았다. 다나르가 아무리 부유하고 강해도, 대공의 병력을 막아낼 정도는 아니라는 걸 그녀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가,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공작은 아란이 말하는 ‘그’가 누구인지 굳이 묻지 않았다. 대신 그는 고민에 잠겼다.

이번 일을 벌인 사람이 대공이 아닐 확률이 크다는 사실을 굳이 그녀에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이대로 황제가 영영 대공과 척을 지기를 바랐다. 그러나 말하지 않으면 그녀는 계속 고집을 피울 것이다.

“다나르는 괜찮습니다. 대공은 폐하를 공격하지 않을 겁니다. 물론 다나르 역시도요.”

공작이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대공이 반역을 꾀한 게 아니라면, 다시 황제를 복권할 생각이 있다면 그녀와 그녀가 있을 다나르를 공격해서는 안 되었다.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한 아란이 물었다.

“그것을 어찌 확신하지?”

“이번에도 감입니다.”

아란은 그의 말에 어떻게 반응할지 몰라 잠시 침묵했다.

“……그대의 감이 맞으면 좋으련만, 그럴 일이 있을까.”

대답하는 황제의 목소리엔 자신이 없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대공이 자신을 해칠 거라고 믿고 있었다. 공작은 대공이 황제의 신뢰를 완전히 잃었다는 사실에 조금 기뻐했다.

아란은 아란대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확실히 공작은 예리한 직감을 가졌지만, 아란은 공작이 틀렸을 거라고 생각했다. 대공은 절대 그녀가 마음 편히 달아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건 그간 대공을 상대하며 겪은 경험에서 우러나온 확신이었다.

“아무튼, 수도 근처는 위험합니다. 대공이 돌아와 상황을 종결짓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황궁이 뒤집혔으니 다시 이전으로 돌아오려면 최소 두 달은 걸릴 겁니다. 그때까지만이라도 저와 함께 이곳을 피해 계십시오.”

“…….”

아란은 너무 미안해서 그의 제안을 수락하지도 못했다. 그녀의 마음을 읽은 듯 공작이 부드럽게 그녀를 잡아끌었다. 아란은 그를 따라가면서도 고집스레 말했다.

“하지만 다나르까지 가지는 않을 거야. 중간에 적당한 행선지가 생각나면, 그때 그대와 헤어지도록 하겠네.”

“알겠습니다. 저도 함께 다른 계획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정말 서두르셔야 합니다. 어디로 가시든, 해가 뜨기 전에 수도를 탈출해야 하니까요.”

두 사람은 어둠을 틈타 은밀히 움직였다. 그리고 황궁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대기 중이던 공작의 병사들을 만났다.

“아니, 전하. 도대체 황궁 안에서 무슨 일이 있던 겁니까? 밤새 이런 난리가 없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말입니다.”

공작의 병사 중 가장 신분이 높아 보이는 자가 물었다. 아란은 그 말에 저도 모르게 황궁이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황궁은 대낮처럼 불이 환히 밝혀져 있었고, 소란스러운 소리가 바깥까지 들렸다. 그리고 그녀는 바깥에서 그 소란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제야 제가 저곳에서 도망쳤다는 것이 제대로 실감 났다.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들어라. 일단 서둘러야 한다.”

아란이 몸을 떨자 그 이유를 오해한 공작이 겉옷을 벗어 그녀에게 덮어주었다. 병사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공작의 옆에 서 있는 아란을 바라보았다.

공작의 깍듯한 태도로, 병사들은 그녀의 정체를 어렵지 않게 짐작했다. 병사들이 그녀에게 서둘러 예를 갖추려 했다. 왜 황제가 이곳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밤새 시끄럽던 황궁을 보면 그녀의 신변에 문제가 생긴 게 분명했다.

“되었네. 인사를 할 상황도, 받아줄 상황도 아니니 마음으로 대신하지.”

아란이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추격이 붙을 테니, 미리 대비해야겠다.”

사일러스 공작이 말했다. 그들은 여차하면 두 조로 나누어 갈라질 준비를 했다. 병사 중엔 아란처럼 호리호리한 체구의 여자가 있어, 그녀가 아란으로 분장하기로 했다.

병사는 급히 준비해온 드레스를 갑옷 위에 대충 걸쳤다. 머리카락도 두건으로 가렸다. 어설픈 모습이었지만 멀리서 보면 얼핏 구분하기 힘들었다.

“어때요? 폐하와 비슷한가요?”

불안한 아란을 달래주고 싶었는지, 드레스를 입은 병사가 장난스레 물었다.

“짐……, 아니, 나보다 멋지구나.”

아란이 쓰게 웃으며 맞장구쳤다.

“준비가 다 되었으니 이제 출발하시죠.”

공작이 재촉했다. 아란은 말에 올라 박차를 가했다. 그러면서도 연신 황궁을 돌아보았다. 언젠가 떠날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런 방식이 될 줄은 몰랐다. 평생 나고 자란 곳을 뒤로한 채 떠나야 하는 상실감이 왈칵 밀려왔다.

이제 그녀는 정말로 한 명의 무력한 여자가 되었다. 아란은 입술을 깨물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말 고삐를 틀어쥔 손엔 아직도 황제의 인장이 끼워져 있었다. 입맛이 쓰디썼다.

그래도 황제로 즉위한 동안엔 조금이라도 나라에 보탬이 되고 싶었다.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실패했지만 말이다.

대공에게 모욕을 당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녀는 정말 좋은 군주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이제 와 생각해 보니 국가와 민생에 도움이 되고 싶다는 건 전부 핑계였을지도 몰랐다. 비굴한 방식으로 목숨을 부지한 만큼, 그 모든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자신이 살아남을 가치가 있었다는 걸 자신에게 증명하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그럼 앞으론 무엇으로 날 증명하며 살아야 할까.

갑자기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북받쳐 눈물이 나려 했다. 그러나 공작과 병사들 앞에서 눈물을 보일 수는 없어, 아란은 억지로 울음을 삼켰다.

* * *

아침이 되어서야 대공의 수하들은 황제가 완전히 황궁을 빠져나갔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 사실을 깨달은 렌스 백작이 길길이 날뛰었다.

“여우같이 잘도 빠져나갔군!”

그가 책상을 거칠게 내리쳤다. 황궁은 진작 폐쇄했는데, 도무지 어딜 통해 나갔는지 알 길이 없었다. 다만 그녀가 향한 곳을 추측할 수는 있었다. 어제 입궁했던 사일러스 공작 역시 황제가 사라진 이후에 감쪽같이 모습을 감추었으니, 분명 그가 황제와 함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두 사람의 목적지는 아마도 다나르가 될 것이다. 일부라고는 해도 대공의 병력을 상대할 수 있는 도시는 그곳뿐이었다.

하필이면 사일러스 공작이 끼어들 줄이야.

“이럴 줄 알았다면 만나는 순간 곧바로 목을 벨 것을.”

황제의 미려한 얼굴을 떠올리며 백작이 이를 갈았다. 괜히 이후 트집잡히지 않도록 서류상으로나마 절차를 따른답시고 시간을 끌었다가 일을 망치고 말았다.

분노를 삭이던 그는 심문하던 시녀를 노려보았다. 시녀의 얼굴은 반나절 만에 몰라보게 핼쑥해져 있었다.

“왜 그런 짓을 했느냐, 로지나.”

시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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