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하의 밤-64화 (64/146)

64화

“…….”

“여전히 폐하가 밉지만, 어쨌거나 폐하께선 제 동생의 은인이기도 하세요. 그리고 제 부모와 오라비를 죽인 사람이 폐하인 것도 아니고요. 그래서 계속 망설이고 있었지만……. 역시, 이런 식으로 죽게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짐을 풀어주면 그대는 처벌을 면치 못할 텐데…….”

그녀를 제압하고 도망칠 생각까지 했으면서, 막상 일이 이렇게 되자 아란은 머뭇거렸다. 그녀가 답답한지 시녀가 벌컥 화를 냈다.

“정신 좀 차리세요. 지금 폐하께서 남 걱정하실 때인가요? 그렇게 마음이 약하니 지금 이 사달까지 난 거 아니에요! 마음 바뀌기 전에 어서 제 옷으로 갈아입고 이곳을 나가세요!”

시녀는 미리 준비한 천으로 아란의 머리카락도 꼼꼼하게 가려주었다. 그녀가 무엇을 각오했는지 아는 아란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미안하구나.”

“제게 미안한 마음이 드셨다면, 제 행동이 헛되지 않게 잡히지 마세요. 아셨죠?”

시녀가 평소처럼 다정한 어조로 아란을 타일렀다. 그제야 아란은 자신이 그녀의 이름도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름을 묻기도 전에 시녀가 창고 뒷문을 열고 힘껏 아란의 등을 떠밀었다.

“얼른 가세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시녀가 다시 창고 문을 닫았다. 멍청하게 그 문을 바라보던 아란은 곧 정신을 차리고 시녀가 알려준 곳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머릿속에는 아직 해소되지 않은 질문이 남아 있는 채였다.

누가 날 돕는다는 말이야?

다행히 창고 뒤편은 어릴 적 아란이 곧잘 오갔던 곳이라 어렵지 않게 길을 찾을 수 있었다. 그곳에서 의외의 인물을 발견한 그녀의 눈이 커졌다.

“사일러스 공작……? 그대가 어떻게 이곳에……?”

아란을 본 공작이 허둥지둥 그녀에게 다가왔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어디 다치신 곳은 없습니까?”

그는 저도 모르게 아란에게 손을 뻗어 상처가 난 곳이 없는지 확인하려 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아란이 반사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제야 제 무례를 깨달은 공작이 서둘러 팔을 내렸다. 그는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일단 황궁을 나갈 길을 찾아야 합니다. 나가기만 하면 가면 제 병사들이 있으니 다나르로 함께 가시지요.”

“나를 도울 자가 그대였구나.”

아란이 중얼거렸다.

* * *

“여긴 어떻게 왔지? 수도에 발 들이지 말라 했을 텐데.”

타박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화난 목소리는 아니었다. 사일러스 공작은 그 사실에 내심 안도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녀의 기분을 신경 쓰는 게, 확실히 자신도 제정신은 아니었다.

그는 오랜만에 보는 황제가 기억보다 야위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핼쑥해진 모습이 못내 안쓰러웠다.

“하지만 신하 된 도리로 어찌 주군이 위험에 빠질지도 모르는 상황을 외면할 수 있단 말입니까.”

신하라는 단어가 유독 아란의 귓가에 울렸다. 그녀는 울컥했다.

그래도 지난 1년이 완전히 헛된 시간은 아니었나 보다. 이름 모를 시녀도, 사일러스 공작도, 자진하여 도와줄 신하가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고도 뭉클했다. 동시에 그 사람들이 곤란해지지 않도록 도울 수 없는 제 처지가 원망스러웠다.

“그런데, 짐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공이 어떻게 알았지?”

치미는 감정을 눌러 삼킨 그녀가 침착한 척 물었다. 대공에게 너무 당해서인지, 공작의 말을 쉽사리 믿을 수 없었다.

“그냥 감이었습니다.”

“감이라고?”

“예. 로아크 대공도 그렇지만, 그의 수하들은 더 믿을 수 없는 자들이니까요. 그런 자들이 수도로 몰려왔으니 심각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말해도 설득력 없는 대답이라, 공작이 조금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아란 역시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그 말이 사실이라면, 공작의 직감이란 정말 놀라운 것이었다. 수도 한가운데에서도 아무 낌새도 눈치채지 못하고 마냥 태평했던 저를 생각하면 더더욱 그랬다.

예상치 못한 자를 만난 놀라움과 의심으로 선뜻 따라나서지 못하는 그녀를, 공작이 재촉했다.

“지체 말고 어서 황궁을 빠져나가야 합니다. 화를 내셔도 좋으나, 일단은 저를 따라와 주십시오.”

황궁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말에는 아란도 동의했다. 사일러스 공작의 말대로, 지금은 그가 그녀의 명을 거역했다는 사실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곧 아란이 사라진 것을 대공의 수하들이 눈치챌 것이다. 두 사람은 서둘러 통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이 통로 밖으로 나왔을 땐, 이미 황궁 밖으로 통하는 길이 전부 대공의 병사들에 의해 폐쇄된 후였다.

“놈들이 생각보다 빠르게 움직였군요.”

공작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멀지 않은 곳에서 군사들이 두 사람을 찾아 돌아다니는 기척이 들렸다. 아직은 괜찮지만 곧 그들이 숨어있는 통로도 곧 들킬 것이다.

그렇다고 무력으로 돌파할 수도 없었다. 공작의 병력은 황궁 밖에 있는 데다, 우선 수적으로 너무 열세였다. 게다가 무력충돌이 일어나는 상황에서 황제는 짐이 됐으면 되었지 도움이 될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이를 어쩐다.

사일러스 공작은 초조한 얼굴로 두 사람이 왔던 길을 돌아보았다.

지금 상황에서 이상적인 해답은 대공이 황궁에 도착할 때까지 황궁 안에 숨어 버티는 것이었다. 대공만이 이 사태를 종결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언제 도착할지 모르는 사람을 기다리는 사이, 황제의 목을 치기 위해 혈안이 된 노백작은 어떻게서든 그녀를 찾아낼 것이다.

그가 고민하고 있을 때, 아란이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손끝에 서늘한 체온이 닿는 순간 공작은 하마터면 펄쩍 뛰어오를 뻔했다.

“이리로. 짐이 다른 길을 알아. 좀 험하긴 하지만.”

그녀가 물끄러미 공작을 올려다보며 속삭였다. 공작은 통로가 어두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어리숙한 소년처럼 달아오른 낯을 전부 들켰을지도 몰랐다.

그 사실을 모르는 아란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를 이끌고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황궁 밖으로 나가는 길을 아신다고요?”

공작이 반신반의하는 얼굴로 묻자 아란이 눈썹을 찌푸렸다.

“그래. 이곳이 짐의 집이니 짐보다 황궁을 잘 아는 사람은 없어.”

“그건 그렇지만….”

공작이 물 샐 틈도 없을 만큼 철통같이 성문을 지키던 대공의 병사들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두 사람이 빠져나갈 만한 길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가 뭐라 더 말하려 하자 아란이 검지를 입술에 갖다 대며 주의를 주었다.

“여긴 좁아 소리가 울리니 주의해야 해.”

공작이 입을 다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별다른 방법이 없으니 그녀를 믿고 따르기로 했다.

그리고 아란은 기가 막히게 인적이 없는 곳만 골라 향했다. 하나 같이 어둡고, 좁고, 더러운 곳이었지만 둘 중 누구도 개의치 않았다. 황궁에 이런 곳이 있었다는 사실에 놀란 공작이 이따금 주의를 두리번거리긴 했지만 그게 다였다.

폐하께선 어떻게 이런 길을 알고 있는 거지? 그는 아란의 등을 쳐다보며 혀를 내둘렀다.

물론 늘 사람들로 넘치는 황궁이다 보니 둘은 가끔 다른 사람을 마주치기도 했다. 그러나 이렇게 더럽고 그늘진 곳을 찾는 사람들은 전부 귀족들과는 연이 없는 말단 사용인들뿐이었다. 그럴 때마다 공작은 연인과 밀회를 나누는 척, 아란을 껴안고 그녀의 얼굴을 가렸다.

그 모습을 목격한 사람들은 괜히 높으신 분들의 밀회를 방해했다가 불호령을 받는 일을 피하고자 두 사람의 얼굴을 제대로 확인하기도 전에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다.

아란의 어깨를 안을 때마다 공작은 숨을 죽였다. 맞닿은 가슴에서 두려움으로 세차게 박동하는 그녀의 심장이 느껴졌다. 그러면 그의 가슴은 다른 의미로 뛰었다. 공작은 이런 상황에서도 자꾸만 흐트러지는 호흡을 애써 가다듬었다.

두 사람이 각자 다른 생각을 하는 사이, 마침내 아란이 밖으로 통하는 길을 찾아냈다.

“여기네.”

그녀가 가리킨 곳은 성인 여자 한 명이 겨우 지나갈 법한 좁은 길이었다.

“아까부터 느낀 거지만, 이런 길은 대체 어찌 알고 계십니까……?”

궁금증을 참지 못한 공작이 물었다. 아란이 조금 민망한 얼굴로 대답했다.

“어릴 때는 황궁의 버려진 길을 찾아다니는 게 취미였어. 오래전이라 잊어버렸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리 변하지 않아 금방 찾았구나. 이 길을 따라 쭉 가다 보면 황궁 밖으로 나갈 수 있지. 산등성이로 이어지긴 하지만.”

“유용한 취미를 가지셨었군요.”

공작이 대답했다. 그녀가 어릴 적엔 약한 몸과 어울리지 않는 발랄한 성품의 소유자였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모험심이 넘쳤을 줄은 몰랐다.

이번에도 아란이 앞장서고, 공작이 뒤따랐다. 길게 자란 풀이 아란의 연약한 피부를 할퀴었지만 그녀는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다. 어깨가 부딪히지 않게 모로 서서 걷고 있는 공작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걷는 내내 아란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 모든 일을 감당하기엔 그녀의 어깨는 너무 작아 보였다.

“폐하 말고도 이 길을 아는 사람이 있습니까?”

공작은 가라앉으려는 기분을 떨치기 위해 일부러 가벼운 어조로 물었다.

“이제 공이 알게 되었지.”

아란이 무심히 대답했다.

“그러니까, 저보다 더 전에 말입니다.”

이번엔 아란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 길을 아는 또 다른 한 명을 생각했다. 그리고 황궁의 버려진 통로를 찾아 그와 함께 정신없이 쏘다녔던 때를 떠올렸다. 에녹은 아란의 독특한 취미를 이해하진 못했으나 그래도 항상 뒤를 따라다녔다.

그때는 이런 식으로 그 취미를 활용하게 될 거라곤 조금도 상상하지 못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 본인에게 쫓겨서.

아란은 질문을 듣지 못한 척 묵묵히 걷기만 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대화가 끊겼다.

침묵을 벗 삼아 한참을 걸은 후에 아란이 멈춰 섰다.

“여기네.”

아란이 공작을 돌아보며 입구 밖을 가리켰다. 그곳은 말 그대로 산이었다.

두 사람은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밖으로 나왔다.

“어떻게 내려가야 할까요.”

공작이 막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날이 어둑해지고 있었다. 그는 바닷길은 훤히 알았지만 산길은 잘 몰랐다.

아란이 다시 한번 바닥을 가리켰다. 길게 자란 풀 사이로 다행히 흰 돌이 드문드문 박혀 있었다.

“이 길을 따라 내려가면 도시가 나올 거야. 한 번도 가본 적은 없어 장담할 수 없지만.”

“뭐가 되었든 산속을 헤매는 것보단 나을 겁니다.”

이번엔 사일러스 공작이 앞서 걸었다. 그는 무성한 풀을 헤치는 와중에도 아란이 넘어지기라도 할까 연신 뒤를 돌아보았다.

몇 번 아찔한 순간이 있었지만, 아란은 용케 넘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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