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그들의 뜻대로 아란은 잔뜩 겁을 먹었다. 꾹 다문 입술 사이로 금방이라도 공포에 질린 비명이 터질 것 같았다. 아란은 그런 일을 방지하기 위해 입술이 터질 정도로 세게 깨물었다. 딱지가 앉은 자리에 다시 피가 났지만 아픈 줄도 몰랐다.
무서운 와중에도 아란은 어떻게 해야 자신이 살아나갈 수 있을지 생각했다. 죽는 건 싫었다. 생에 대한 의지로 수모를 묵묵히 견뎌온 그녀였다.
그러나 어디를 봐도 그녀가 도망칠 구석은 없어 보였다.
아란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어두운 얼굴로 입을 꾹 다문 시녀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아란뿐만 아니라 저들끼리도 말을 섞지 않았다. 아란은 그들을 설득하는 것을 일찌감치 포기했다. 애초에 자신의 목숨줄을 쥐고 있는 건 그들이 아니었다.
대신 아란은 문밖에서 들리는 병사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이렇게 그녀의 침실 앞에 모여 떠드는 것을 보면 아직 대공은 도착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가 보낸 전령도 대공의 군대가 완전히 수도에 도착하려면 나흘은 더 지나야 할 것이라고 전했었다.
그러나 아란은 대공의 수하들이 그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문 너머로도 잔뜩 달아오른 병사들의 분노와 투지가 생생히 느껴졌다. 당장이라도 문을 부수고 들어와 아란을 끌어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반드시 돌아오겠다던 대공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다. 옛 연인을 다시 마주한 듯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던 부드러운 미소와 목소리가 아직도 뇌리에 선명했다.
이런 최후를 맞게 하려고 그리 다정한 척 한 것일까. 굳이 그런 수고까지 감내할 만큼 내가 미웠을까.
역시, 그건 전부 그녀를 현혹하기 위한 기만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쓰렸다. 아직도 그에게 배신감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그는 아란의 약점을 너무 잘 파악하고 있어서, 그녀로서는 아무리 조심해도 늘 당할 수밖에 없었다.
아란은 또다시 입술 안쪽만 잘근잘근 씹었다. 그것만이 그녀가 감정을 삭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바깥에서 무슨 이야기가 들려오든, 방 안은 깃털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만큼 조용했다. 한숨이나 흐느낌으로 그 침묵을 깨는 건 용납되지 않을 것처럼.
아란의 예상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며 시녀 한 명과 기사 두 명이 들어왔다. 아란은 그 시녀의 얼굴을 금방 알아보았다. 유달리 그녀를 잘 따르던 시녀 중 한 명이었다. 시녀가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말했다.
“렌스 백작님께서 황제를 데려오라고 하셨어요. 드디어 결정을 내리신 모양이에요.”
“그래? 생각보다 빠르구나. 어서 데려가렴.”
시녀들은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은근한 동정이 섞인 눈으로 아란을 바라보았다.
소식을 전한 시녀가 곧장 아란에게 다가와 거칠게 묶인 발을 풀고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오랫동안 한 자세로 굳어있던 몸이 비명을 질렀다.
“아, 잠깐…….”
아란이 크게 휘청이는데도, 시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거칠게 그녀를 침실 밖으로 끌고 나갔다. 그 탓에 하마터면 아란은 우스꽝스럽게 넘어질 뻔했다. 다른 시녀들은 그래도 한때 모셨던 주인이 개처럼 묶여 질질 끌려가는 장면을 차마 똑바로 보지 못하고 외면했다.
거친 행동에 아란도 몹시 당황했다. 그 시녀에게 평소처럼 상냥한 모습을 기대한 건 아니지만, 이렇게까지 험하게 굴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꼭 다른 사람 같았다.
겨우 중심을 잡은 아란이 비틀거리며 시녀를 따라 걸었다.
아란이 문밖으로 나오자 시선이 전부 그녀를 향해 쏟아졌다. 그 시선 하나하나가 거대한 철퇴처럼 그녀를 내리치는 것 같았다. 아란은 모멸감에 떨리는 몸을 억누르며 더욱 꼿꼿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녀에게 남은 건 이제 정말로 알량한 자존심 하나뿐이었다.
그러나 시녀는 그 모습조차 봐줄 수 없었는지 우악스럽게 그녀의 손목을 묶은 줄을 잡아당겼다. 아란은 그 거친 손길을 이기지 못하고 넘어졌다. 모멸감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시녀가 재촉하듯 줄을 흔들었다.
“뭐해요? 빨리 일어나지 않고. 설마 이 상황에서도 시중이 필요한 건 아니겠죠?”
“……아니다.”
아란이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오히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기사와 병사들이 당황했다. 겉모습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는 렌스 백작의 당부를 듣긴 했지만, 처음 보는 황제가 예상보다 훨씬 더 약해 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저항도 하지 못하고 저렇게 당하는 모습을 보니 정말로 질 낮은 악당이 된 기분이었다.
“아니, 이렇게 심하게 다루지 않아도…….”
그들은 조금 전까지 황제를 신나게 조롱하던 것도 잊고 시녀를 말렸다. 그러자 시녀가 인상을 썼다.
“뭐야, 설마 지금 이 사람을 동정하는 건가요? 기가 막히네.”
“그건 아니지만, 굳이 이럴 필요까지는 없지 않습니까.”
“기가 막혀. 실컷 욕할 때는 언제고……. 됐어요, 그쪽들은 서재로 가서 귀족 회의 소집장이나 좀 찾아봐요. 백작님께서 반드시 찾아오라고 하셨어요. 황제는 내가 혼자 데려갈 테니.”
시녀가 기사들을 향해 쏘아붙였다.
“하지만……”
“어서 움직이지 않고 뭐해요? 몰락한 황제 따위보다 소집장이 더 중요한 거 몰라요?”
“아, 알겠습니다. 우린 소집장을 찾아 뒤따를 테니 어서 가보세요.”
기사들을 떨어뜨린 시녀는 말없이 아란을 데리고 황궁을 가로질렀다.
아란은 가는 길에 시녀가 또다시 저를 괴롭힐까 봐 잔뜩 긴장했지만, 예상과 달리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기사들이 떨어져 나가 더 도망치기 좋은 상황이 된 셈이었다. 아란은 순순히 시녀의 뒤를 따르는 척하며 열심히 도망갈 궁리를 했다.
힘 차이는 현격했지만 시녀는 지금 등을 보이고 있으니 뒤에서 기습하면 승산이 있을 것 같기도 했다.
뒷머리를 힘껏 가격해 쓰러뜨리고 그 틈에 달아난다면…….
아란은 시녀의 동그란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싸움이라곤 해본 적도 없는 그녀가 폭력을 쓰는 건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심하게 다치면 어쩌지?
그녀는 제 손을 묶은 끈을 바라보았다. 사슬도 아니고, 천으로 되어있으니 한 번쯤 세게 맞는다 해도 피가 나거나 하진 않을 것 같았다. 거기다 남을 해쳐서라도 살고 싶다는 생존 욕구가 결국 망설임을 눌렀다. 그 생각을 부추기기라도 하듯, 시녀가 때마침 인적이 드문 곳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아란은 힘껏 주먹을 쥐고 두 번 생각할 겨를도 없이 손을 크게 휘둘렀다.
턱―
생각한 것보다 큰 소리가 나진 않았지만, 시녀가 크게 휘청하며 끈을 잡고 있던 손을 놓쳤다, 아란은 그 틈에 정신없이 뛰어 달아났다.
그러나 몇 걸음 가지 않아 뒤따라 온 손이 거칠게 어깨를 휘어잡았다.
“악!”
소리를 지르는 입을 시녀가 틀어막았다.
“기습을 하실 거면 제대로 하셔야죠.”
아란은 겁에 질려 시녀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시녀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 아픈 기색은 아니었다. 아란은 제 무력한 주먹으로는 사람을 제압하긴커녕, 제대로 된 치명타 한 번 날리기 어렵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발버둥 치는 아란을 바라보며 그녀가 놀랍다는 어조로 중얼거렸다.
“폐하께 이런 면도 있는 줄은 몰랐네요.”
이미 아란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그녀에게서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실패했다고 생각하자 아란은 눈앞이 캄캄해지며 몸에 힘이 쭉 빠졌다. 잠시나마 눈앞에 보였던 실낱같은 희망이 사라져가고 있었다.
그 때, 갑자기 몸을 꼭 붙들고 있던 손이 조금 느슨해졌다.
“사고 치지 않고 얌전히 있겠다고 약속하시면 손을 놓아드릴게요. 하지만 허튼짓하시면 이대로 백작에게 끌고 갈 거예요. 아시겠어요?”
여전히 아란의 입을 틀어막은 상태에서 시녀가 속삭였다. 의외로 부드러운 어조였다. 아란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입과 어깨를 구속했던 손이 떨어져 나갔다. 아란이 재차 소리를 지를까 봐, 시녀 역시 긴장한 게 느껴졌다.
아란은 몸을 떨면서 입을 꾹 다물고 몸을 바로 했다.
“좋아요.”
시녀가 아란에게 얻어맞은 뒤통수를 대충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그리곤 갑자기 주변을 돌아보았다. 경비병이라도 부르려는가 싶어 아란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러나 이어진 시녀의 행동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따라와요. 소리 내지 말고.”
그녀가 아란의 손을 잡고 황궁 구석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아란은 그녀를 뿌리치지도 못하고 덩달아 함께 뛰었다. 시녀는 낡은 창고 앞에서 발을 멈췄다. 그리곤 말도 없이 다짜고짜 아란을 그 안으로 밀어 넣었다.
“여긴…….”
그녀는 아란의 질문을 무시하고 서둘러 창고 문을 잠갔다. 그리곤 묵묵히 아란의 손을 묶은 줄을 풀었다. 오래 피가 통하지 않았던 부분에 다시 온기가 돌며 찌르르한 느낌이 났다. 아란은 얼떨떨한 얼굴로 시녀를 바라보았다. 시녀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옷, 벗으세요.”
“뭐?”
“시간이 없어요.”
그렇게 말한 시녀도 제 옷을 벗기 시작했다. 아란은 멀뚱멀뚱 그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속옷 차림이 된 시녀가 뭘 하느냐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뭐 하시는 거예요? 그렇게 서 계시지 마시고 얼른 옷 벗어요! 곧 기사들이 우리가 없어진 걸 알고 따라올 거라고요!”
그녀의 서슬에 아란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옷을 벗었다. 시녀는 초조하게 아란이 옷을 벗기를 기다렸다가, 그녀의 드레스를 거의 빼앗다시피 가져가 제가 걸쳤다. 그리고 반대로 제 옷을 아란에게 입혔다. 그녀가 옷을 전부 갖춰 입자 시녀가 말했다.
“도망치세요.”
그 말에 아란은 이번에도 얼빠진 질문을 반복했다.
“뭐?”
“창고 뒷문으로 나가 왼쪽으로 조금만 가다 보면 거의 사람이 다니지 않는 통로가 나와요. 그곳으로 쭉 가다 보면 폐하를 도와줄 사람이 있을 거예요. 그다음은 알아서 하시고요.”
“지금 날 풀어주려는 거니?”
“그래요.”
시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아란은 그녀의 말을 쉽게 믿을 수 없었다. 반역이 일어났다는 사실보다 지금 이 상황이 더 현실성이 없었다.
“왜 갑자기?”
“하아……. 그러게 말이에요. 제가 왜 폐하를 돕고 있을까요.”
시녀가 갑자기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러더니 씁쓸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꺼냈다.
“제 부모님과 오라버니는 선대 대공 전하와 함께 처형되었어요. 폐하의 부모가 저지른 짓이죠. 전 그때부터 폐하와 폐하의 혈육을 미워했어요. 하지만 얼마 전엔 폐하께서 시녀들 모두에게 선물해주신 보석으로 하나 남은 동생의 목숨을 구하기도 했죠.”
아란은 모르는 이야기였다. 그녀의 부모와 오라비가 어떻게 죽었는지, 그녀의 동생이 어떻게 살게 되었는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