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근위병보다도 대공가의 병사들이 더 많이 눈에 띄었다. 하나 같이 완전무장을 한 상태였다.
이자들, 정말 반역이라도 일으킬 작정인가?
그들은 그 사실을 굳이 숨길 생각도 없는 듯이 보였다.
그는 잠시 백작을 노려보다가, 못 이기는 척 물러섰다. 그가 데려온 병사는 고작 스무 명 남짓이었다. 싸움이라도 벌어지면 승산이 없었다.
그러나 포기한 건 아니었다. 공작은 그 후에도 황궁 근처를 맴돌며 기회를 엿보다 황궁 밖으로 나온 대공의 수하 한 명을 낚아챘다. 갑작스레 기습을 당한 수하가 반사적으로 소리를 지르려 했다. 그 전에 공작이 그의 급소를 쳤다.
“헉!”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그대로 주저앉으려는 그를 공작이 끌어올려 벽에 밀어붙였다. 피부가 희고 선이 고운 외모와 달리 그는 타고난 바닷사람이었다. 악력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이게 무슨 짓……!”
“때린 건 미안하게 됐네. 그런데 일단 한 가지만 묻지. 대답만 잘한다면 무사히 보내줄 테니 너무 걱정은 말고.”
공작이 친근한 척, 빠르게 속삭였다. 손 쓸 새도 없이 제압당한 남자의 목울대가 크게 울렸다. 공작은 재빨리 그를 훑었다. 갓 스물이나 되었을까 싶은 앳된 얼굴에, 어딘지 어수룩한 인상이었다. 급한 상황치고는 그럭저럭 잘 고른 듯했다.
“무슨 대답 말씀입니까.”
남자가 긴장을 숨기지 못한 어조로 물었다. 반면 공작은 여유만만했다.
“네놈들, 대체 무슨 일을 꾸미고 있지?”
“꾸미다니, 정당한 일을 할 뿐입니다!”
남자가 발끈했다.
“정당한 일을 하는 놈들이 감히 귀족들의 황궁 출입을 통제하나? 그리고 목소리 낮추라고. 험한 꼴 보기 싫으면.”
“통제하는 건 그냥 일시적인 일로…….”
“아무튼, 연유가 뭔가?”
“자세한 건 저도 잘 모릅니다. 안다 해도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남자가 딱 잘라 대답했다.
“그렇게 말하면 더 수상하다는 것도 모르나? 대공의 수하들은 충성스러울지는 몰라도 똑똑하지는 못한 모양이야. 내겐 그편이 더 좋지만.”
공작은 사람 좋은 척 웃으며 저를 노려보는 남자의 품속에 미리 준비한 금화 주머니를 찔러 넣었다.
“그리 무섭게 노려보지 말게. 그대들의 계획이 무엇이든 방해할 생각은 없으니까. 그리고 이건 지금부터 내가 할 청탁에 대한 약소한 대가일세.”
“이게 무슨 짓입니까? 뇌물은 됐습니다.”
남자가 펄쩍 뛰었다. 그는 얻어맞을 때보다 뇌물을 받는 것을 더 수치스러워하고 있었다. 공작이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어허, 뇌물이라니. 주군을 닮아 꽉 막힌 건가? 별일도 아닌 걸로 호들갑을 떨지 말라고.”
그러면서 공작은 부드럽게 토닥이던 사내의 어깨를 지그시 힘주어 잡았다.
“윽……! 무, 무슨 부탁 말입니까.”
“별다른 건 아니고, 대공과 작은 오해가 있던 것을 이참에 풀고 싶어 그러는데 자네가 잘 좀 말해주게.”
“그건 알아서 하셔야지요……. 하급 귀족인 제가 무슨 수로 두 분 사이를 중재합니까.”
남자가 툴툴거렸다.
주인이나 종이나 짜증 나긴 매한가지군.
공작은 그의 목을 비틀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내 부탁을 들어주기만 하면, 결과에 상관없이 조금 전 준 돈의 다섯 배를 얹어주지.”
“필요 없,”
“당신들, 지금 황좌의 주인을 바꿀 생각을 하고 있지?”
그들이 정말로 역모를 꾸미고 있다면, 이러고 있을 시간도 없었다. 공작은 그냥 직접 부딪히는 쪽을 택했다. 그 말을 들은 대공의 수하가 놀란 눈으로 거세게 몸부림쳤다. 그것으로 대답은 충분했다. 공작은 다시 그를 억눌렀다.
“이봐, 진정하라고. 난 당신들의 계획에 끼어들 생각 같은 건 없어.”
“…….”
“그리고 생각해보라고. 내가 지금 이 상황에 황제의 편을 들어 무엇 한단 말인가? 나 역시 무능한 현황제보다는 대공을 주군으로 모시고 싶은 사람이야. 아무튼, 대공 전하께서 황위에 오르신다면 즉위하시기 전에 그분과 있던 오해를 풀어야 내가 살 것 아닌가. 그리고 내가 그분의 사람이 된다면 대공께도 그리 나쁜 일은 아니야.”
“그건, 그렇지요.”
“그러니 대공께 내 말을 잘 좀 전해주고. 또 하나, 황궁에 들어갈 수 있게 해주게.”
남자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그런데, 대공의 오해를 푸는 것과 황궁에 들어가는 것과 무슨 상관입니까?”
공작이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황제의 시녀 중에 내가 마음에 담아둔 여자가 있는데. 험한 일에 말려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그러네. 대공령 출신이 아니라 혹 위험한 일을 당할까 걱정돼. 아무리 무혈입성이라 해도 이렇게 큰일이 일어나는데 무조건 안전하리라는 보장은 없으니까 말이야. 자네도 사내라면 내 마음을 알겠지?”
“흠, 그럼 일단 놓아주십시오. 상의를 해야 하니까요.”
잠시 고민하던 사내가 말했다.
“좋아. 기다리지.”
공작은 순순히 그를 놓아주었다. 성문 안으로 들어갔던 남자는 한참 후에야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공작을 황궁 안으로 들여보내 주었다. 그러나 함께 온 병사들은 들일 수는 없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별수 없이 공작은 홀로 황궁 안으로 들어섰다.
렌스 백작이 힐끗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공작은 그를 못 본 체하며 황궁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평소와 다름없는 바깥과 달리, 황궁 내부 분위기는 첨예하게 날이 서 있었다.
그러나 황궁 안에 들어와서도 문제는 끝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시녀가 대체 누구입니까?
남자가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공작은 눈치를 보아 그를 적당한 곳에서 돌려보내려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되레 수상한 눈빛만 받게 되었다. 마냥 어리숙한 줄 알았더니 몹시 끈질겼다. 사일러스 공작이 유들유들한 척 웃으며 대답했다.
“그건 비밀이네.”
그러나 손에선 긴장으로 땀이 배어 나왔다. 놈이 따라붙으면 황제를 찾기가 힘들어진다. 게다가 이제 곧 시녀들이 모인 곳이 나온다. 그전까지 놈을 어떻게 해서든 떼어놓아야 했다.
“이런 상황에선 사소한 비밀도 의심을 산다는 걸 모르십니까?”
남자가 말했다. 눈치 없는 놈에게 훈계 당하니 어쩐지 기분이 나빴다.
“알고 있어. 다만 그녀의 이름은 너무 소중해 함부로 입에 담기조차 망설여져.”
공작의 말에 남자가 진저리를 치며 얼굴을 왈칵 구겼다. 그러나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황제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담을 수는 없었으니까. 공작은 황제의 이름을 알았지만 실제로 불러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어느덧, 공작은 시녀들이 머무는 곳에 도착했다. 황제의 침실과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공작이 힐끗 침실을 살폈다. 그곳에 황제가 있는지, 병사들이 침실 주변을 겹겹이 에워싸고 있었다.
지독한 놈들.
공작의 얼굴이 굳었다.
“한데, 황제는 어떻게 되는 건가?”
“늦어도 내일 중으로 재판과 함께 판결을 받게 될 겁니다.”
“판결?”
“예. 아마 사형이겠지요.”
무심한 목소리에 공작은 심장이 바닥까지 떨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남자가 바라보고 있어, 그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래. 그게 편할 테지.”
“그나저나, 이제 정말 각하의 연인을 볼 수 있겠군요.”
남자가 그리 말하며 황제의 시녀들이 모여있는 방의 문을 활짝 열었다.
“자, 이제 말씀해주시죠. 각하의 연인이 누구인지.”
당연히 그 안에 공작의 연인은 없었다.
공작이 난처하게 시녀들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그가 잘났다 한들, 이 짧은 순간에 여자를 유혹할 재간은 없었다.
그 때, 갑자기 시녀 한 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딘지 초조한 기색이던 그녀는 공작과 눈이 마주치자 환히 웃었다.
“세상에, 공작 각하. 여긴 어떻게 들어오셨나요? 못 보는 줄 알았어요!”
시녀가 수줍은 듯 고개를 떨구며 그에게 다가와 손을 잡았다. 시녀의 돌발적인 행동에 공작은 몹시 당황했으나, 곧 정신을 차리고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맞잡은 손이 축축했다.
“무사하셨군요. 다행입니다.”
공작은 제법 사랑스러운 연인을 대하듯 시녀의 뺨을 쓰다듬었다. 아직 앳된 시녀의 뺨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으나, 공작을 제외한 누구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두 사람을 바라보던 남자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 뭐야, 난 또 거짓말인 줄 알고 의심했잖습니까.”
남자뿐만 아니라 다른 시녀들도 전부 놀란 눈치였다.
“아니, 로지나. 너 공작 각하와…….”
“감쪽같이 우릴 속이다니!”
로지나라는 이름의 시녀가 입술을 깨물며 웃었다. 그 미소는 얼핏 수줍어 보였으나, 공작은 그녀가 불안해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잠시 각하와 둘이서 이야기를 나눠도 될까요? 너무 오랜만에 뵈어서 할 말이 너무 많아요…….”
로지나가 남자와 다른 시녀들에게 물었다. 이 상황에서도 연애할 생각이 드냐며 조금 타박을 받긴 했지만 전부 허락했다. 남자는 공작과 시녀를 번갈아 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돌아갔다.
둘만 남게 되자 시녀가 그의 귀에 은밀히 속삭였다. 수줍은 어조는 간 곳 없이 놀랄 만큼 냉정한 목소리였다.
“폐하를 만나러 오셨나요?”
“그래. 왜 나를 도왔지?”
“각하를 도운 게 아닙니다. 폐하를 도운 것이죠.”
시녀는 물끄러미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다 덧붙였다.
문이 열리고 그가 들어왔을 때는 조금 놀랐지만, 그가 왜 이곳에 나타났는지를 알아챈 순간 저도 모르게 몸이 움직였다. 언젠가 창문 밖으로 엿들었던 황제를 향한 그의 솔직한 사랑 고백을, 그녀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따라오십시오.”
* * *
아란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얌전히 앉아있었다. 오랫동안 묶인 손발은 이제 고통스러운 단계를 지나 감각이 없었다. 차라리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가장 비참했던 순간에도 언제나 고귀한 황족이었던 그녀는 육체적 고통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울면서 손발을 풀어달라고 애원하지 않았던 게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용했다.
아란은 시녀들을 외면하고 멍하니 앉아 대리석 바닥에 새겨진 무늬를 바라보았다. 할 수 있는 게 그것뿐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성가실 만큼 말을 걸어오던 시녀들은 이제 그녀와 어떤 대화도 하려 들지 않았다.
시녀들은 교대로 아란을 감시했는데, 바뀐 시녀들도 말이 없긴 마찬가지였다. 처음엔 이것저것 물어보던 아란은 마침내 체념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문밖에선 병사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대화 대부분이 아란을 향한 천박한 농담과 그녀의 몰락을 비웃는 내용이었다. 누군가 과장된 어조로 그녀를 조롱할 때마다 왁자지껄한 웃음과 함께 거친 욕설이 터져 나왔다. 유달리 크고 험악한 목소리는 문 안쪽에 있는 사람에게 겁을 주려는 의도가 분명히 섞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