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하의 밤-61화 (61/146)

61화

“누가, 누구를 추적한다고 했느냐?”

“렌스 백작이 도망친 황제를 추적하는 중입니다.”

자작이 반복해 대답했다.

“폐하께서 도망을?”

대공이 그답지 않게 거듭 되물었다. 제 수하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황제가 어째서 황궁을 놔두고 도망친다는 말인가?

대공이 아는 황제는 절대 제 의무를 저버리고 달아날 사람이 아니었다. 차라리 제 수하들이 농담을 하고 있다는 쪽이 더 믿기 쉬울 것 같았다.

그는 수하들의 말을 헛소리로 치부하며 서둘러 황제의 집무실로 향했다.

처음엔 천천히 걸었으나 점점 속력이 붙었다. 급기야 그는 체통도 잊은 채 전력을 다해 달렸다.

해가 막 넘어갔지만 아직 그녀는 집무실에 있을 시간이었다. 대공은 제 발길이 멈추는 곳에 아란이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반드시 그래야만 했다.

다급한 나머지 그는 노크도 잊고 문을 밀어젖혔다.

쾅―

“폐……!”

그러나 집무실은 텅 비어있었다.

아무도 없는 집무실을 확인하고도 그는 낙담하지 않았다. 어쩌면 오늘은 일찍 정무를 마쳤을지도 모른다. 몸이 약한 만큼, 그녀는 일찍 침실로 향하는 날이 잦았다.

그는 숨도 돌리지 않고 곧바로 황제의 침실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의 앞을 자작이 막아섰다.

“비켜.”

대공은 자작을 밀치고 걸음을 재촉했다. 그의 뒤에서 자작이 소리쳤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황제는 이곳에 없습니다, 전하!”

그 말을 듣고도 그는 기어이 황제의 침실까지 가서 확인했다. 그곳에도 아란은 없었다.

넓은 공간 구석구석을 빠짐없이 눈으로 훑던 대공이 뒤따라온 자작에게 몸을 돌렸다.

“똑바로 설명해라.”

“황제가 황위를 버리고 달아났습니다.”

대공이 사납게 자작을 노려보았다.

“폐하께서 아무 이유 없이 달아날 리 없다. 제대로 설명해라,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알아들을 수 있게.”

자작이 마른 침을 한 번 삼키고는 이내 긴장이 역력한, 그러나 결연한 얼굴로 그를 응시했다.

“이제 그 여자를 폐하라는 호칭으로 부르실 필요 없습니다.”

“뭐?”

“황제는 폐위될 겁니다. 그리고 그 자리를 전하께서 차지하게 되실 겁니다.”

대공은 제가 들은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살면서 들은 말 중 가장 어처구니없고 황당한 말이었다.

“저희가 황제를 몰아냈습니다. 황위에 오르십시오, 전하.”

“…….”

대공은 대꾸할 말을 잊었다. 너무 기가 막혀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는 텅 빈 황제의 침실을 다시 한번 돌아보았다. 그제야 어수선한 침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쓰러진 테이블과 의자, 바닥을 뒹구는 드레스와 보석들. 그중에는 그가 선물했던 사파이어 목걸이도 있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심장이 싸늘해졌다.

그의 사람들이 반역을 일으켰다. 자신이 아닌, 바로 황제에게.

벼락을 맞은 것처럼 대공은 꼼짝도 하지 못했다. 은연중에 신음과도 같은 말이 새어 나왔다.

“그분께 손을 댔느냐?”

“예?”

중얼거리던 목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그분의 몸에 생채기 하나라도 냈냐고 물었다.”

대공의 속을 알지 못하는 자작이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그렇지는 못했지만, 렌스 백작이 쫓아갔으니 처리하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

정신이 아득해져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 자작은 일견 냉정해 보이는 그의 표정에 힘을 얻은 듯,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전하의 영광을 저희 손으로 쌓아드리겠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아슬아슬하게 유지하던 평정이 결국 깨졌다.

“영광? 영광이라고? 너희가 무엇이기에 감히 황제를 폐한단 말이냐. 네놈들이 감히…….!”

대공이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며 자작의 멱살을 잡았다. 자작은 예상보다 훨씬 격렬한 대공의 분노에 당황했다. 그러나 그는 꿋꿋하게 말을 이었다. 어차피 각오한 일이었다. 그는 자신들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전하께선 전부 저희에게 맡기시고, 황위에 오르시기만 하면 됩니다. 전하께서 오시는 날에 맞춰 전부 끝내지 못한 것이 아쉽긴 하지만, 곧 렌스 백작이 황제의 목을 가지고 돌아올 겁니다.”

분노로 붉어졌던 대공의 얼굴이 이번엔 하얗게 질렸다.

“네가, 지금 무슨 말을…….”

주군의 영광에 눈이 멀어 그의 안색을 살피지 못한 자작이 당당하게 덧붙였다

“죄인의 딸이자 누이가 아닙니까. 그 여자는 이제 제 혈육이 지은 죄의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그리고 대공께서 정당하게 그 자리를…….”

그가 채 말을 마치기도 전에 대공이 그의 얼굴을 내리쳤다. 그리고 형편없이 나가떨어진 자작의 배를 연달아 걷어차며 미친 듯이 날뛰었다.

“네놈들이……! 네까짓 것들이 감히 누구의 죄를 운운해!”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들 중 몇 명이 대공을 말리려 나섰다가 덩달아 얻어맞았다. 늘 침착하던 대공이 이렇게 분노한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제야 그들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자작이 기절한 후에도 대공은 광기에 찬 사람처럼 그를 때리고 또 때렸다.

그러다 분을 이기지 못한 그가 문득 허리춤에 차고 있던 칼을 빼어 들었다. 번득이는 칼날에 지켜보던 사람들이 숨을 들이켜고, 멀리서 시녀가 저도 모르게 새된 비명을 질렀다.

그 소리가 아란의 비명 소리처럼 여겨져 대공은 갑자기 퍼뜩 정신을 차렸다.

당장 수하들을 벌하는 것보다 더 급하고 중요한 일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린 그가 자세를 바로 했다. 눈빛이 형형했다.

내리치려던 칼의 방향을 바꿔 자작의 얼굴 옆에 박아넣은 그는, 조금 전 폭력은 전부 꿈인 것처럼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를 찾아라.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온전히 모셔와야 한다. 그분께서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전부 사형이다.”

명령을 내린 그는 곧바로 황궁을 뛰쳐나가 말에 올라탔다. 그리고 렌스 백작의 뒤를 추적했다. 절대 그가 먼저 황제를 찾게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되었다. 가시지 않은 분노와 흥분, 그리고 두려움으로 전신이 미칠 듯이 떨렸다.

이런 기분은 태어나 처음이었다. 부모가 죽을 때도, 예고도 없이 서쪽 국경으로 떠나게 되었을 때도 이렇게 절망적이지는 않았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이제 아무래도 좋았다. 그저, 아란이 무사한지 확인하지 못하면 그는 영원히 이 절망 안에 갇힐 것 같았다.

제발, 제발……!

대공은 누구에게 비는지도 모르면서 애타게 기도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그 와중에도 황제가 도망쳐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란이 도망쳤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계속 살아가기 위해.

그는 드디어 아란이 원하는 것을 하나 알게 되었다. 그녀는 삶을 바랐다. 절망 속에서도 감격을 닮은 벅찬 감정이 왈칵 치밀었다.

“잘하셨습니다, 폐하. 정말 잘하셨습니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잘했다는 말만을 되뇌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로 돌아버릴 것 같았다.

더 멀리 달아나십시오, 백작의 손에 잡히지 않도록.

살아만 계신다면 그곳이 어디든 제가 찾아갈 테니.

* * *

대공이 수도로 돌아오기 이틀 전, 사일러스 공작이 수도에 도착했다.

황제에 대한 걱정으로 쉼 없이 달려온 것이 무색하게, 그는 잠시 망설였다. 마지막으로 봤던 분노한 황제의 얼굴이 떠오른 탓이다. 그는 선뜻 입궁하지 못하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황궁을 바라보았다. 황궁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사람들로 붐볐다.

헛걸음한 건가.

기가 막히면서도 짙은 안도감이 찾아왔다. 무사하다면 되었다. 그는 수도에서 하루도 머물지 않고 곧장 다나르로 돌아가려 했다.

그러다 이상한 장면을 보았다. 낯익은 귀족 몇이 황궁 앞에서 누군가와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귀족들을 막아선 건 웬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사내였다. 나이는 들었을지언정, 한눈에 보기에도 보통 기개를 지닌 게 아니었다. 공작은 그쪽으로 다가가 대화를 엿들었다. 사내가 귀족들에게 입궁을 허락할 수 없다며 엄포를 놓고 있었다.

공작은 그 사내 역시 낯이 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수도에선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분명 공작은 그 사내를 만난 적 있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그는, 곧 사내가 누구인지 떠올렸다. 사내는 대공의 수하였다.

렌스 백작이었던가.

그는 백작의 행태에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리 대공의 사람이라 하나, 고작 백작에 불과한 자가 감히 황궁을 오가는 사람을 막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말도 안 되는 일이, 분명 그의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사일러스 공작은 이상한 예감에 홀린 듯이 백작 앞으로 다가갔다.

황제를 알현할 수는 없겠지만, 공작은 설마 지방 귀족이 자신의 입궁을 막을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예상은 틀렸다.

“멈추십시오. 외람되오나, 오늘은 입궁을 허할 수 없습니다.”

“그건 황제 폐하의 뜻인가, 아니면 대공 전하의 명령인가?”

공작이 저도 모르게 싸늘히 물었다. 렌스 백작이 공작의 매끈한 얼굴을 재빨리 훑었다.

생각지도 못한 거물의 등장에 백작은 성가신 속내를 숨겼다. 공작은 예리하게 그 사실을 알아챘다. 불쾌해진 그가 입매를 굳혔다.

공작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자 백작은 일단 태도를 누그러뜨렸다. 백작의 위세가 아무리 대단해도 공작에 비교할 바는 못되었다. 중요한 일을 치르기 전에 괜한 문제를 일으켜 좋을 건 없었다.

“무슨 일로 입궁하려 하십니까? 공께 무례를 저지를 의도는 아니지만, 급한 용건이 있는 게 아니시면 오늘은 일단 돌아가심이 좋을 것 같습니다.”

“내가 경에게 그것까지 말해야 하나? 아무리 대공이 총애하는 수하라지만 지나치게 건방지군.”

공작은 여전히 냉랭한 어조로 대꾸했다. 애초에 대공에게 감정이 좋지 않으니 그의 수하들이 곱게 보일 리 없었다. 게다가 제 목적을 방해하고 있다면 더더욱 그랬다.

그가 상대하고 싶은 사람은 대공의 수하 나부랭이가 아닌 황제였다. 분명 저를 보면 분노할 테지만, 그녀의 안전을 확인하는 게 먼저였다.

“비키게. 내 폐하께 직접 전하지 않으면 안 될 말이 있으니.”

“폐하께선 지금 누구의 알현도 받을 수 없는 상태이십니다.”

“왜지? 편찮으시기라도 하신가?”

“그런 셈이지요.”

애매한 대답에 공작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거듭 백작에게 비켜설 것을 요구했으나 백작은 완고했다. 그는 그대로 사정이 있었다. 이대로 공작이 황궁에 든다면, 분명 황제의 신변에 문제가 생긴 것을 들키고 말 것이다.

고집스럽게 버티는 백작의 태도에서, 공작은 진심으로 수상한 기운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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