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하의 밤-60화 (60/146)

60화

그가 다나르로 내려와 해적들을 섬멸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감사관들이 들이닥쳤다. 횡령, 뇌물 수수, 탈세 등 온갖 부정행위로 신고가 들어왔다는 이유였다. 어떤 통지나 경고도 없었다.

공작은 강력히 항의했으나, 법을 들먹이며 동전 한 푼 차액까지 세세하게 꼬투리를 잡고 따지는 감사관들 앞에선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신고자가 대체 누구냐고 묻자 감사관들은 아주 당당하게 로아크 대공의 이름을 댔다. 그리곤 기가 막혀 입을 떡 벌린 공작을 내버려 둔 채 열심히 공작성을 들쑤셨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 일을 계기로 그가 대공과 척을 졌다는 소문이 도는 바람에 그와 어울리려는 귀족들이 없었다.

그것 역시 전부 대공의 계산하에 있었을 것이다.

대공이 갑자기 이렇게 나오는 이유를, 그는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아마도 제가 두 사람의 정사를 훔쳐본 것을 들켰거나, 황제에게 고백한 것을 알게 된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었다. 황궁에 듣는 귀가 많다는 것도 잊고 감정에 휩쓸려 떠들어댄 제 잘못이었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보복해올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차라리 그가 자금 운용에 대해 직접적인 불이익을 줬다거나, 아예 무력으로 그를 끌어내렸다면 그리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그편이 훨씬 더 간단하고, 겁을 주기에도 좋았다. 사일러스 공작가가 아무리 부유하고 강력하다 한들, 황가를 무너뜨리고 황제도 제멋대로 휘두르는 대공이 그런 것을 겁내어 무력을 쓰는 것을 주저할 리가 없었다.

굳이 왜 이런 방법을 쓰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대공 덕분에 공작은 물론 공작 가문에 소속된 인력들 전원이 아무것도 하지 못해 모든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었다.

다시 장부로 눈을 돌리며 공작은 속으로 대공의 욕을 쏟아냈다.

대공이 전투로 자리를 비운 게 천만다행이었다. 덕분에 지금 당장은 빠져나갈 구멍을 몇 개 찾아낼 수 있었다.

걱정스러운 점은, 대공의 보복이 여기서 끝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었다.

대공은 쉽게 공작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그는 황제에게 집착하고 있었다. 예리한 감으로, 또 같은 남자로서 알 수 있었다. 일전에 자신은 황제에게 로아크 대공이 언제든 그녀를 버릴 거라고 말했지만, 그건 단순히 그녀를 설득하기 위한 말에 불과했다.

공작은 초라해진 제 처지를 자조하며 수도에 남기고 온 대리인이 보내온 서신을 읽었다. 그 위에는 황제와 수도에 대한 근황이 간단히 적혀있었다. 지금 황궁은 대공의 승전을 축하하기 위한 준비가 한창이며, 대공의 수하들 역시 상경 중이라는 대수로울 것 없는 내용이었다.

“그냥 거기서 죽었으면 좋았을걸.”

악담을 늘어놓으며 종이를 구기려던 사일러스 공작은 문득 이상함을 느끼곤 다시 서신을 펼쳤다. 그리고 대공의 수하들이 모두 수도로 올라오는 중이라는 부분을 다시 읽었다.

“축하 인원치고는 조금, 많지 않나?”

예감이 좋지 않았다.

대공의 수하들은 대다수가 무인이었다. 그것도 수차례나 크고 작은 전투를 승리로 이끈 정예들이었다. 지금 그 병력이 전부 수도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전 주군을 사형시키고 현 주군을 매정하게 내쳤던 황실에 대공령의 인간들이 호감을 느끼고 있을 리 없었다.

거기다 만약 그 수하들이 대공과 황제의 관계를 모르고 있다면? 그렇다면 지금 황제는 자신을 증오하는 칼날을 맞이하기 직전인 상태였다. 그리고 그 칼날을 통제할 자는 수도를 비웠다.

불현듯 지옥도 같았던 그녀의 결혼식이 떠올랐다.

공작은 자신의 감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그는 서신을 내팽개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 * *

렌스 백작은 오래 시간을 지체하지 않았다. 황제를 만난 그날, 그는 곧바로 행동을 개시했다.

대공의 승전을 축하하기 위해 입궁한 척하던 기사들이 본색을 드러냈다. 그들이 신호를 주자, 황궁에 거주하던 대공령 출신 인사들 또한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시종들은 조용히 기사들을 황궁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황제의 침실로 안내했고, 황제를 모시던 시녀들은 황제가 침실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그녀를 붙잡아 결박했다.

“이게 무슨 짓이지?”

아란이 분노와 당혹감이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시녀들이 태연하게 말했다.

“생각하신 그대로입니다.”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시중을 들던 시녀들이 전부 태도를 바꾸었다. 아란은 겁먹지 않으려 노력하며 저를 둘러싼 시녀들을 노려보았다. 전부 대공이 붙여 둔 자들이었다.

“로아크 대공이 시키던가?”

“대공 전하를 너무 원망하지는 마십시오.”

시녀 중 한 명이 싸늘하게 대답했다. 아란이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의외로 놀랍지는 않았다. 어쩌면,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예상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즉위했던 그 순간부터 황궁은 로아크 대공의 두 번째 근거지나 다를 바 없었다.

언제부터 이런 결정을 내렸는지는 모르겠지만, 대공이 마음을 먹었다면 아란으로서는 바꿀 길이 없었다. 아란은 체념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묶인 팔이 아플 텐데, 저항도 하지 않는 황제를 보며 시녀들은 자꾸만 스멀스멀 올라오는 가책을 억눌렀다.

객관적으로 좋은 주인이었다. 잘 웃지는 않았지만 다정하고 너그러워 몸과 마음이 편했고, 실수해도 화를 내는 일이 거의 없었다. 무엇보다 그들은 다른 사람과 달리 황제가 어떻게 대공에게 약탈당했는지 전부 보고 들어 알고 있었다. 황제가 대공에게 냉정하게 구는 이유를 그들만은 이해했다.

그러나 그들의 진짜 주인은 그녀가 아니었다. 또한 그들은 선대 대공 부처와 함께 사형당한 자들의 누이이자 자식이었다.

시녀들은 가책을 완전히 털어버리기 위해 황제를 포박한 줄을 더욱 세게 묶었다.

* * *

그 사이, 대공은 어느덧 수도에 거의 근접해 있었다. 예상보다 사흘이나 앞당겨진 여정이었다.

수도에 가까워질수록 대공의 마음은 점점 조급해졌다. 서쪽 국경으로 향할 때보다도 지금이 훨씬 더 두근거렸다. 자신이 없는 동안 황제가 어떻게 지냈을지 몹시 궁금했다. 그는 지친 병사들을 독려하며 속도를 높였다.

마침내 황궁 근처까지 왔을 때, 그는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음을 느꼈다. 아직 해가 지지도 않았는데, 밤낮으로 떠들썩하던 거리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무엇보다, 황궁을 수호해야 할 경비대가 거리까지 나와 황궁 주변을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험상궂은 얼굴로 쫓아내고 있었다.

대공은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서둘러 경비대에게 다가갔다.

“거리가 왜 이리 한산하지?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아니, 경고도 못 들었나? 오늘은 거리로 나오면…….”

험상궂게 인상을 찌푸리던 경비병이 대공을 알아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말단이라도 황궁에 소속된 이들 중 대공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경비병들이 허둥지둥 무릎을 꿇었다.

“아니, 전하. 벌써 돌아오셨습니까?”

대공은 그들의 인사를 무시하고 차게 물었다.

“황궁을 수비해야 할 경비대가 어째서 거리까지 나와 있나.”

“그게…….”

경비병들이 곧장 대답을 못 하자 대공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나마 연차가 있어 보이는 경비병 한 명이 어물거리며 말했다.

“저흰 그저 명령을 받고…….”

“황제 폐하의 명령인가?”

“저희는 말단이라 자세한 일은 잘 모릅니다. 일단 황궁으로 가시지요. 그러면 소상한 설명을 해줄 사람이 있을 겁니다.”

경비병들이 그를 황궁으로 안내했다. 조금 전 말한 대로, 자세한 내막까지는 모르는 그들은 대공이 예상보다 조금 일찍 돌아온 것 외엔 별다른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대공은 급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서둘러 황궁으로 향했다. 그리고 말도 안 되는 광경을 목격했다. 대공가의 문장이 새겨진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황궁 주변을 빼곡하게 둘러싸고 있었다. 대공은 그답지 않게 당황했다.

전장으로 떠나기 전, 황실 근위대에게 경계를 강화할 것을 명하긴 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병사들은 황궁을 지킨다기보다는 마치 포위하고 있는 것 같은 대형으로 서 있었다. 게다가 그중 대다수는 근위대가 아닌, 대공령에 있어야 할 제 병사들이었다. 이건 그의 계산엔 들어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불안감이 다시 한번 엄습했다.

그는 급히 황궁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제 충직한 수하들을 마주했다. 대공의 이른 귀환에 수하들은 전부 당황했지만, 곧 태연하게 주군을 맞이했다.

“아니. 벌써 도착하셨습니까, 전하. 미리 전령을 보내지 않으시고요.”

수하들이 물었다. 그들의 얼굴에 떠오른 건 놀라움과 당황, 그리고 주군과 재회한 기쁨뿐이었다. 죄책감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이 저지른 모든 일은 전부 대공을 위한 것이었으므로.

대공이 싸늘한 눈으로 제 수하들을 노려보았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너희들이 왜 수도에 있지?”

“전하의 승전을 축하하기 위해 왔습니다.”

그들이 감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역시 사실이었다.

“승전을 축하하기 위한 것치곤 과한 병력이다. 그리고 멋대로 자리를 비우라 명한 적은 없을 텐데.”

“…….”

그때까지도, 대공은 설마 제 수하들이 엄청난 일을 벌였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시키지 않은 행동은 하지 마라. 그리고 병사들은 왜 저런 모습으로 세워두었지? 꼭 황궁을 포위하고 있는 것 같군.”

대공은 오랜만에 만난 수하들을 조금도 반가워하지 않았다. 되레 엄격한 목소리로 병사들에게 포위를 풀 것을 명했다.

그는 대열이 풀어진 것을 확인하자마자, 곧장 말에서 내려 황궁 안으로 향했다. 제 수하들이 여기서 뭘 하고 있었는지는 나중에 들어도 충분했다. 일단은 황제를 만나는 게 우선이었다. 말도 없이 찾아온 수하들 때문에 마음 약한 황제가 놀라지는 않았을지 걱정이 되었다.

“어디로 가십니까?”

대공의 뒤를 따르던 자 중 한 명이 물었다.

“폐하께 가야겠다.”

이번에야말로 그들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바삐 걸음을 옮기던 대공도 그 사실을 눈치채곤 미심쩍은 눈길을 보냈다.

“할 말이라도 있나?”

찬찬히 그들을 둘러보던 대공은 렌스 백작이 없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대공령에 속한 귀족 중에서 가장 막강한 권한을 가진 그는 대공이 없을 때 실무를 도맡아 하는 인물이었다. 다른 귀족들을 전부 수도로 데리고 온 건 아마도 그의 결정이었을 것이다. 그런 그가 모습을 보이지 않자 대공은 또다시 기분이 뒤숭숭해지는 것을 느꼈다.

“렌스 백작은 어디 있나.”

“……백작은 지금 황궁에 없습니다.”

키가 멀대같이 큰 남자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자작 작위를 가진 그는 렌스 백작과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대공가에 충성해온 자였다.

“그럼?”

“백작은 황제를 추적하는 중입니다.”

대공은 한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