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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의 밤-59화 (59/146)

59화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곧 목걸이를 찾아 아란 앞으로 가져왔다. 다시 보아도 아름다운 자태에 시녀들이 감탄했다.

“도대체 어디서 나신 거예요? 이런 사파이어를 구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이전부터 목걸이의 출처가 궁금했던 시녀들이 은근히 아란에게 물어보았지만, 그녀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걸어드릴까요?”

“아니.”

아란은 단칼에 시녀의 제안을 거절했다.

대공이 선물한 이후 처음 꺼내는 목걸이는 다시 한번 살펴봐도 확실히 지나치게 화려하여 아란의 취향엔 맞지 않았다.

그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걸 내게 건넸을까.

아란은 커다란 사파이어가 뿌리는 빛을 감흥 없이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어렸을 때라면 몰라도 지금의 그녀에겐 그저 차가운 돌일 뿐이었다.

그는 내게 무엇을 원하는 걸까.

갑자기 정말 어처구니없는 생각이 들었다. 저 목걸이를 착용하고 대공을 맞이하면 그가 진심으로 기뻐할 것 같다는, 너무나 허황되어 차라리 망상에 가까운 그런 생각이.

아란은 목걸이를 만져보려다 허공에서 손을 멈췄다.

“다시 넣어두렴.”

“안 걸쳐보시려고요?”

시녀가 물었다. 아란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곤 목걸이에서 시선을 돌렸다.

어쩐지 내키지 않았다. 수치스럽게 그에게 안길 필요도, 거짓으로 웃을 필요도 없이 그저 목걸이를 한번 걸치면 그만인데도 말이다.

아란은 혹여 자신의 마음이 바뀌어 언젠가 저 목걸이를 착용하게 되더라도, 대공이 무심하게 넘기기를 바랐다.

만약에, 정말로 만약에 그의 눈에 아주 희미하게라도 기쁜 기색이 떠오른다면, 그 광경을 절대 제 눈으로 확인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시녀는 굳이 목걸이를 꺼내놓고는 걸쳐보지도 않고 바라보기만 하다 다시 넣으라는 황제의 명령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시키는 대로 했다. 어차피 살날이 며칠 남지 않은 황제였다. 이런 사소한 변덕 같은 건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었다.

시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꿈에도 짐작하지 못하는 아란은 가만히 거울을 바라보다 자신이 대공의 혀를 물어뜯었던 날을 떠올렸다.

그날, 그는 꼭 태어나 처음 화가 나서 그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사람 같았다. 어렸을 때부터 그를 보아왔지만 그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가 그렇게 뜨겁게 분노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아란은 처음 알았다.

그가 흘리던 피가 생각나 아란은 눈을 질끈 감았다. 무섭고 경황없는 와중에도 제 얼굴 위로 떨어지는 핏방울이 너무 뜨거워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아무튼, 서쪽 국경으로 떠나기 전의 대공은 정말 이상했다. 볼 때마다 다른 사람 같아 혼란스러웠다. 세 명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녀가 두려워하는 냉혹한 대공과, 다정했던 에녹과, 그리고 그녀가 모르는 낯선 남자.

아란은 떠나기 전 대공이 지었던 부드러운 미소를 생각했다. 그건 대공이 옛날 일을 흉내 내며 그녀를 조롱했던 때와는 달랐다.

대공과 재회한 이후로, 그녀는 늘 그에게서 에녹의 그림자를 찾았다. 그러나 정말로 그 흔적이라도 보고 나니 그러지 말아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에녹이어서는 안 됐다. 그는 다만 그녀를 죽일 듯 미워하는 잔악무도한 약탈자로 남아야 했다.

그래서, 그녀가 에녹까지 미워하는 일이 생겨서는 안 되었다.

* * *

점심을 먹은 후, 아란은 으레 향하던 집무실이 아닌 정원으로 나섰다. 햇볕을 쬐면 밤에 잠이 들 때 도움이 된다는 궁의의 충고 때문이었다.

그곳에서 그녀는 처음 보는 남자를 만났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신사였다. 그러나 젊은 청년 못지않게 탄탄해 보이는 몸을 갖고 있었다.

그는 아란을 보자마자 곧바로 한쪽 무릎을 꿇어 예를 표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로아크 대공 전하를 모시는 렌스 백작이라고 합니다.”

“렌스 백작……?”

아란이 중얼거렸다. 지방 귀족이었으나 아란도 그 이름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대공의 승전을 축하하기 위해 그의 가신들이 수도로 올라왔다는 말을 들었었다. 쏟아지는 졸음으로 정신없는 와중에 그들의 입궁 허가서에 손수 사인을 한 기억도 얼핏 났다.

대공이 총애하는 가신들의 이야기는 수도 귀족들의 입에도 곧잘 오르내렸다. 특히 렌스 백작은 2대에 걸쳐 로아크 대공을 섬겨 온 충신으로 이름 높았다. 그의 작위는 백작이지만 권력이나 영향력은 웬만한 대귀족 못지않았다. 다만 대공령에 틀어박혀 수도에는 거의 출입하지 않은 탓에, 아란은 그의 얼굴을 오늘 처음 보았다.

반면, 그녀의 시녀들은 꽤 반가운 얼굴로 백작과 눈인사를 나눴다. 무심코 아는 사이냐고 물으려던 아란은 시녀들 역시 대공령 출신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아란이 그에게 손을 내밀자 백작이 그녀의 손등 위에 아주 살짝 입을 맞추었다. 장갑을 끼고 있는데도 어쩐지 서늘한 느낌에 아란은 아주 미미하게 눈매를 찌푸렸다. 그러나 곧 표정을 감추고 백작에게 말을 걸었다.

“이제 일어나도 좋소.”

“감사합니다, 폐하.”

“대공령에서 수도까지 오려면 꽤 멀 텐데, 급히 오느라 고생이 많았겠구나.”

“혹 대공 전하보다 늦게 도착할까 봐 밤낮으로 말을 달렸습니다.”

백작이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대공과 아주 가까운 사이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그와 달리 백작은 다정한 성품 같았다.

“그러면 얼마나 걸리지?”

새삼, 아란은 수도에서 대공령까지의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도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분명 제국 안에 있는 땅인데도 그곳은 별개의 나라 같은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대공의 영지이기 때문인가?

하기야, 대공 역시 그녀의 신하라는 생각은 들지 않으니 자연스레 그의 땅 역시 서먹한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의 시중을 드는 시녀들 역시 전부 대공령에서 온 사람들인데도, 그들은 극히 대공령에 대한 이야기를 아꼈다.

“쉼 없이 달려도 한 달은 잡아야 합니다.”

“그렇구나. 시간이 촉박했을 텐데.”

아란은 내심 놀랐다. 그 먼 거리를, 오로지 대공을 축하하기 위해서 달려오다니.

대공이 꽤나 사랑받고 있음을 새삼 깨달으면서, 아란은 어쩌면 대공령에 속한 사람들이 자신을 미워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자의든 타의든, 그녀는 너무 오래 대공을 수도에 붙잡아 놓곤 했으니까.

아란은 부드럽게, 그리고 조금은 미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늘, 그대들의 주군을 짐 혼자 너무 오래 독차지하는 것 같아 미안하네.”

“아닙니다. 그게 대공 전하의 뜻이기도 하니까요.”

렌스 백작은 하마터면 알긴 아느냐고 황제에게 말대꾸를 할 뻔했다.

그는 간신히 목구멍까지 튀어나온 말을 다시 집어넣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생각보다 온화해 보이는 황제의 모습에 놀랐다. 큰 행사가 있을 때 먼발치서 가끔 볼 기회가 있었지만 그때는 거의 웃지 않아 오만한 성격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까이서 본 그녀는 너무 약해 보였다.

창백하고 차분한 얼굴에, 조금은 낯을 가리는 듯한 몸짓도 그와 다른 가신들이 상상했던 악독하고 오만한 군주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이내 백작은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걸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녀의 혈육들이 얼마나 악랄했는지, 그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저 얌전해 보이는 황제에게도 똑같은 피가 흘렀다. 그러니 대공을 그리 함부로 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황제의 온유한 얼굴도 가증스럽게만 보였다.

“하지만 두 번이나 그분을 서쪽 국경으로 보내신 건 너무하셨습니다.”

렌스 백작이 황제를 향해 은근한 원망이 담긴 말을 내뱉었다.

그녀는 가만히 눈을 내리깔았다.

“그래. 두 번이나 그를 위험한 곳으로 보내고 말았구나.”

죄책감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담담한 어조에 렌스 백작이 치를 떨었다.

역시, 겉모습은 그저 눈속임일 뿐이다.

“대공께서는 늘 폐하의 안위만을 염려하십니다. 폐하께서도 그분의 충정을 알고 계실 거라 믿습니다.”

“…….”

다정한 노신사가 언뜻 드러낸 적의에 아란은 대공의 수하들이 저를 싫어할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사실이었음을 확인했다.

그녀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고 난처한 표정만 지었다.

“그러니 그분을…….”

조금 더 귀히 여겨달라고 말하려던 백작이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황제는 곧 죽을 테니 쓸모없는 말이었다.

그녀가 어색하게 그의 시선을 피했다.

“먼 길을 왔으니 부디 즐기다 돌아가면 좋겠구나.”

마음이 불편해진 아란은 그 말을 남기고 서둘러 백작을 지나쳤다. 등 뒤로 백작의 시선이 따가웠다.

백작은 황제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내내 그녀를 노려보았다.

제 한 몸 지킬 힘조차 없는 여자를 죽여야 한다는 사실에 잠시나마 마음이 불편해졌던 게 우스워질 지경이었다.

그는 황제에 대한 마지막 연민을 버렸다. 그리고 그녀가 마음 편히 죽여도 좋은 상대라는 것에 감사했다.

* * *

대공의 승전소식은 저 멀리 다나르에도 전해졌다. 그 이야기를 들은 사일러스 공작은 황궁에 혼자 남았을 황제를 떠올렸다.

대공이 자리를 비운 동안은 황제도 조금 더 마음 편한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공작은 그 사실을 소소한 위안으로 삼았다. 지금쯤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했다. 이럴 때 떠올릴 황제와의 추억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 그는 못내 안타까웠다.

그는 황제의 명을 어기고 당장이라도 수도로 가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그러나 간다 해도 바뀌는 것은 없다는 얄궂은 사실을, 그는 지나칠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 오히려 가까워진 거리에 반비례해 갈망만 더 커질 거라는 것 역시.

어차피 안 될 거라면 빨리 접는 편이 낫겠지.

공작은 현실적으로 생각했다. 아무리 기다려도 황제는 그에게 오지 않을 것이다. 그에겐 상황을 바꿀 힘이 없고, 황제는 체념했으니 지금 이 상황이 서로에게 최선이었다.

그래도 만약 그녀가 도망친다면…….

그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망상을 떨쳐냈다. 지금 그의 앞엔 이루지 못할 사랑을 떠올리는 것보다 더 급한 일들이 쌓여 있었다.

영지로 내려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제 성에서 꼼짝도 할 수 없는 신세가 되었다.

공작이 그간 수도를 단 한 번도 방문하지 않은 건 황제의 명도 있었지만 실상은 전부 대공 때문이었다.

사실, 황제가 그의 수도 출입을 금하긴 했어도 그건 실제로 효력이 있는 명령은 아니었다. 제국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의 영주가 수도를 오가지 못하게 된다는 건 비단 그 개인만의 손실은 아니기 때문이다.

무역 거래 장부를 들여다보던 공작이 드물게 짜증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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