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대공은 악의적이고 폭력적인 감정엔 익숙했다. 그러나 이 기묘한 욕구는 그가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 낯선 감정이 그는 불편하고 거슬렸다.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라면, 그건 필요 없었다.
그가 이곳까지 와서 얻고 싶었던 것은 단 하나였다. 그녀는 그저 원망의 대상일 뿐, 제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 존재라는 확신.
그러나 과거의 자신은 이미 변질되어 사라졌다.
원망 따위는 전부 가라앉았다는 것을 알게 된 지금, 그와 그녀를 이어주는 것은 그의 안에 아직 남아 있는 일말의 분노뿐이었다. 그조차 끊어지는 순간, 그와 그녀의 관계는 그저 황제와 신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될 것이다.
지금과 다른 것이 있을까 싶어 실소를 흘리려던 그는 이내 얼굴을 굳혔다.
좋아하는 것도 없고, 제게 원하는 것도 없는 여자의 웃음을 바라고, 자신을 의지해주길 바라는 이 마음이 신하의 것이 아니면…….
대공은 그쯤에서 사고를 멈췄다. 더 깊이 파고드는 것이 두려웠다. 무엇이 그리 두렵고 망설여지는지 알 수 없었다. 잡념을 떨치기 위해 온 곳인데, 되레 마음만 더 복잡해졌다.
그는 자꾸만 꼬리를 물고 떠오르는 생각들을 억지로 기억 저편으로 밀어버렸다.
황제의 군사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야만인들이 슬금슬금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이 들고 있는 조악한 무기엔 하나 같이 시커멓게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야만인 중에는 자신이 죽인 자들의 신체 일부분을 장신구처럼 걸고 있는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대공은 그들의 몰골 따위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그의 머릿속엔 최대한 신속하고 간결하게 적들을 말살시키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인간 같지도 않은 반인반수들이 감히 황제의 이름과 명예를 입에 담았을 생각을 하니 차가운 분노가 치밀었다. 그는 죽음으로써 그들에게 주제를 알려주기로 마음먹었다.
대공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야만족의 우두머리가 대공을 보고 누런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아니, 이게 누구신가? 매번 이름이 바뀌던 그 애송이 아닌가. 네가 귀족인 줄은 몰랐군. 자존심이 너무 없어서 말이야.”
두 사람은 이미 몇 번이나 얼굴을 마주한 적이 있었다.
대공은 대답하지 않았다. 인간도 되지 못한 자와 말을 섞을 마음 같은 건 없었다. 그저 조용히 검을 뽑아 들었다.
야만족 사내는 무시를 당했는데도 화를 내는 대신 히죽히죽 웃었다.
“건방진 놈. 오늘에야말로 그 반반한 낯짝을 뭉개주마. 눈알은 파먹고 코와 귀로는 장신구를 만들어야겠다.”
대공은 그 끔찍한 위협을 한 귀로 흘렸다. 놈들은 제 머리카락 한 올 다치게 할 수 없을 것이다.
‘무탈히 다녀오도록.’
떨쳐내겠다고 마음먹은 것이 무색하게 또다시 황제가 생각났다. 기가 막히고 짜증스러운 가운데 설핏 웃음이 나왔다. 우유부단한 주군을 모시다 보니 그녀를 닮아가는 것일지도 몰랐다.
어느새 그는 눈앞의 남자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저 떨쳐지지 않는 한 사람만이 선명했다. 그는 이제 아란의 모습을 눈감고도 그려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엘케인 후작은 세상에 특별한 사람이 없다고 말했지만, 역시 그는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자신을 이렇게 흔들어놓는 사람이 특별하지 않을 리 없었다.
후작의 말을 부인하려는 듯 대공이 살짝 머리를 흔들었다.
그 모습을 본 야만족 우두머리가 흙바닥에 침을 탁 뱉었다.
“웃으니까 더 재수 없는 낯짝이구나. 네 놈이 과연 전투가 끝난 후에도 웃을 수 있을지 기대하겠다!”
거친 목소리에 대공은 상념에서 벗어났다. 그는 곧 표정을 굳히고 정면을 바라보았다. 어수선하던 기분이 순식간에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결국, 이곳까지 와서도 그는 감정을 떨치지도, 해답을 찾지도 못했다.
그러나 이젠 상관없었다. 그저, 그녀의 명대로 어서 무탈하게 수도로 돌아가고 싶었다. 자신이 믿고 의지할 만한 남자라는 걸 증명하고, 겁먹지 않도록 다정하게 품에 안아 어르고 입 맞추고 싶었다. 그가 떠나와 있으니 아마도 그녀는 살이 조금 쪘을지도 몰랐다.
언젠가 뺨에 닿았던 손끝이 허전했다.
기왕 찔 거라면, 볼이 통통해질 때까지 살이 올랐으면 좋겠다.
그는 망설임 없이 말에 박차를 가해 앞으로 달려나갔다. 저자들을 다 죽이면, 비로소 황제에게 돌아갈 시간이었다.
* * *
대공의 가신들이 의논을 막 끝내고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을 즈음, 서쪽 국경에서 대공의 승전보가 도착했다. 출정한 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는 내친김에 야만족들뿐만 아니라 마물까지 정리해버리고 수도로 귀환 중이었다.
예상보다 훨씬 빠른 귀환에 렌스 백작은 조금 당황했다.
“이렇게 된 이상, 일정을 앞당겨야겠습니다.”
가신들을 불러모은 백작이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다른 가신 하나가 의견을 냈다.
“그렇다면 전하께서 수도에 도착하실 예정일 근처에 맞춰 일을 처리하는 건 어떨까요? 돌아오시자마자 곧바로 황위를 물려받으실 수 있게 말입니다. 주군의 승전을 축하한다는 명분도 있으니 우리가 한 번에 수도로 향해도 의심을 덜 살 겁니다.”
“그것도 좋은 생각이로군요.”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 각오도 다지지 못했는데 이렇게 일이 빠르게 진행될 줄은 몰랐네요.”
가신들은 반은 얼떨떨하고, 반은 긴장한 상태에서 서둘러 수도로 향했다. 대공보다 빨리 수도에 도착하려면 한시가 급했다. 대공이 오기 전에 황제를 죽여야 그가 찬탈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쓰지 않을 수 있었다.
시간은 없었지만 그나마 다행인 건 황제를 시해하는 데 그리 많은 준비가 필요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별로 손쓸 것도 없었다.
지위고하에 상관없이, 황궁에 기거하는 사람 중 조금이라도 영향력 있는 자들은 전부 대공령 출신이었다. 게다가 황제의 친위대들조차 황제보다 대공을 더 따랐다. 친위대의 수장이 대공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덕분에 그들은 말단 시종, 시녀 한 명 매수하지 않고 무사히 황궁으로 입성할 수 있었다. 그들의 목적과 그 당위성을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황궁의 모든 이들이 전부 당연하게 그들의 계획에 동의했다.
렌스 백작은 이렇게 쉬운 일을 여태 미뤄둔 대공의 자비에 감탄했다. 그리고 그 자비를 몰라본 황제에게 한층 더 적개심을 키웠다.
“화를 내시겠지요?”
백작을 따라온 기사가 젊은 기사가 물었다.
“분명 그러실 겁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저희의 충심을 알게 되실 겁니다.”
모든 것이 대공을 위한 일이다. 백작은 그 말을 마음속에 새겼다.
분명 대공이 진노하리라는 걸 백작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제 손을 더럽혀 주군을 영광스러운 자리에 올릴 수 있다면, 그는 죽어도 상관없었다.
* * *
최근 들어 아란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정확히 어느 부분이 이상하다고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굳이 따져보자면, 황궁의 공기가 묘했다. 꼭 축제를 앞둔 것처럼 들뜬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싸늘한 침묵이 감돌기도 했다. 그럴 때면 아란은 가만히 있어도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을 제외하면 모든 것이 평소와 똑같았다. 대공이 수도를 비웠어도 이제 그녀를 무시하는 귀족은 없었고, 계획한 일들도 평탄하게 진행되는 중이었다. 객관적으로 아무것도 걸릴 것이 없었다. 단순히 눈에 보이는 대로만 생각한다면, 그녀가 즉위한 이래 가장 평화로운 나날이었다.
그럼에도 아란은 어쩐지 이 평화가 폭풍전야 같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이 기분이 정말로 위험이 닥쳤기 때문인지, 아니면 평화가 낯설어 지레 겁을 먹은 건지, 그녀는 분간할 수가 없었다.
불안감은 꿈에서도 그녀를 괴롭혔다.
요사이 꾼 꿈은 전부 악몽이었는데, 내용은 대체로 비슷했다. 결혼식 날, 형제들과 함께 대공의 손에 죽음을 맞이하거나, 아니면 부모님과 함께 마차에 깔려 죽는 꿈이었다.
섬뜩한 내용에 잠을 설치고 나면 종일 정신이 멍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보필해줄 대공이 없어 더 부지런히 일해도 모자란 상황에 엉뚱한 곳으로 마음이 기울어지니 자연히 업무 효율은 형편없었다.
오늘도 제때 일을 다 마치지 못한 아란은 밀린 일을 침실까지 가져왔다.
억지로 글자에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그녀에게 시녀들이 안마를 해주겠다며 다가왔다. 아란의 기분이 좋지 않은 탓인지, 요즘 시녀들이 유달리 살가웠다.
“너무 무리하지는 마세요, 폐하.”
시녀 한 명이 상냥한 목소리로 말을 건네며 아란의 어깨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녀의 손이 닿는 순간 이유 모를 섬뜩함이 엄습하는 바람에, 아란은 저도 모르게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아야……!”
뿌리치는 손길에 힘이 실렸는지 시녀의 손등은 금세 붉어졌다. 제 손등을 감싼 시녀가 놀란 눈으로 아란을 바라보았다.
아란 역시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얼른 손을 얻어맞은 시녀에게 사과했다.
“미안하구나. 짐이 요즘 잠을 못 이뤄 예민한 모양이야. 많이 아프니?”
“괜찮습니다. 조금 놀라긴 했지만 많이 아프지는 않아요. 모쪼록 폐하께서 오늘은 편안히 주무셔야 할 텐데 걱정이에요.”
시녀가 공손히 대답했다. 아란은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그러게 말이구나. 도대체 왜 이러는지…….”
다른 곳으로 관심을 돌리려 해봐도 도무지 꺼림칙한 기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사실 아란이 불안감에 시달린 건 그리 최근의 문제는 아니었다. 요 며칠이 유독 심할 뿐, 대공이 수도를 떠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쭉 이런 상황이었다.
아란은 제 모습에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대공에게서 벗어나길 바라면서도 정작 그가 없으니 불안해하는 모습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기가 막혔다.
도대체 뭐가 이리 불안한지 모르겠다. 심지어 모든 것이 잘 풀리고 있는데.
대공은 이미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수도로 귀환하는 중이었다. 오늘 낮엔 그가 열흘 안으로 수도에 도착할 거라는 전령을 받았다. 그녀가 말한 대로 아무 탈 없이 대공이 돌아오고 있었다.
이번엔 어떤 모습으로 그를 기쁘게 해야 하나.
아란은 그가 자신을 저버렸을 때를 잊지 않았다. 그때의 무력감과 비참함은 그녀의 마음속에 똑똑히 새겨져 있었다.
무엇을 해야 대공이 좋아할까.
그러나 그의 비위를 맞추는 것 역시 비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란은 지독하게 읽히지 않는 서류를 내려놓았다.
“사파이어 목걸이를 가져오렴.”
“얼마 전에 선물 받으신 그 목걸이 말씀이신가요?”
“그래.”
시녀들은 유달리 화려하던 목걸이와, 그 목걸이를 담기에 부족함이 없던 고급스러운 상자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