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아란은 귀족들이 몸을 사리는 이유를 이해했다. 서쪽 국경은 야만족뿐만 아니라 마물이 기승을 부려 제대로 훈련된 군사들도 검 한 번 뽑지 못하고 죽어 나가기 일쑤인 곳이었다.
그녀는 큰 시름에 잠겼다. 싫지만 황제로서 누군가를 그곳에 보내야만 했다.
사지가 될지도 모르는 곳에, 그녀 역시 소중한 이를 잃었던 곳에 보낼 누군가를 고르는 건 예상보다 훨씬 괴로운 일이었다.
그녀의 고민을 덜어줄 이는 이번에도 로아크 대공뿐이었다.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아무도 가지 않으려는 곳에, 그는 자진하여 가기를 청했다.
“굳이 공이 갈 필요는 없는 곳이다.”
아란이 완곡한 불허의 뜻을 내비쳤다. 두 사람의 특수한 관계를 배제하더라도, 대공 정도의 지위를 가진 이를 보내기엔 서쪽 국경은 지나치게 위험한 곳이었다. 그의 실력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만에 하나라도 잘못되어 그를 잃게 되면 큰일이었다.
“서쪽 국경은 제가 가장 잘 알고 있습니다. 그곳 상황을 잘 모르는 이를 보냈다간 피해만 더 커질 뿐입니다. 놈들에겐 개인적인 빚도 있으니, 제 손으로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대공이 말했다.
그는 아란의 결혼식에 맞춰 수도로 돌아오느라 완벽히 잠재우지 못했던 불씨를 이번에 완전히 꺼뜨려 놓을 생각이었다. 한 줌 거리도 안 됐던 벌레들이 제 세상을 만난 것처럼 날뛰며 함부로 황제를 입에 담고 있을 꼴을 생각하니 괘씸했다. 황제에게 도전할 수 있는 자는 세상에 오직 그 한 명이어야 했다.
그리고, 전쟁터에서 마구잡이로 검을 휘두르며 복잡한 마음을 정리하고 싶기도 했다.
황제를 마주할 때, 또 그녀를 생각할 때마다 느껴지는 이 질척하고 위험한 감정은 대체 무엇인지.
그는 그 감정의 정체를 파악하기보다는 떨쳐버리고 싶었다. 누구보다 아란을 증오했던 바로 그 장소에서.
“하지만…….”
아란은 오래 망설였다. 이제 그와 아란은 더이상 연인이 아니었지만, 불길한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대로 그를 보내면 또다시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그 마음을 읽은 것처럼 대공이 부드러운 어조로 그녀를 안심시켰다.
“걱정 마십시오, 폐하. 제가 패하는 일은 없습니다.”
“그건 짐도 알지만…….”
대공의 말대로, 야만족을 진압하기에 그보다 적당한 사람은 없었다. 다만 이렇게 불안한 건, 그저 그녀 자신이 겁이 많고 예민하기 때문일 것이다.
“한 달 내로 그들을 진압하고 돌아오겠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만에 하나 전황이 좋지 않을 것 같으면 곧장 지원을 요청하고.”
마침내 결정을 내린 아란이 신신당부했다.
“예.”
“그럼, 무탈히 다녀오도록.”
그 한마디에 대공의 눈매가 아주 잠시 부드러워졌다.
“다시 말씀해 주십시오.”
“상황이 어렵다면 지체 말고 지원을 요청하게.”
아란이 앵무새처럼 조금 전의 말을 반복했다.
“아뇨, 그다음 말 말입니다.”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탈히 다녀오라고……?”
그제야 대공의 입술이 만족스럽게 벌어졌다. 그 얼굴이 마치 소년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아, 아란은 잠시 당황했다.
제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인식하지 못한 사람처럼, 대공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반드시 그리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아란의 손등에 입을 맞추고, 그는 그녀의 집무실을 떠났다.
다시 수도로 돌아왔을 땐 이 복잡한 마음이 조금은 해소되어 있기를 바라며.
* * *
렌스 백작은 드디어 때가 왔음을 알았다.
그는 그간 대공이 황제를 어떻게 대했는지 전부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황제의 권위가 어디까지 추락했는지도 똑똑히 보고 들었다.
역시, 황제를 향한 대공의 충정은 진심이 아니었다.
이번 일은 아마 황제에게 대공이 보내는 경고였을 것이다. 그녀는 단지 허수아비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리고 언제든 그가 그녀를 버릴 수 있음을 알려주기 위해서 말이다.
백작은 드디어 대공이 건방진 황제를 몰아내고 황좌를 차지하려는 게 아닐까, 하는 기대를 품었다.
그러나 대공은 그의 기대를 무참히 저버렸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는 얼마 가지 않아 다시 황제에게 지극정성을 다하며 예전과 마찬가지의 태도를 보였다. 그러더니 곧 그녀의 명을 받아 전장으로 떠나버렸다. 다른 곳도 아니고 서쪽 국경으로 말이다.
그 소식을 들은 백작은 진노했다.
그곳이 어떤 곳인지, 황궁 안에서 곱게만 자란 황제는 모를 것이다. 그러나 백작은 황제의 그 순진하기까지 한 무지를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는 이번에야말로 황제에게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할 마음을 먹었다.
렌스 백작은 제 주인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다른 가신들을 전부 불러모아 그간 자신이 남몰래 생각해온 계획을 밝혔다. 그의 이야기에 모인 사람 전부가 진작 주군의 속내를 헤아리지 못한 자신들의 불충을 크게 자책하며, 한편으론 백작의 철저함을 칭찬했다.
그들은 곧 백작의 계획에 가담하여 본격적으로 황제를 몰아낼 계획을 세웠다.
대공이 서쪽 국경으로 향하며 대공령의 병력이 대거 빠져나간 상태였지만, 그 사실이 계획에 차질을 주지는 않았다. 가신들이 상대할 대상은 수도와 황궁의 병력이 아니라 황제, 단 한 명뿐이었으므로. 게다가 시종이나 사용인은 물론, 황제를 모시는 말단 시녀조차 전부 대공의 사람이었으니 일은 어려울 게 없었다.
“그럼 계획이 성공한 후에 황제의 처분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참고로 대공께서는 황제를 유폐하고 싶다고 하시더군요.”
어느 정도 계획의 가닥이 잡히자, 렌스 백작이 사후처리를 어떻게 할지 물었다.
“유폐만으론 부족합니다.”
깐깐한 인상의 가신이 강경한 어조로 말했다.
“그럼 어쩌면 좋겠습니까. 유폐로 모자란다면 어떤 벌이 합당할까요.”
백작이 거듭 물었다. 그러나 이번엔 선뜻 대답하는 이가 없었다. 그 침묵이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모두가 황제의 죽음을 바라고 있었다. 선대 대공 부처를 죽인 건 현황제가 아니라 그녀의 아비라는 건 알지만, 그만큼 황가를 향한 대공령 사람들의 원한은 깊었다.
“말씀은 없으셔도 모두 한마음인 것 같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백작이 말했다.
“때로는 죄인의 핏줄이라는 것 역시 죄가 되지요. 게다가 살려둬봤자 그 이후의 일만 곤란해지지 않겠습니까.”
또 다른 가신이 냉정하게 덧붙였다.
그 의견에 렌스 백작도 동의했다. 대공가가 무참히 몰락했을 당시 황제의 나이가 어렸던 것과 대공의 목숨을 구한 공을 따지면 선처를 고려해볼 만하지만, 그럴 마음은 들지 않았다. 먼저 대공의 충정을 무시한 건 황제였다.
“그럼 대공 전하껜 어떻게 알릴까요?”
누군가 소심한 목소리로 묻자, 백작이 웃으며 되물었다.
“굳이 말씀드려야 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 말은 자리에 모인 모두를 놀라게 했다.
“아무리 그래도 우리끼리 독단으로 일을 치르는 것은 너무 무모한 짓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무려 제국의 주인을 시해하는 일입니다.”
항의하는 사람들에게 백작은 침착하게 제 생각을 말했다.
“대공 전하께선 아마 찬성하지 않으실 겁니다. 생각해 보세요, 대공 전하께서 황위에 마음을 두셨다면 황제가 아직까지 살아있겠습니까? 그러니 일단 우리가 일을 저지르고, 반강제로 대공 전하를 황제로 추대합시다. 그렇지 않으면 전하께선 언제까지고 그 건방진 황제의 뜻대로 움직이실 거란 말입니다. 선대 대공 전하와 대공비 전하께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잊으신 건 아니겠지요?”
“백작의 말이 맞습니다. 마냥 주인의 뜻에만 순종하는 것만이 충정이라고 할 수는 없지요. 때로는 주군을 위해 과감한 선택을 해야 할 때도 있는 겁니다.”
특히 목청이 큰 가신이 소리 높여 백작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에 설득된 이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찬성하는 쪽으로 의견이 몰리자 머뭇거리던 자들도 일단은 동의했다.
그렇게 아란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이제 남은 일은 날짜를 정하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날은 생각보다 빠르게 왔다.
* * *
제 충직한 가신들이 무슨 계획을 꾸미는 줄도 모르고, 대공은 쉼 없이 말을 달려 서쪽 국경에 도착했다. 오는 길에 여러 번 마물을 만났지만 그의 적절한 대처로 큰 피해는 없었다.
그는 거의 1년 반 만에 다시 돌아온 서쪽 국경을 메마른 눈으로 지켜보았다.
야만족들의 기세가 대단하다더니, 과연 국경은 이전보다 더 참담한 모습이었다. 땅은 황폐해지고, 곳곳에 반쯤 부패한 시체들이 널려 있었다. 숙련된 기사들도 역한 냄새와 광경에 욕지기를 이기지 못하고 구토를 했다.
대공이 탄 말이 걸음을 뗄 때마다 발굽 아래서 백골이 파삭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그 소리에 대공이 미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과거에는 매일같이 맡아서 인지하지도 못했던 시체 썩는 냄새가 새삼스레 역겨웠다. 떠난 지 불과 2년도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 정도로, 이곳에서의 기억들이 까마득하게 오래전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는 곧 낡은 기억만큼이나 그가 느꼈던 감정 역시 무뎌지고 빛이 바랬다는 것을 깨달았다. 광기에 가깝던 격렬한 분노와 증오는 전부 타버려 이제는 희미하게 꺼져가는 불씨만 남아 있었다.
왜일까.
대공은 무엇이 자신을 변하게 했는지 생각해 보았다.
그새 안락한 생활이 익숙해진 탓일까.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불충분했다. 그보다 훨씬 중요하고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 그건 그가 되찾은 권력이나 무력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대공은 황제를 떠올렸다.
그 여자가 날 변하게 했을까?
그녀의 핑계를 대는 건 그럴듯했다. 분노도, 증오도 전부 황제에게서 비롯된 감정이었으니, 그것을 풀어낼 사람도 그녀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아란에게 고통을 되돌리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녀가 제 앞에서 울고 절망하는 건 꽤 기꺼웠다. 황제의 약한 모습은 오로지 저만이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저만이 볼 권리가 있었다. 그 사실에 상당히 비틀린 만족감을 느끼기도 했으니, 그게 원인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 싶었다.
그러나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은 남아 있었다.
가끔씩 치솟던 묘한 충동은 제가 변했기 때문에 나타난 분노의 또 다른 표현인가?
그러기에는 그것이 그에게 너무나 생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