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하의 밤-56화 (56/146)

56화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아란이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이야?”

순수한 궁금증이 담긴 얼굴에 입 맞추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성애의 의도가 담기지 않은, 그저 가볍고 온유한 그런 입맞춤. 그의 선물을 무시한 것도, 건방지게 혀를 깨문 것도, 이제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러나 그는 부드럽게 풀어지려는 입매를 굳히고 냉정하게 말했다. 그녀는 조금 더 고분고분해질 필요가 있었다.

“이미 몇 번이나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을.”

아란은 고개를 저었다. 한참이나 말이 없던 그녀가 마침내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또렷하게 말했다. 대단한 각오라도 한 듯 비장하기까지 한 얼굴이었다.

“그대가 원하는 건 바뀌었잖아. 나는 그게 무엇인지 알지 못해.”

그게 무슨 말이냐 물으려던 대공이 천천히 얼굴을 굳혔다.

그녀의 말이 그의 정곡을 찔렀다. 그가 느끼기에도 제가 바라는 건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변했다.

처음엔 복종이었다. 자존심을 버리고 온전한 그의 것이 되는 것.

그다음엔 웃는 얼굴이 보고 싶었다. 그건 아직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이제는 거기에 한 가지가 더 추가되었다. 그녀에게 그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그녀가 그에게 무언가를 원하는 것. 그것이 그가 아란에게 바라는 일들이었다.

그 변화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첫 번째는 그의 생각에 타당한 것이었다. 황제를 손쉽게 다루려면 그녀의 복종이 필수적이었으니까.

하지만 두 번째, 세 번째는? 하등 쓸모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것들을 위해 제가 한 어리석은 일들을 잊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기에?

믿을 수 없게도, 덜컥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그게 무슨 감정인지 이름을 알게 되면, 두 번 다시 돌이킬 수 없게 되리라는 확신이 강하게 들었다. 그를 송두리째 흔들고 무너뜨릴 수 있는 그 무언가가 그의 안에 도사리고 있었다. 대공은 생각하기를 멈추었다.

그의 침묵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아란은 입술을 깨물더니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말을 이었다.

“무엇을 원해? 나의 추락? 아니면 선양? 만약 내가…… 그대에게 가치를 잃었다면, 이리 성가신 방법을 쓸 필요 없어. 두 마디만 하면 돼. 이제 그 자리에서 내려오라고. 그리고 그대의 머리에 황관을 씌우라고. 그럼 그대는 찬탈자라는 오명을 쓰지 않아도 되지.”

침울하게 가라앉은 낯과 목소리가 그의 가슴을 선득하게 만들었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대공은 이를 악물고, 늘 하던 대로 조소를 머금었다. 그것으로 아란에게서 자신을 방어하고자 했다.

방어라니. 이 무력한 여자는 저를 공격할 어떤 것도 지니지 못했는데.

생각하기도 전에 버릇처럼 냉랭한 말이 흘러나왔다.

“전 황위에 관심 없습니다. 그랬다면 폐하께선 이 자리에 계시지도 못하셨을 겁니다. 제가 아끼는 그 몸도 이미 썩어 사라졌겠지요. 루아잔과 딜란처럼.”

죽은 선황과 황자의 이름이 언급되자 위협이라고 생각했는지 아란이 잘게 몸을 떨었다. 그녀가 겁에 질린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그대에게, 혹은 다른 이에게 선양하면……. 날 죽일 건가?”

대공은 황제가 생각하는 미래는 도대체 어떤 모습인지 궁금해졌다. 훨씬 나은 결과가 얼마든지 있는데도, 그녀는 그중 가장 절망적인 가능성만을 떠올리고 두려워했다.

“그럴 리가요.”

그는 황제의 어리석고 아름다운 눈동자를 바라보며 속삭였다.

“폐하께선 죽을 때까지 그 자리를 지키게 되실 겁니다. 저의 주군으로서, 또 제국의 주인으로서 말입니다.”

그의 단언에 아란은 안도하고, 동시에 절망했다. 그의 말을 전부 믿는 건 아니지만 제 목숨이 당장은 연장되었다는 사실에 안도했고, 괴로운 시간이 늘어나 절망했다.

그는 조그만 얼굴에 떠오른 감정을 전부 들여다보았다.

원수의 딸이자 누이였다. 그녀의 부모는 그의 부모를 죽였고, 그녀의 형제들은 그를 지옥과 같은 곳에 떨어뜨렸다. 그들이 전부 죽었으니 이제 대공이 죗값을 받아낼 수 있는 사람은 아란 한 명뿐이었다.

때때로 그는 황제에게 모든 진실을 밝힌 채 그녀를 몰아세우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그러나 딱 그만큼, 영원히 진실을 덮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이대로는 안 된다는 걸, 그대도 알지 않아. 나를 비참하게 만드는 건 상관없어. 하지만 내 노력까지 물거품으로 만들지는 말아줘.”

아란이 옷소매를 잡은 손에 슬며시 힘을 주고 간청했다. 그 말이 또다시 대공의 마음을 녹였다.

“귀한 몸을 적시며 여기까지 오셨으니 그 부탁은 들어드리겠습니다.”

그가 아란의 얼굴에 가볍게 입 맞추며 대답했다. 조금 전 떠올린 것처럼 다정한 키스였다. 그녀를 제 아래에 눕히고 만족스러울 때까지 몰아붙이는 일에 비교할 바는 아니었으나, 이쪽도 제법 만족스러웠다.

“난 그대의 속내를 알 수가 없어.”

아란이 허망하게 말했다. 대공은 피차 마찬가지라는 이야기를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이곳까지 온 목적은 이루셨습니까?”

그녀는 조그만 얼굴을 작게 끄덕였다.

“다행입니다. 그럼, 페하의 목적을 이루셨으니 제게도 즐거움을 주셔야지요.”

그가 아란의 희고 긴 목을 쓰다듬었다.

“아양이라도 부려보시든가.”

아란은 그의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그게 대공을 기껍게 했다.

“어떻게 아양을 떨어야 할까. 그대도 알다시피, 난 그런 일에는 서툴러 그대의 마음에 들지 모르겠어.”

“그것까지 제가 알려드려야 하는 겁니까?”

반은 답답하고, 또 반은 한심해하는 듯한 목소리에 아란이 난처하게 눈을 깜박였다.

“하지만 여기까지 오신 용기가 가상하시니, 이번만 특별히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대공은 못 이기는 척, 선심이라도 쓰는 척 말했다.

아란이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전에 없이 양순해 보여 그의 마음을 흡족하게 했다.

“제게 먼저 입 맞춰보세요.”

의외의 요구에 그녀는 내심 놀랐다. 아직 그녀는 한 번도 제 의지로 대공에게 먼저 닿은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아란이 조심스레 팔을 뻗어 그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대공은 순순히 그녀가 이끄는 대로 끌려갔다.

지척에 그녀의 입술이 있었다. 가는 숨결이 그의 입가를 간지럽혔다. 아까부터 모른 척하고 있던 달콤한 체향이 훅 끼쳐왔다.

애태우는 듯한 움직임에 참을 수 없어질 무렵, 가볍게 입술이 닿았다. 살짝 차가운 듯한 체온에 순간 모든 것이 무력해지는 기분이었다.

그가 가만히 있자, 조금 더 강하게 입술을 눌러 온 아란이 곧바로 옷깃을 밀어내며 살포시 거리를 벌렸다. 맞물렸던 입술이 떨어졌다.

부족했다.

대공은 저도 모르게 그녀를 붙잡고 한 번 더 입술을 포갰다.

“음……”

가볍게 빨고 혀로 살짝 두드리자 그에게 호응하는 것처럼 입술이 작게 열렸다. 안쪽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깊이.

정신을 차리자 아란은 의자에 거의 파묻힌 채로 그의 목을 껴안고 있었다.

“앞으론 이렇게 하십시오.”

아란은 숨이 차서 고개만 끄덕였다.

“그럼 뭐든 들어드릴 테니까.”

“응.”

“무엇을 원하십니까.”

대공이 물었다.

“……그대가 필요해.”

아란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녀에겐 그가 필요했다. 이번 일로 절실히 깨달았다.

대공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번에도 이긴 쪽은 그였다. 반대로 아란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이었다.

“잘하셨습니다.”

아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움직임을 따라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그녀는 대공이 마음을 바꾸기라도 할까 두려워 더 절박하게 그에게 매달렸다. 아직 물기가 가시지 않은 머리카락과 얼굴이 애처로웠다.

“이토록 폐하께서 절 간절히 원하시니 저로서는 내어 드릴 수밖에 없겠군요.”

우습지도 않은 연극이라는 건 알았다.

상관은 없었다. 애초에 그들의 모든 것이 연극이었다. 이제야 원래대로 돌아온 것뿐이다.

황제는 그를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누구보다 그를 필요로 했다. 그것이면 되었다. 그는 아란의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고 차갑게 얼은 뺨을 녹이려는 듯 문질렀다.

짧고도 긴 형벌이 끝났다.

그러나 두 사람의 마음은 각자의 생각으로 복잡하기만 했다.

* * *

단지 대공이 마음을 누그러뜨린 것만으로도, 아란은 이전의 권한을 모두 되찾았다.

그간의 고민과 노력이 모두 우습게 되었지만 자괴감에 빠질 여유도 없었다. 그동안 진행이 멈췄던 일들을 다시 시작하려면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랐다.

대공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이전보다 더 극진히 황제를 보필했다.

귀족들은 손바닥 뒤집듯 바뀐 대공의 행동에 당황하면서도 재빨리 태도를 바꾸었다. 그러면서 도대체 황제와 대공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저들끼리 떠들어댔다.

눈치 없는 자들이 사랑싸움 아니냐는 농담을 했다가 눈총을 받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다른 자들도 설득력 있는 추측을 내놓지는 못했다.

사람들의 궁금증은 점점 커졌지만, 황제와 대공은 약속이나 한 듯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던 가운데, 또다시 사고가 터졌다. 서쪽 국경의 야만족들이 다시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 것이다. 야만인들이 자잘하게 노략질을 일삼은 게 하루 이틀이 아니라지만, 이번엔 제법 문제가 심각했다.

원래 야만인들은 저들끼리도 사이가 나빠 좀처럼 뭉치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 야만족 중에서도 특히 난폭하고 잔인한 톨사이 부족의 우두머리가 다른 부족들을 규합하는 데 성공했다. 지금까지는 단순히 군량을 약탈하는 것으로 만족했던 그들이 세력을 불리면서 본격적으로 서쪽 국경을 넘보기 시작했다.

물론 전체적으로 보면 그들은 그리 숫자가 많지 않았지만, 교활하고 잔인했다. 적들의 잔인함엔 이골이 난 수비대들조차 그들의 악랄함을 보고 전의를 상실할 정도라고 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 근방의 영주가 놈들에 의해 잔인하게 살해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리고 이어진 승리에 도취된 야만족들의 수장이 조만간 수도의 황제에게 선전포고를 할 것이라는 소문도 돌고 있다고 했다.

그러니 사일러스 공작이 해적들을 소탕했을 때처럼 단순히 병력을 지원하는 것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방어선이 무너지기 전에, 아직 야만족들의 결속이 단단하지 않을 때 누군가를 보내 사태를 수습해야 했다.

그러나 누구도 선뜻 그곳에 가기를 자처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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