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명령을 내리고 문을 닫은 그가 아란을 향해 차게 내뱉었다.
“이 시간에, 이런 모습으로 저를 찾아오신 건 무슨 의도라고 생각해야 하는 겁니까.”
“난 그냥 그대와 대화를 하고 싶어서…….”
“싸구려 동정심을 사려는 여자에겐 흥미 없습니다.”
대공은 괜히 마음에도 없는 말을 늘어놓았다.
“동정심이라니…….”
대공의 시선이 노골적으로 젖은 몸을 훑자 아란이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순간 그는 제 행동을 의식하지도 못한 채 그녀를 끌어당겼다. 젖어 차갑게 식은 체온이 손바닥 아래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 몸을 제 체온으로 데우고 싶어 입 안이 말랐다.
그는 이런 식으로 얕은수를 쓰는 자들을 익히 봐왔다. 그러나 그 상대가 아란이 될 줄은 몰랐다. 분명 경멸하여 마땅한 행동인데, 도저히 손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하마터면 그간의 괘씸함도 전부 잊고 파랗게 질린 입술에 입 맞출 뻔했다.
“전하. 수건 가지고 왔습니다.”
문밖에서 하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분명 그렇게 했을 것이다.
퍼뜩 정신을 차린 대공이 아란을 구석으로 밀어내곤 응접실 문을 열어 하인의 손에 들린 수건을 다소 거칠게 낚아챘다. 그리곤 쾅 소리가 나도록 문을 닫고 다시 아란을 향해 돌아섰다.
그가 그녀의 등에 수건을 둘러주자 의도를 깨달은 아란이 고개를 저었다.
“……이럴 필요까진 없어. 시중이 필요했다면 내가 먼저 데리고 왔을 테니.”
“앓아누우신 후에 또 제 탓이나 하지 마십시오.”
대공이 퉁명스레 대답했다. 그러면서도 물기를 닦아내는 손길은 조심스러웠다. 아란은 가만히 그에게 몸을 맡겼다. 사실 젖은 상태로 있는 게 춥고 불편하기도 했다.
어느 정도 척척함이 가시자 아란의 낯빛이 한결 좋아졌다.
대공의 화도 조금 누그러졌다. 그러나 여전히 흡족하지는 않았다. 그는 축축해진 수건으로 제 머리에 묻은 물방울을 털어내곤 응접실을 나섰다.
“잠시 기다리십시오.”
졸지에 혼자 남겨진 아란은 고개를 떨구며 한숨을 쉬었다. 그제야 제 꼴이 눈에 들어왔다. 대공이 한 말의 의미를 깨달은 그녀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뜨거워졌다.
그의 말이 맞았다. 이 시간에 이런 모습으로 남자를 찾아온다면 누가 보아도 의도가 빤해 보일 것이다.
하기야, 아무래도 상관은 없을 것이다. 어차피 어떤 모습이든, 대공에게 그녀는 언제나 쉽고 우스웠으니까. 지금 그녀가 황제답게 차려입었다 한들 그 사실이 바뀌지는 않았다.
초조한 아란의 마음을 읽은 듯, 대공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돌아왔다. 그리고 그녀에게 뭔가를 건넸다. 남성용 셔츠와 바지였다.
“갈아입으세요.”
“…….”
대공의 것이 분명한 그 옷들은 한눈에 보기에도 크기가 맞지 않았다.
“사용인까지 전부 남자뿐이라, 여자 옷이 없습니다.”
대공이 짤막하게 덧붙였다.
아란은 군말 없이 옷을 받아들였다. 한번 닦아내긴 했어도 젖은 옷은 여전히 불편했다. 그리고 대공이 어떻게 생각하든, 그녀 스스로 조금이라도 더 말끔한 모습으로 있고 싶었다.
“어디서 입으면 돼?”
아란은 애써 태연한 척 물었다. 대공이 말없이 손가락으로 바닥을 가리켰다. 당돌하게 굴었던 것이 무색하게 아란은 허둥거렸다.
붉어진 뺨을 본 대공이 피식 웃으며 돌아섰다.
혹시나 그가 돌아볼까, 아란은 부지런히 옷과 신발을 벗었다. 젖은 천이 달라붙어 쉽지 않았지만 일단 벗는 데 성공했다. 밤중이라 편한 드레스를 입고 있던 게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대공에게 드레스를 벗겨 달라는 낯뜨거운 부탁을 해야 했을 테니. 속옷이 축축하긴 해도 완전히 젖지 않았다는 것 역시 다행이었다.
그녀가 셔츠를 걸칠 때까지 그는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셔츠는 그녀의 생각보다 더 컸다. 소매는 손을 다 덮고도 남아 길게 늘어졌고, 셔츠 끝자락은 허벅지 중간까지 다 가렸다. 아란이 평소 잠들 때 입는 나이트가운과 별 차이가 나지 않는 길이였다. 새삼 그의 체구가 아주 크다는 걸 상기했다.
셔츠 단추를 다 채운 아란은 바지를 바라보았다.
입을 수 있을까?
셔츠는 어떻게 걸쳤지만 바지는 무리가 있어 보였다. 대공이 허리띠를 같이 주긴 했어도 그의 치수에 맞춰진 것이 그녀에게 맞을 리 없다. 아란은 바지를 들고 잠시 난처하게 서 있었다. 셔츠만 입고 있느니 차라리 다시 젖은 옷을 입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했다.
아란이 움직이는 기척이 없자 다 갈아입었다고 생각했는지 대공이 몸을 돌렸다. 그러다 바지를 든 채로 어쩔 줄 모르는 아란을 보고는 뒤늦게 제 실수를 깨달았다.
“그건…… 못 입으시겠군요.”
그렇게 말하며 그는 드러난 종아리와 발목을 은근히 훑었다. 아란이 데인 것처럼 놀라며 뒤늦게 바지에 다리를 꿰었다. 그리곤 옷이 흘러내리지 않게 허리 부근을 꽉 쥐고 옆에 있던 의자를 당겨 앉았다.
대공은 아란을 말리는 대신 가만히 서서 그녀를 감상하듯 바라보았다.
“그리 입고 계신 걸 보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처음 뵈었을 때도 꼭 소년 같은 차림이셨죠.”
대공은 흙투성이가 된 모습으로 저를 노려보던 앳된 얼굴을 떠올렸다. 그는 자꾸만 숙이려는 얼굴을 잡아 억지로 시선을 맞추곤 그날의 흔적을 찾으려 애썼다.
아란은 조금 놀랐다. 대공이 그때를 기억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다지 떳떳한 첫 만남이 아니었기에 그녀는 조금 민망함을 느꼈다.
“기억 못 할 줄 알았는데.”
아란이 씁쓸하게 대답했다.
“어쨌거나, 약혼자를 처음 본 날이었으니까요. 제 예상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시기도 하셨고.”
아란도 그날 일을 어제처럼 생생히 기억했다.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짧은 인생을 통틀어 누군가에게 그토록 강렬하게 매료된 경험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아마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것이다. 그때부터 그녀는 그의 앞에선 늘 우습고 어리석어졌다. 연인의 껍데기만 남은 지금까지도.
아란은 두 손을 꼭 맞잡았다. 그리고 대공의 단단해 보이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전력을 다해 온몸으로 부딪혀도 미세한 금조차 낼 수 없을 것 같았다. 피를 흘리고 화를 낼 때보다도 고요한 지금이 더 두려웠다.
기껏 낸 용기가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과연 내게 그의 마음을 돌릴 힘이 있을까? 아직 내게 그럴 가치가 남았을까?
아슬아슬 유지되던 대공과의 균형이 깨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아란은 진작 느끼고 있었다. 그녀에겐 그 균형을 뒤집어엎을 힘이 없으니 그 시작은 아마도 그일 것이다.
그가 아란에게 바라는 것이 변했다.
그러나 아란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 길이 없었다. 그렇다고 그에게 답을 물을 용기는 더더욱 없었다. 대공이 그 질문에 답하는 순간이, 그녀의 미래가 결정되는 때가 될까 봐.
뒤늦게 이곳에 온 것이 후회되기 시작했다.
애초에 나오지 말 것을. 비가 내리기 시작했을 때라도 말을 돌렸어야 했다.
가만히 있으면 목숨이라도 더 오래 부지할 수 있었을 텐데, 제 손으로 절망적인 최후를 재촉하게 된 것만 같았다.
두려움에 입을 열지 못하는 아란 대신 대공이 다시 말했다.
“그러고 보니, 폐하께서 먼저 저를 찾으신 건 처음인 것 같습니다.”
“……그런가.”
“사과하러 오셨다고 하셨습니까.”
아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무슨 일을 사과하실지 들어나 볼까요.”
다 알면서 묻는 의도가 저열했다. 그녀가 여기까지 오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고, 얼마나 큰 용기를 내야 했는지 대공이 모를 리 없었다. 그는 늘 그녀보다 우위에 있었고, 그것을 너무나 잘 알기에 여유가 넘쳤다.
그럼에도 그는 늘 그녀의 입을 통해 두 사람의 위치를 확인시키게 했다. 제 입으로 제 처지를 낱낱이 고할 때면,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형편없는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그렇지만 아란은 일단 그가 시키는 대로 따랐다. 이번만은 어떻게 해서든 대공과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눠야만 했다.
“그대에게 상처를 낸 것, 사과할게.”
“그게 다인가요.”
냉랭한 반응에 아란은 눈을 깜박거렸다.
사실,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그리 잘못했는지, 어째서 그가 화가 났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그녀가 먼저 굽히고 사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기 때문에 그를 찾은 것뿐이다.
“그대의 호의를 거부한 것도…….”
대공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아무래도 이 답 역시 틀린 것 같았다.
이것도 아니라면 뭘까. 꼭 수수께끼라도 하는 것 같았다. 대공은 원래도 속을 알 수 없었지만 특히 최근 한 달간은 멋대로 다정하게 굴었다가, 또 언제 그랬냐는 듯 냉정하여 도무지 그 의도를 종잡을 수가 없었다.
대공이 쌀쌀맞은 어조로 내뱉었다.
“제 도움이 필요하셔서 절 찾아오신 게 아닙니까.”
그 힌트에 그제야 아란은 답을 알았다. 그렇지만 그건 되레 혼란만 가중시켰다.
그에게 원하는 게 없다고 말했던 것이 황제로서의 권위를 전부 내려놓아야 할 만큼 큰 잘못인가?
차라리 그가 앞선 두 오답을 말했다면 더 수긍이 갔을 것이다.
“…….”
망설이는 그녀를 바라보던 대공이 흥이 식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용건이 끝나셨다면 이만 돌아가십시오. 새 겉옷과 마차를 내어드리겠습니다.”
그가 막 아란의 곁을 지나려 할 때, 그녀가 그의 옷소매를 잡았다. 아주 미약한 힘이었다. 그러나 그의 발을 멈추게 하기엔 충분했다.
멈춰 선 대공이 오만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알려줘. 내가, 어떻게 하면 되는지 말해줘. 어떻게 하면 그대가 이 형벌을 거둘지.”
끝내 아란은 대공이 원하는 사과의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러나 붙잡는 몸짓만으로도 그의 분노는 당황스러울 만큼 쉽게 풀어졌다. 대공 스스로도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대체 이건 무슨 상황일까.
지금까지 긍정적이든, 혹은 부정적이든 그의 기분을 이렇게 좌우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싫지 않았다. 그것은 생소하면서도 동시에 익숙한 감정이었다. 녹색 눈동자가 강한 염원을 담고 자신을 응시하는 것이 기꺼웠다.
“제발, 대공…….”
아란이 속삭였다. 그를 원해서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상관없었다.
문득, 대공은 여자 때문에 나라를 망하게 했던 어리석은 군주들의 기분을 조금은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들을 무너뜨린 여자들은 야망을 품은 여자도, 굳건한 기개를 지닌 여자도 아닌, 아란흐로드처럼 유약하고도 미욱한 여자였을지도 모르겠다. 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야만 하는 그런 여자.
“폐하께서 황제라 다행입니다.”
대공은 솔직한 속내를 담아 중얼거렸다. 둘의 상황이 반대였다면 분명 그는 암군이 되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