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그는 궁금해졌다. 조력자 없이 그녀가 언제까지 귀족들과 저렇게 대치할 수 있을지. 제 무능력함을 깨닫게 된 후에도 과연 제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을지.
“전부터 참고 있었지만, 더는 안 되겠습니다. 저로서는 도통 폐하께서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폐하께서 그토록 미워하시는 귀족들 역시 폐하의 백성입니다.”
후작이 성을 내는 소리에 대공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미워하다니, 무슨 말을 그리하시오. 후작.”
“미워하시는 게 아니고서는, 건국부터 황가를 모셨던 공신 가문들을 이리 대하실 수는 없는 겁니다.”
대공은 경멸스러운 눈초리로 비에른 후작을 힐끗 노려보았다.
괘씸한 마음에 그녀를 저버리려는 마음을 먹긴 했지만, 막상 다른 자들이 아란 앞에서 함부로 구는 꼴을 보니 속이 뒤틀렸다.
그는 당장이라도 후작의 얼굴을 후려치고 싶은 기분을 억누르며 황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기를 기다렸다.
도와달라는 말 한마디면, 아니, 애처로운 눈길 한 번이면 그는 그녀의 건방진 행태를 전부 용서하고 아무 일 없던 것처럼 편을 들어줄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황제는 끝끝내 홀로 후작과 맞섰다.
두 사람의 갈등이 격해진 가운데, 회의장 분위기는 전에 없이 살벌했다. 몇몇 귀족들이 이쪽을 힐끔거리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대공은 아무 말도 없이 자리를 지키고만 있었다.
황제의 편을 들었던 귀족들이 슬금슬금 대공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의견을 바꾸었다. 그럼에도 황제의 녹색 눈동자가 대공을 향하는 일은 없었다.
그 태도가, 정말로 그에게 원하는 것이 없다는 강력한 의지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왜 그 사실이 이토록 분하고 충격적인지, 대공은 까닭을 몰랐다.
그는 내내 말없이 황제를 노려보다가, 회의가 끝나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나섰다.
그 후로 대공은 더 이상 어떤 자리에서도 황제를 옹호하거나 편들지 않았다. 혹 누군가 황제를 험담하는 일이 있어도, 묘한 미소만을 지을 뿐 지적하는 일도 없었다.
결코 먼저 나서서 황제를 비방하거나 끌어내리지 않았지만, 그녀를 위태롭게 만드는 데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 * *
대공이 황제를 버렸다.
교활한 귀족들은 기민하게 그 사실을 눈치챘다. 놀랍다는 반응이 반, 그리고 진작 이렇게 됐었어야 했다는 반응이 반이었다. 왜 갑자기 대공이 돌아섰는지 누구도 이유를 알지 못했으나,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황제가 가장 강력한 지지 기반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대공이 두려워 겉으로나마 황제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시늉이라도 했던 귀족들은 이제 드러내고 그녀를 무시하기 시작했다.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느껴지는 그 반응에, 아란은 분노보다도 당혹스러움을 먼저 느꼈다.
대공과 다툼 아닌 다툼이 있고 나서 고작 한 달도 흐르지 않았다. 그녀는 제가 생각보다 훨씬 무력했음을 절절히 깨달았다.
겉으로 보기엔 이전과 그리 달라진 게 없었다. 그러나 이제 아란은 회의에서 완전히 발언권을 잃었다. 그녀를 둘러싼 모두가 은근히, 혹은 대놓고 아란을 소외시켰다.
황궁은 여전히 사람들로 붐볐지만, 그 중 아란을 찾는 이는 없었다.
이게 그의 벌이구나.
아란은 절절히 깨달았다. 대공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그거야말로 아란에겐 지나칠 만큼 효과가 좋은 형벌이었다. 그간 그녀가 필사적으로 쌓아 올렸던 것들은 그의 미약한 손짓 한 번에 흔적도 없이 무너질 위기에 처했다.
무시를 당하는 건 이미 익숙하니 참을 수 있었지만, 겨우 받아들여진 정책들마저 수포로 돌아가는 건 두고 볼 수 없었다. 아란은 참담한 심정을 억누르며 대공과 대화를 나누려 시도했지만, 그는 단 한 번도 응하지 않았다. 어쩌다 우연히 마주칠 때도 그녀를 보지 못한 것처럼 지나쳤다.
그러나 이따금 따가운 시선을 느끼고 돌아보면 대공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전에 없이 냉정한 눈으로, 그녀가 무너지는 과정을 낱낱이 확인하려는 듯이.
아란은 대공이 자신의 추락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의 마음을 돌리지 못하면 영원히 이 상태가 계속되리라는 것도.
1년 넘게 공들인 일들이 무너지는 데 고작 몇 주가 걸렸다. 이제 원점이니 더 떨어질 곳이 없으리라 여기는 건 아주 바보 같은 판단이었다. 바닥은 끝이 없다는 걸, 아란은 그간의 경험으로 뼈저리게 배웠다.
여기서 더 바닥이라니…….
등골이 서늘했다. 그렇게 둘 수는 없었다.
그녀는 황제였고, 응당 그만한 의무가 뒤따랐다. 그 의무를 수행할 능력이 부족하다면, 차기 황제를 찾아 선양이라도 하여 미래를 도모해야 했다.
선양.
어쩌면 그것이 대공이 바라는 바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아란이 생각하기에도 그녀보다는 그가 황제가 되는 편이 여러모로 옳았다. 모든 제국민이 원하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지만 선양하고 나면, 나는 어떻게 되지?
그 이후에 일어날 일을 생각하면 아란은 겁부터 났다. 어디 한적한 시골이나 외국으로 가게 된다면 그나마 다행일 것이다. 아니면 최악의 경우…….
아란은 참혹하게 죽은 제 두 오라비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을 죽이는 데 주저함이 없던 대공의 모습까지도.
그때는 자신이 순전히 운이 좋아 살아남았다는 걸 아란은 알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죽는 건 싫었다. 그녀는 이제 고작 이십 해 남짓을 살았을 뿐이다.
그러나 이대로 버티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녀는 몇 날 며칠을 더 고민했다.
그리고 어느 날 밤, 마침내 결심을 다지고 황궁을 빠져나왔다.
후드가 달린 긴 망토를 뒤집어써 얼굴을 가린 그녀는 마부도, 마차도 없이 말 한 마리에 의지하여 무작정 대공의 저택으로 향했다. 그의 저택을 방문한 적은 없지만 대략적인 위치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녀는 운이 나빴다. 목적지까지 반도 가지 못했는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빗줄기가 거세지며 곧 천 안쪽으로도 빗물이 척척하게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아란은 말머리를 돌리지 않았다. 이대로 돌아가면 두 번 다시 용기를 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대귀족들의 저택이 모여 있는 타운하우스에 도착했을 땐 그녀는 이미 흠뻑 젖은 후였다. 대공의 저택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크고 호화로운 저택들 중에서도 대공의 것이 가장 컸다.
밤중에 말을 탄 여자가 불쑥 찾아오자 야간 경비를 서던 병사들이 의심스럽게 쳐다보며 경계했다.
“누구냐! 용건이 있다면 신분을 대고, 아니라면 썩 물러가라.”
“…….”
그녀는 말없이 뒤집어썼던 후드를 벗었다. 축축하게 물기를 머금은 머리카락이 순식간에 젖어 들었다.
비를 맞아 평소보다 색깔이 짙었으나 분명히 구분되는 황족 특유의 옅은 백금발은 그 혈통을 알아보기엔 충분했다. 놀란 경비병들이 서둘러 문을 열었다.
* * *
“전하, 황제 폐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아직 밖에 계시는데, 어떻게 할까요?”
집사가 숨이 차도록 급히 달려와 고했다. 그 말에 대공이 짧게 코웃음을 쳤다.
고작 한 달짜리 고집이고 자존심이었나.
솔직히 실망스러울 정도였다.
하기야, 그 여자에게 기대한 내가 어리석었지.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창가로 향했다. 고작 한 달짜리라고 조롱했으면서도, 이제야 저를 찾아온 게 몹시 괘씸했다.
분이 풀릴 때까지 밖에서 빗소리나 들으시라고 해볼까.
“잠시 기다리시라고 전…….”
느긋하게 입을 열던 그가 문득 말을 멈췄다. 창밖으로 확인한 황제는 우산을 씌워줄 시녀 한 명 동반하지 않고 그대로 비를 맞으며 서 있었다. 여름이라 빗방울이 차갑지는 않았지만, 약한 몸으로는 그것조차 버티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저런 멍청한……!”
그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그대로 뛰쳐나갔다.
* * *
“어…….”
우산을 드리워 준 이의 얼굴을 확인한 아란이 빠르게 눈을 깜박였다.
지난 한 달 내내 그녀를 고민하게 했던 아름답고 냉혹한 얼굴이, 속내를 알 수 없는 무심한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미 젖은 그녀에게 우산을 씌워주느라 그 역시 비를 맞고 있었다.
“이 날씨에 여기까진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황궁에 틀어박혀 계시지 않고.”
대공이 짓씹듯 물었다.
“그대에게……, 사과하고 싶어서…….”
아란이 추위로 굳은 혀를 억지로 움직여 대답했다. 묘하게 어눌한 발음을 알아챈 대공이 있는 대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일단 들어오십시오.”
그는 아란의 머리 위에만 우산을 씌운 채 문을 향해 턱짓했다.
“우산은 괜찮아. 나 때문에 그대까지 젖을 필요는 없어.”
아란이 작게 중얼거렸다. 대공은 너무 화가 나서 하마터면 욕설을 내뱉을 뻔했다. 멍청한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냥, 안에 들어갈 때까지 입 열지 마십시오.”
그러면서도 그는 서둘러 아란을 저택 안으로 들여놓았다. 아란이 지나간 곳마다 물이 흥건하게 고였다.
응접실에 들어서고도 그녀는 흠뻑 젖은 겉옷을 벗지도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제국의 주인이시라는 분이 이 꼴을 하고서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는 손수 아란의 젖은 망토를 벗겨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그러자 망토 아래서 드러난 모습에, 대공은 한순간 숨을 죽였다.
입은 옷은 이미 안쪽까지 전부 젖어 그녀의 굴곡을 전부 드러내고 있었다. 피부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천이, 비 냄새 섞인 체취가 아찔하게 느껴졌다.
괘씸한 마음도, 분노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란은 한 달간 고집을 부렸다. 그건 대공이 딱 그 기간만큼 금욕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는 불시에 솟아오르는 욕망에 이를 악물었다. 당장에라도 그녀를 응접실 바닥에 쓰러트리고 그대로 집어삼키고 싶었다.
그 사정을 모르는 아란은 대공이 생각보다 많이 화가 난 모양이라고 짐작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탐욕스럽게 아란을 응시하던 대공의 시선은 그녀의 턱 부근에서 멈췄다. 갸름한 턱 아래 물방울이 쉴 새 없이 고여 떨어지고 있었다. 뒤이어 파랗게 질린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정욕은 여전했지만, 덕분에 이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대공은 곧장 응접실 밖으로 나가 하인에게 커다란 수건을 가져올 것을 명했다. 굳이 하인을 안으로 들이지 않은 건 아란의 저런 모습을 다른 자들에게 보일 마음이 없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