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하의 밤-53화 (53/146)

53화

잠시 후 그녀가 작게 말했다.

“나, 나는……. 그대에게 바라는 게 없어.”

천천히, 대공의 입술에 걸렸던 미소가 빠져나갔다.

아란이 재차 말했다.

“어차피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대를 두려워하는 것뿐이잖아…….”

무서워 눈을 감는 바람에 아란은 대공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지 못했다.

한참 후에 대답이 돌아왔다.

“왜, 왜 아무것도 바라시는 게 없다고 하십니까? 말씀만 하시면 전부 안겨드릴 수 있는데.”

얼핏 사랑에 빠진 남자의 구애처럼 낭만적으로 들리는 말이었으나, 목소리는 차디찼다.

한계까지 치밀어 오른 화로 대공은 눈앞이 홧홧해지는 걸 느꼈다. 뭘 해주려고 해도 밀어내는 아란의 저 꼬락서니가 한심하면서도 넌더리 났다.

그럼에도 이렇게 놓지 못하는 이유는…….

그는 자신이 황제에게서 얻어내고 싶은 걸 늘 제대로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머리가 뒤죽박죽이었다.

한 명은 분노로, 한 명은 두려움으로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무겁게 침묵이 깔린 가운데, 아란은 눈을 질끈 감고 숨을 죽인 채 곧 제게 닥칠 형벌을 기다렸다. 그러나 한참 기다려도 그가 다시 그녀에게 손을 대려는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눈을 감은 채로도 그가 자신을 따갑게 노려보고 있다는 건 느낄 수 있었다.

“대공…….”

겁에 질린 아란이 속삭였다. 대공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가 겨우 용기를 내어 눈을 떴을 때, 침실 문이 거칠게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 * *

대공은 밤이 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황제의 말을 곱씹었다.

좋아하는 것이 없다고 했다. 제게 원하는 것 역시 없다고 했다. 그저 싫은 것만이 있고, 두려움만이 있다고 말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는 건 굳이 따져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두려움에 질린 아란의 눈동자를 떠올리자 대공의 수려한 낯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겁먹고 떠는 걸 한두 번 본 것도 아닌데, 그 눈빛은 유달리 뇌리에 진득하게 남았다.

그는 들고 있던 술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반도 넘게 남은 독주가 작은 잔 안에서 찰랑거렸다. 혀에 술이 닿을 때마다 느껴지는 알싸한 아픔이 그때의 기분을 상기시켰다.

차라리 잘라버리지.

그 와중에도 있는 힘껏 저항하지 못한 그녀의 우유부단함을 그가 새삼 비웃었다. 그러나 정말 비웃어야 할 사람은 바로 황제가 아닌 그 자신이었다.

세상에, 별장이라니. 그런 천치 같은 짓을 했다는 걸 스스로 용납할 수 없었다.

“부르셨습니까, 전하.”

대공의 낯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냉정했지만, 노련한 집사는 그가 잔뜩 화가 났다는 걸 눈치챘다. 제 주인은 죄를 짓지 않은 이에게는 벌을 내리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이 넘어갔다.

“이번에 지었던 별장, 부숴버려라.”

완공된 지 고작 이레밖에 되지 않은 별장을 부수라는 명령에 집사는 조금 당황했다. 그 별장을 짓기 위해 주인이 퍽 많은 돈과 노력을 들였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주인의 의견에 토를 다는 건 용납되지 않는 행위였으므로, 공손히 명을 받들었다.

“알겠습니다. 내일 아침에 철거 작업을 진행하라고 일러두겠습니다.”

“아니, 아예 흔적도 남지 않게, 부지 전체를 밀어.”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러고 나서도 대공의 마음은 조금도 후련해지지 않았다. 별장을 부수고 부지를 밀어도 한심한 짓거리를 했다는 사실은 변함없었다.

그는 그 사실을 잊고 싶은 것처럼 남은 술을 단번에 비웠다. 찢어진 혀가 화끈거렸다. 혀뿐만이 아니었다. 존재조차 잊었을 만큼 오래된 등의 흉터 역시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왜 진작 말하지 않았을까. 왜?

아란이 도대체 무슨 마음으로 순순히 그의 말을 따른 건지, 그는 너무나 궁금했다.

꼴에 약한 소리는 하기 싫어서? 아니면 단순히 내가 무섭기 때문에?

이유가 뭐든 짜증나는 건 매한가지였다. 목 안쪽에서 뜨거운 것이 왈칵 치밀었다.

그는 화풀이를 하듯 빈 잔을 거칠게 벽에 내던졌다. 아란의 비명처럼 높고 애처로운 소리가 들리고, 부서진 유리의 잔해가 눈물처럼 반짝이며 쏟아져 내렸다. 그 장면이 잠시 대공의 시선을 빼앗았다.

그는 홀린 듯 유리 조각 위로 손을 뻗었다.

첫 감촉은 서늘했지만 곧 뜨거워졌다. 대공이 멍청하게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날카로운 단면에 찔린 손끝에서 피가 솟았다. 그제야 그는 제가 또다시 한심한 짓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하.”

진절머리가 났다. 고작 술 한 잔에 취한 사람처럼 도통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자신도, 한 줌 거리도 안 될 그 고고한 자존심을 버리지 못해 매번 일을 키우는 황제도.

그는 버릇처럼 모든 원망과 분노를 황제에게 돌렸다.

주제도 모르는 여자 같으니.

그녀를 살려주고, 누구보다 고귀한 자리에 올려준 건 다름 아닌 바로 그였다. 그는 여전히 제 처사가 퍽 자비롭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황제도 그것을 알고 있다고 여겼다.

실제로도 황제는 그를 퍽 의지하고 있었다. 평소에는 그렇게 밀어내고 진저리를 치면서도, 정작 난처하고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그가 손을 내밀면 못 이기는 척 받아들이곤 했다.

마음 졸이고 있던 게 빤히 보이는데 아닌 척 시치미를 뚝 떼는 꼴이 얼마나 우스운지, 황제는 알지 못할 것이다. 대공은 그것도 모르는 척해주었다.

그런 주제에 어떻게 감히 자신을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수 있는지,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자존심 때문에 상처를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면, 그가 무서워서 참았다면 끝까지 숨겼어야 했다. 그녀의 우유부단한 태도야말로 모든 것을 엉망으로 꼬아버리는 원흉이었다.

그가 없다면 황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감히 그를 거부하기만 하는 건방진 황제에게, 대공은 이번에야말로 그 사실을 단단히 일깨워주기로 했다.

* * *

한바탕 난리를 치르게 될 거라는 아란의 예상과 달리 대공은 며칠이 지나도록 잠잠했다. 그에 한시름 놓으면서도, 그녀는 섣불리 긴장을 풀지 못했다. 그는 변덕스러울 뿐만 아니라 묘하게 옹졸한 구석이 있어 아란이 잘못한 일을 결코 잊어버리지 않았다.

대공을 생각하니 자연히 안색이 흐려졌다.

그러나 하필이면 그 때, 그녀는 맞은 편에서 다가오는 그를 발견했다. 아란은 이대로 왔던 길을 돌아갈까 싶었지만, 이미 대공이 그녀를 발견한 뒤였다.

망설이는 아란을 향해 대공이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태도로 인사했다.

“날씨가 맑습니다, 폐하.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그래……. 대공은 어떻소.”

“저 역시.”

그가 아란의 손을 잡아 그 위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대답했다.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그러나 평소라면 어디로 가느냐, 여가엔 무엇을 할 예정이냐 온갖 사소한 것들을 전부 물어오던 그가 지금은 그대로 입을 다물어 버렸다.

아란은 잠시 머뭇거렸다. 이대로 그를 보내기엔 저번 일이 마음에 걸리고, 그렇다고 괜히 말을 꺼냈다가 그의 심기를 거스르는 건 역시 싫었다.

한참 고민하던 그녀가 애매한 질문을 던졌다.

“그……. 불편한 곳은 없는가.”

사실 그의 분노도 걱정스러웠지만, 그보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혀 피를 흘리게 한 일이 그녀에게는 더 충격적이었다. 그의 눈동자만큼이나 선명한 붉은 액체가 목과 가슴으로 떨어지던 감촉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걸 눈치챈 대공은 하마터면 황제의 면전에서 그녀를 비웃을 뻔했다. 고작 피 몇방울 흘린 일에 죄책감을 느끼고 며칠 동안 벌벌 떨었을 모습을 상상하니 이제는 한심하다 못해 딱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시치미를 뚝 떼고 대답했다.

“염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있어도 대단치 않으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아란은 힐끗 대공의 입 안을 살폈지만 이미 그는 입을 다물어버린 터라 상처가 얼마나 큰지 확인할 수 없었다.

“혹 나중에라도 불편해지면 꼭 짐에게 말하게. 알겠는가?”

아란이 신신당부했다.

“예.”

대공은 약간 성가신 기분으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아란은 안심한 얼굴로 가던 길을 재촉했다.

두 사람이 다시 만난 건 이틀 후 열린 회의에서였다. 사일러스 공작의 승전보는 이제 효과가 떨어져, 회의장 분위기는 평소와 다름없이 냉기가 흘렀다. 소작료 문제를 놓고 아란은 귀족들과 팽팽히 대립하는 중이었다.

그래도 아주 조금은, 귀족들이 전보다 자신을 신뢰하고 있다는 걸 아란은 느낄 수 있었다. 비록 한 손에 꼽을 만큼 적지만, 그나마 양심적인 귀족들 몇 명이 그녀의 의견을 지지하고 나선 것이다. 비에른 후작만 아니었어도 그럭저럭 괜찮은 자리라고 여겼을지도 몰랐다.

착취라고 밖엔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소작료를 받고 있던 그는, 누구보다 아란에게 경고를 많이 받은 요주의 인물이었다.

후작이 큰소리로 외쳤다.

“저번 조세 건부터 정말 너무하시는 게 아닙니까? 백번 양보해 조세는 국가를 부강하게 하는 일이니 그렇다 치겠습니다. 하지만 소작료를 받는 건 지주의 권리입니다. 아무리 폐하라 하셔도 그 권리까지 통제하실 권한은 없습니다.”

“그래. 후작의 말대로 소작료를 받는 건 지주들의 권한이오. 하지만 그 소작료가 법적인 한계치를 넘는다면 그건 권리가 아닌 수탈이 아닌가. 짐에겐 그대들이 법을 준수하도록 이끌고 감독할 의무와 권한이 있소.”

“수탈이라니요?”

비에른 후작이 길길이 날뛰었다.

그 꼴을 관망하던 대공이 미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황제가 괘씸한 마음에 어지간하면 끼어들고 싶지 않았지만, 후작이 저런 식으로 황제에게 주제넘게 구는 꼴을 보니 몹시 거슬렸다.

결국, 그는 참지 못하고 후작에게 한마디 했다.

“목소리가 큽니다, 후작. 폐하께 예를 갖추십시오.”

“큼, 송구합니다. 너무 흥분하여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후작이 괜히 헛기침을 하며 언성을 낮췄다. 그리고 조금 누그러진 어조로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도 아시다시피, 법적 기준을 지키는 귀족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이 회의장 안에있는 이들 중에서도 과연 몇 명이나 그 기준을 준수하고 있을 것 같습니까. 법도 중요하지만 관행도 생각하셔야지요. 조금만 융통성을 발휘해 주십시오, 폐하.”

그럼에도 여전히 뻔뻔한 발언에, 아란이 깊게 한숨을 쉬었다.

“법보다 관행이 중요하다니, 짐은 그대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는 후작이야말로 융통성을 발휘하여 소작료를 내리는 게 어떠한지?”

이번에야말로 후작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대공은 입술 안쪽을 지그시 눌러 웃음을 참고는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란을 바라보았다. 제 처지도 모르고 그에게 대들 땐 세상 누구보다 괘씸하지만, 지금처럼 다른 사람 앞에서 꼿꼿하게 구는 건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그 기분은 오래가지 못했다.

후작을 노려보는 황제의 얼굴 위로 서글픈 낯이 겹쳐졌다. 그에게 바라는 것이 없다는 힘없는 목소리가 환청처럼 귓가에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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