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마침내 별장에 도착했을 땐 긴장이 풀려 몸이 후들거릴 정도였다.
목걸이처럼 마냥 크고 화려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별장은 소박하고 아기자기했다. 물론 보기에만 그렇다는 걸 아란도 알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다듬어져 바닥에 깔린 저 자갈조차도 수도 근방에선 채석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둘러보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아란은 별장 주변에 흐드러지게 핀 꽃이 리시안셔스인 것도 모른 채, 그것에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곧장 안으로 들어섰다.
내부는 아늑하고 조용했다. 다행히 그건 마음에 들었다. 기왕 왔으니 대공의 말대로 여기 있는 동안엔 전부 잊고 지내자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 생각해보니 나쁠 것도 없었다. 여기엔 전국 각지에서 올라오는 서신도, 그녀와 기 싸움을 하려 드는 귀족도, 그리고 대공도 없었다. 다만 마차를 타고 오는 길이 조금 괴로웠을 뿐이다. 그 고비도 무사히 넘겼으니 모든 것이 해결됐다고 생각했다. 긴장이 풀어진 아란은 금방 잠에 빠졌다.
그러나 아직 다 아물지 않은 상처는 무의식 속에 잠기고 나서야 진짜 모습을 드러냈다.
꿈속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무시무시한 폭우였다.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이 들리며 눈앞에서 부황과 모후가 탄 마차가 산산조각 났다.
천둥소리와 말 우는 소리, 그리고 누군가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아란은 소스라쳐 꿈에서 깨어났다. 그러나 비명 소리는 여전히 이어졌다. 목 안쪽이 칼로 쑤신 것처럼 아팠다. 정신을 차리니 그녀는 계속 비명을 지르고 있었고, 시녀들이 전부 달라붙어 그녀를 깨우는 중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폐하!”
아란은 손으로 자꾸만 비명이 터지는 입을 틀어막았다. 내쉰 숨을 다시 들이마시자 조금씩 안정이 되었다.
잠시 후, 그녀가 한층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비가 오는 것 같아. 세상이 물에 잠기면 어떡하지?”
갑자기 황제가 엉뚱한 소리를 하자 시녀들은 알아듣지 못하고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시녀 한 명이 나긋한 태도로 그녀를 달랬다.
“비가 많이 내리는 꿈을 꾸셨나 봅니다. 하지만 걱정 마세요. 벌써 며칠째 하늘이 화창하답니다. 물을 드릴까요, 폐하?”
“그래? 그런데 왜 자꾸만…….”
아란은 그들을 뿌리치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리고는 창문을 열어 직접 밖을 살폈다. 시녀의 말대로,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엔 하늘을 휘감아 도는 별무리만 선명했다.
서늘한 밤바람에 조금씩 이성이 돌아왔다.
“아…….”
뒤늦게 제 어리석은 행동을 깨달은 아란이 얼빠진 소리를 냈다. 그러나 이미 이곳에 있고 싶은 마음은 완전히 사라진 후였다.
“황궁으로 돌아가야겠다.”
“예? 이 밤중에 말이신가요?”
시녀들은 아직도 황제가 잠이 덜 깬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아란이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당장 채비를 해라.”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없는 황제의 재촉에 시녀들은 어리둥절하면서도 그녀의 말을 따랐다.
지금 황제를 모시는 시녀들은 대다수가 로아크 대공령 출신이라 선선대 황제가 정확히 어떻게 죽었는지 자세히는 알지 못했다. 다만 황제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으므로 눈치껏 몸을 사렸다.
다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도 아란은 내내 불안에 떨었지만, 내색하지 않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아랫사람들 앞에서 상처를 드러내 연민의 눈초리를 받고 싶지는 않았다.
열흘은 떠나 있을 거라던 황제가 이튿날 해가 뜨기도 전에 돌아오자 시종과 시녀들은 당황한 눈치였다.
아란은 어째서 벌써 돌아왔냐는 물음들을 전부 무시하고 침실로 향했다. 익숙한 공간에 도착하고 나서야 마음이 놓였다. 아란은 옷을 갈아입지도 않고 그대로 침대 위에 누워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리고 그 안에서 숨죽여 울었다.
역시, 별장은 그녀를 괴롭히기 위한 또 다른 구실인 게 분명했다.
* * *
아침 일찍 입궁했던 대공은 황제가 돌아왔다는 소식에 서둘러 그녀를 찾아갔다. 그리고 엉망이 된 얼굴의 황제를 마주하고 미간을 미미하게 찌푸렸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떠날 때보다 안색이 더 나빴다.
“왜 벌써 돌아오셨습니까? 무슨 문제라도 있었던 겁니까?”
천연덕스럽게 묻는 모습에 아란은 대답 대신 이를 악물었다. 아직도 귓가에 천둥소리가 들리고, 눈앞에 불빛이 명멸하는 것 같았다.
아란은 고통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크게 심호흡을 했다.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여 그를 즐겁게 하고 싶지 않았다.
“마음 써준 것은 고마우나, 대공. 나는 그냥 황궁에 있고 싶어.”
“문제가 있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대공이 다소 삐딱한 어조로 말했다. 제 잘못이 무엇인지도 모른다는 얼굴이었다.
아란은 절망에 차 대답했다.
“난, 별장이 싫어.”
이번에도 기대가 무너지자 대공은 정말로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차게 내뱉었다.
“제가 준 건 받기 싫으십니까?”
“뭐?”
무도하다고 해도 좋을 만큼 뻔뻔한 질문에 아란은 말을 잊었다.
“사실대로 말해보십시오, 폐하. 화내지 않을 테니까.”
그 말에 아란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대공은 그녀의 웃음을 보긴 보았다. 원하던 방식은 아니었지만.
몇 번이나 비실비실 웃음을 흘리던 아란이 물었다.
“사실을 말해야 할 쪽은 내가 아니잖아.”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건 언제나 그였다. 그러면서도 아란만은 솔직하길 원했다.
대공은 여전히 퉁명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저는 폐하를 속이지 않았습니다.”
“나는……, 늘 그대의 말을 믿고 싶어.”
“그럼 믿으시면 됩니다.”
대공과의 대화는 꼭 평행선 같았다. 마주 보고 있긴 하지만 진짜 속내는 영원히 만나지 못하는. 그건 아란의 심신을 몹시 고되게 만들었다.
“그래, 믿을게. 그러면 궁금한 게 있는데.”
“예.”
“공은 내가 왜 별장을 싫어하는지 알지?”
“말씀해 주지 않으신 걸 제가 어찌…….”
거기까지 말하다가, 대공은 입을 다물었다. 뒤늦게 긴박했던 과거의 한 장면이 떠오른 탓이었다.
어떻게 그걸 잊을 수 있었을까.
황제가 부모를 잃고, 그의 등에 기다란 흉터가 아로새겨진 날. 모든 것이 뒤엉켜버린 그 날. 그때 두 사람은 별장으로 가고 있었다.
비로소 그는 아란이 어째서 단 하루도 다 채우지 못하고 황궁으로 되돌아왔는지를 깨달았다. 그리고 그 이유를 깨닫는 순간, 대공의 기분은 끝을 모르는 지저로 곤두박질쳤다.
그는 아란의 턱을 잡아 올렸다. 아란은 그와 눈 마주치기를 거부하듯 시선을 내렸다. 눈꺼풀 아래 길게 드리워져 떨리는 속눈썹이 애처로웠다.
아, 그래.
그 속눈썹을 보며 대공은 인정했다. 그는 줄곧 화가 난 상태였다.
언제부터였을까. 그녀가 되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오늘 아침부터? 허전한 목을 봤을 때? 아니, 사일러스 공작이 그녀에게 치근덕거렸을 때부터였다. 다시 생각해보니 황제가 그 작자 앞에서 새살거렸을 때부터였던 것 같기도 했다.
어쩌면 그보다 전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는 과거를 계속 거슬러 올라갔다. 아란이 제 사냥감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때부터, 웨딩드레스를 입은 그녀를 보았을 때부터, 그녀에게 버림받았을 때부터…….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심지어 그 화가 누구에게 난 건지도 몰랐다. 저 아둔한 황제인지, 혹은 그 아둔한 여자에게 비정상적일 만큼 집착하는 자신인지.
“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난 가기 싫다고 말했어.”
“그딴 식으로 말하면 누가 알아듣는데.”
갑자기 대공이 험한 말을 하자 아란은 전신의 피가 싸늘하게 식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겁을 집어먹었다. 어쩔 수 없는 반응이었다. 대공의 기분만큼 그녀에게 절대적인 건 없었다. 그가 기분이 좋으면 좋은 대로, 나쁘면 나쁜 대로, 아란은 늘 휩쓸리기만 했다.
그 반응이 재차 그를 분노하게 했다.
대공은 그대로 조그만 입술을 삼켰다.
“읍……!”
외마디 비명은 그의 입속으로 삼켜졌다. 놀란 아란이 본능적으로 그에게 벗어나려 몸부림쳤다. 대공은 아란을 끌어안고 그대로 함께 침대 위로 쓰러졌다.
급작스러운 움직임에 그녀가 잠시 정신을 차리지 못한 사이, 제 아래에 깔린 가녀린 몸을 그가 내려다보았다.
그냥 늘 해왔던 대로, 그녀를 굴복시키고 울리는 게 맞았다. 괜히 우습지도 않은 꼴이나 보자고 시간 낭비할 필요가 없었다. 어쩌면 황제가 좋아하는 것도 바로 이런 것일지도 몰랐다. 거부하다가도 결국엔 아래를 흠뻑 적시고 매달려 오는 걸 보면.
분노가 이성을 잡아먹은 것도 모르고, 그는 제멋대로 생각했다.
“대공, 잠…… 읏,”
그가 평소보다 훨씬 거칠게 혀뿌리를 당겨 올리고 드레스를 우악스럽게 잡아 뜯었다. 천이 찢어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커다란 손이 여린 속살을 함부로 침범했다.
아란이 저항하면 할수록, 대공은 점점 난폭해졌다. 드레스는 이제 거의 넝마가 되어 입지 않은 것과 다름없었다.
믿기지 않지만, 아란은 이전 관계들에선 그가 나름대로 그녀를 배려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지금 그는 그녀의 몸과 마음 전부를 무참히 짓밟아버리고 싶은 것 같았다.
잡아먹을 듯이 입안을 헤집던 입술과 혀는 떨어져 나갔지만 아란은 이제 비명을 지르지 못했다. 무서웠다. 그러면서도 춥지도 않은데 저절로 이가 딱딱 부딪혔다. 그 소리를 들은 대공이 피식 웃으며 재차 입을 맞춰 왔다.
그 순간, 아란의 떨림이 멎었다.
그에겐 그저 단순한 유희일 뿐인가? 내 마음을 죽일 이 행위가…….
공포로 확장된 동공 깊숙한 곳에서 불꽃이 튀었다.
분노가 두려움을 이겼다. 아란은 그의 어깨와 등을 세차게 할퀴며 그의 혀를 깨물었다. 거의 생존본능에 가까운 반응이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대공이 그녀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뒤늦게 제 행동에 놀란 아란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몸을 가릴 생각도 못 하고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기껏 그에게서 멀어진 보람도 없이 발목이 잡아당겨지는 바람에 제자리로 돌아오고 말았다.
대공은 별로 아픈 기색도 없이 입안에 고인 피를 뱉어냈다. 그리고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좋습니다. 그럼 제가 오늘처럼 건방지게 나서는 일이 없도록 먼저 말씀하십시오. 명확하게, 구체적으로. 무엇을 원하시든 전부 들어드릴 테니까.”
그가 전에 없이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란은 그저 떨기만 했다. 분노가 가시자 남은 것은 두려움뿐이었다. 피가 철철 흐르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웃고 있는 지금의 대공은 기괴하게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아란의 가슴팍 위로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제가 무슨 꼴인지 모르는 대공은 계속 다정한 척 그녀를 재촉했다.
“말해보세요. 어서.”
말하지 않으면 그에게 잡아먹힐지도 모른다고 아란은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