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그땐 제법 즐거워하셨던 것 같은데요. 무엇이 폐하의 섬세한 심기를 거슬리게 만들었습니까?”
그 물음에 아란은 시선을 내렸다.
빛이 있으면 그늘도 있다. 제국의 주인이라면 그 양면을 전부 들여다보아야 했다. 번화한 항구 도시, 아름다운 야시(夜市)의 등불을 떠올릴 때면 어김없이 그 뒤편 빈민가 아이들의 얼굴이 뒤따랐다.
그날 이후, 아란은 종종 꿈을 꾸었다. 야윈 아이들이 아귀처럼 달라붙어 그녀의 살을 뜯어 먹었다. 그 모습마저 너무 가여워서, 아란은 죽어가는 와중에도 제 몸이 너무 앙상해 아이들이 배가 차지 않을 것을 걱정하며 아이들을 힘껏 끌어안았다.
그 마음을 전부 설명하려면 또 대공이 멍청하다며 비웃을 것 같아서, 아란은 또다시 모호한 대답만 했다.
“그냥.”
그 미적지근한 반응이 그의 눈엔 반항처럼 보일 거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대공은 불쾌감을 억지로 참아 눌렀다. 그는 나직하게 웃음을 터뜨리고는 앙탈 부리는 고양이를 대하듯 아란의 뺨을 가볍게 쓸었다.
“좋은 건 없고 싫은 것만 잔뜩이군요. 역시, 지나치게 까다로우신 분입니다.”
아란은 조개처럼 입을 다물었다. 대공의 그 말은 마치, 허울뿐인 황제 주제에 유별나다며 그녀를 책망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럴 의도가 아니었기에 조금 억울해진 아란은, 대공이 돌아간 후 뒤늦게 제 취향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끝내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했다.
* * *
엘케인 후작의 저택에선 매일 같이 연회가 벌어졌다. 사교계의 저명한 인사인 엘케인 후작은 원래 몰락한 남작가의 딸이었으나, 전 엘케인 후작과 결혼하여 남편 사후에 작위를 물려받았다. 한때 사교계의 보석이라 칭송받던 미모는 세월이 흘러 빛이 바랬지만, 그녀는 여전히 생기 넘치고 우아했다.
그녀의 흐린 하늘색 눈동자에 키가 매우 훤칠한 남자가 들어왔다. 매번 초대하지만 한 번도 오지 않았던 자였다. 후작은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그린 듯한 미소를 짓고는 그에게 다가갔다.
“무슨 바람이 불어 여기까지 행차하셨나요, 대공 전하.”
“머리가 복잡할 땐 후작께서 여는 연회만큼 좋은 곳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잘 찾아오셨네요.”
후작이 우아하게 몸을 틀어 그를 안내했다.
저택 응접실 여기저기 놓인 테이블마다 도박이 한창이었다. 그 옆에선 물담배에 취한 젊은이들이 누워 있었다. 대공은 후작을 따라가며 그들을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마침 게임이 새로 시작하려는 곳이 있군요.”
엘케인 후작이 한 테이블을 가리키며 자연스레 대공을 그곳에 앉혔다. 그리고는 그녀 본인도 슬쩍 그 자리에 꼈다.
카드와 칩이 몇 차례 오가고, 후작이 대공 쪽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십니까, 전하?”
“별 것 아닙니다.”
“제 눈을 속일 생각은 마세요. 이래 봬도 사람 속 읽는 재주 하나는 뛰어나답니다. 손자뻘인 젊은이의 마음이라면 더더욱.”
대공은 주름진 후작의 뺨을 바라보았다. 분명 후작이 몇 배나 나이가 들었는데, 이제 겨우 스물 언저리인 황제보다 그녀 쪽이 더 기운차 보였다.
후작이 대공의 귀에 은밀히 속삭였다.
“연애 문제인가요?”
“연애라고요?”
대공이 코웃음을 쳤다. 그러면서도 그녀와 제 관계를 설명할만한 다른 표현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예 틀린 말은 아니지.
해명하는 것도 귀찮아 대공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엘케인 후작이 흥미롭게 눈을 빛냈다.
“세상에. 그냥 던져본 말인데 진짜일 줄이야. 나이가 들어 놀랄 일이 별로 없을 거라 장담했는데,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겠군요. 그래요, 어떤 여자가 전하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까?”
대공은 카드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대답했다.
“세상에서 가장 아…….”
아둔하다고 말하려던 그는 표현을 바꾸었다.
“실은 잘 모르겠습니다. 워낙 까다로워서요.”
“그래요. 하지만 자책은 마세요. 원래 젊은 사내들이 여자 속을 알기란 어려운 법이니까요. 제아무리 대단한 대공이시라 해도 말입니다.”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엘케인 후작이 소녀처럼 깔깔 웃었다. 어딘지 통쾌하다는 반응이었다.
“놀리시는 겁니까.”
“설마요.”
후작이 제 패를 살피며 재차 말했다.
“젊은 청년이 여자를 연모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죠.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보세요. 다른 사람들에겐 비밀로 해드릴 테니까요.”
그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엘케인 후작이 사교계의 거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데에는 그녀의 무거운 입이 한몫 톡톡히 했다.
한동안 침묵하던 대공이 문득 물었다.
“여자들은 무엇을 좋아합니까?”
“정말 그분에게 푹 빠지셨나 봅니다. 궁금하네요. 전하께 그런 걸 묻게 만든 여자가 누구인지.”
푹 빠졌다고.
대공의 입술에 조소가 떠올랐다. 하기야, 푹 빠지긴 했다. 그 몸에.
서투르나마 최초로 그에게 쾌락을 알려준 건 바로 황제였다. 그 영향 때문인지 그는 아직도 그녀가 아닌 다른 여자를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사실, 그건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니랍니다. 사내들이 좋아하는 걸 여자들도 좋아하기 마련이지요.”
“하지만…….”
대공이 답지 않게 말꼬리를 늘이며 뜸을 들였다. 그러나 이어진 말엔 명료한 확신이 담겨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보통 사람들과는 다릅니다.”
황제는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나약하고, 훨씬 고집이 세고, 그리고 훨씬 위태로웠다.
“이럴 수가!”
백작이 이번에야말로 파안대소했다. 여타 귀족과 달리 가식 없는 호탕한 웃음소리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힐끗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한참 후에야 웃음을 그쳤다.
“정말 놀랍군요, 대공 전하. 하지만 세상에 그리 특별한 사람은 없답니다. 특별하게 여기는 마음만이 있을 뿐이죠.”
대공은 그녀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으나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그러니 걱정 마세요. 다른 사람들이 좋아하는 걸 그 여자도 좋아할 겁니다.”
“그럼 다시 한번 질문하겠습니다. 후작께서는 무엇을 좋아하십니까? 특별히 기억에 남는 선물이 있습니까?”
“저는…….”
과거를 떠올리는 후작의 눈이 몽롱해졌다. 그 얼굴이 꼭 아직도 사랑에 빠진 소녀 같았다.
“죽은 전남편이 제게 청혼할 때 별장을 사줬던 기억이 나는군요. 지금도 매년 그곳에서 겨울을 나지요.”
“별장.”
대공이 중얼거렸다. 그가 생각하기에 그건 퍽 괜찮은 선물 같았다.
황제는 좋아하는 건 없지만 싫어하는 건 많았다. 그 중엔 황궁도 포함되어 있었다. 가끔은 한적하고 조용한 곳으로 보내 쉬게 하면 좋을 것이다. 아란은 순행이 싫다고 했지만, 그는 그녀의 들뜬 얼굴을 아직도 기억했다. 막상 황궁을 나서면 또 마음이 달라질지도 몰랐다.
“감사합니다. 후작.”
“천만에요. 도움이 된다면 제가 영광이지요.”
대공이 말한 상대가 황제일 거라곤 조금도 예상 못 한 후작이 빙그레 미소지었다.
* * *
대공은 엘케인 후작의 조언을 충실히 따랐다. 한번 결정하자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조급해졌다.
별장을 새로 지으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니 이미 지어진 별장을 구입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손보았다. 완성된 별장은 완전히 마음에 든 건 아니지만 그럭저럭 흡족했다.
마지막으로, 별장 주변에 리시안셔스를 가득 심자 모든 준비가 끝났다.
이번엔 웃어줄까.
대공은 어리석은 기대를 품었다.
* * *
“별장?”
별장을 지었다는 대공의 말을 들은 아란이 아연하게 되물었다.
별장이라니. 그녀는 그 단어를 떠올리기만 해도 숨이 턱 막혔다. 루아잔과 딜란은 부황과 모후의 사고 이후에도 아무렇지 않게 여름 별장을 드나들었지만, 아란은 그러지 못했다. 하물며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대공이 어떻게 제게 별장을 선물할 수 있는지, 그녀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번엔 또 무슨 생각일까?
놀란 아란의 반응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대공이 태연하게 덧붙였다.
“이미 일정을 짜놓았습니다. 요양 겸 다녀오십시오.”
선심이라도 쓰는 듯한 말투에 아란은 더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 때문에 감히 황제의 일정을 말도 없이 멋대로 바꾼 건에 대해선 화도 나지 않았다.
아란은 잠시 그의 제안을 완곡하게 거절할 말을 골랐다.
“일이 바쁜데, 굳이 지금 가야 할까.”
나름대로 소심한 항의였다. 대공이 코웃음을 쳤다.
“폐하께서 계신다고 안 될 일이 해결되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가 무심히 내뱉은 말에 아란이 울컥했다. 맥락 없는 조롱도 그랬지만, 저런 식으로 그녀의 약점을 건드릴 때면 그대로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가느다란 손가락에 쥔 펜대가 설핏 떨렸다. 대공은 그것을 눈치챘지만 그리 대수롭게 여기지는 않았다. 제 말이 사실이기도 했고, 골치 아픈 일은 전부 제쳐두고 며칠간 전원생활을 즐기다 오면 지금 내뱉은 말 정도는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고맙게 여길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황제가 다시 황궁으로 돌아올 때쯤이면 내심 저 음울한 낯이 화사하게 개어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마음 같아선 함께 가고 싶지만, 말씀하신 대로 일이 바쁘니 저는 남겠습니다.”
그가 아란의 속내도 모르고 지껄였다. 아란은 얼른 시선을 깔아 점점 불안해지는 마음을 숨겼다.
* * *
사흘 후, 아란은 대공이 원하는 대로 별장으로 떠났다. 대공이 선물한 별장은 예전 여름 별장보다도 조금 더 거리가 가까워서, 마차를 타고 한나절이면 충분히 도착할 정도였다.
별장으로 향하는 길은 맑았다. 그러나 아란은 자꾸만 불안하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금방이라도 폭우가 쏟아져 내리고 벼락이 떨어질 것 같았다. 속이 메스껍고 이마엔 식은땀이 맺혔다.
이건 또 새로운 괴롭힘일까.
“편찮으십니까, 폐하?”
한눈에 보기에도 불편해 보이는 황제에게 시녀들이 물었다. 아란은 고개를 저으며 대수롭지 않은 어조로 대답했다.
“멀미 하나 보다. 약을 먹었는데도 그러는구나.”
평소에도 아란은 마차를 탈 때 곧잘 심하게 멀미를 했으므로, 시녀들은 그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그러면 조금 쉬었다 가시는 게 어떨까요?”
“아니. 차라리 빨리 도착해서 쉬고 싶어. 마부에게 조금 더 속도를 내라고 전하렴.”
아란이 완강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조금도 길에서 시간을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혼자 불안을 삭이며 하염없이 하늘만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