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하의 밤-50화 (50/146)

50화

어떻게 식사를 마쳤는지 기억나지도 않았다. 아란은 휘청거리며 제 침실로 돌아왔다. 목걸이를 본 시녀들이 감탄했다.

“어머나, 아름다운 목걸이예요.”

“선물 받으신 건가요?”

“평소에도 그런 것을 착용하시면 좋을 텐데.”

“맞아요. 사실 저도 내심 폐하껜 화려한 게 더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어요.”

옷을 갈아입히면서도 시녀들은 내내 조잘거렸다. 평소엔 그녀들의 재잘거림을 곧잘 들어주던 아란이었지만, 오늘만큼은 몹시 거슬렸다.

“이건 어디에다 둘까요?”

목걸이를 벗겨낸 시녀가 그것을 탐욕스레 바라보며 물었다.

“아무 데나 넣어 두어라. 될 수 있으면 짐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하지만…….”

“피곤하구나. 다들 나가렴.”

평소보다 차가운 목소리에 시녀들이 어색하게 방을 나섰다.

홀로 남은 아란은 저도 모르게 텅 빈 목을 매만졌다. 아직도 목걸이의 묵직한 무게가 남아있는 것 같았다.

* * *

회의장의 분위기가 모처럼 밝았다. 사일러스 공작이 해적을 완전히 소탕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덕이다. 요 몇 년간 해적들이 꽤 기승이었기에, 다나르 해안과 인접한 곳에 영지를 둔 귀족들이 특히 기뻐했다.

사일러스 공작은 황제의 지원을 감사하는 의미에서 전리품 중 귀중한 것들을 골라 그녀에게 바쳤다.

일개 해적들이라 해도 워낙 오래된 무리인 데다 규모가 컸기에 약탈했던 보물들이 상당했다. 보석과 금붙이 외에도 도자기, 책, 모든 값나가는 것들이 상자에 실려 황궁에 도착했다.

아란은 목록만 확인했을 뿐, 상자는 열어보지 않고 전부 황궁 창고에 넣어두었다. 나중에 필요할 때 처분하여 쓸 생각이었다.

옮겨지는 상자들을 바라보며 아란은 얼마 전 대공이 준 목걸이를 생각했다. 그의 선물은 착용할 수도, 처분할 수도 없을 테니 공작의 선물이 조금 더 그녀에겐 가치가 있었다. 물론 공작의 선물 역시 내키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사일러스 공이 회의에 불참한 게 안타깝군요. 여기 있었다면 분명 폐하께서 직접 공을 치하해주셨을 텐데 말입니다.”

귀족 중 한 명이 아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그를 치하하지 못함이 짐 역시 아쉽다오.”

아란이 쓴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그래도 모처럼 회의 분위기가 좋으니 사일러스 공작을 껄끄럽게 여기는 것과는 별개로, 아란도 평소보다 어깨가 한결 가벼웠다.

온화한 공기가 감도는 가운데 오직 단 한 명, 로아크 대공만 굳은 얼굴로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는 지금 이 상황에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냥 사일러스라는 이름만 나와도 언짢았다. 평소보다 밝은 낯빛의 황제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복수해줄까.

감히 그의 것을 넘보았으니 용서할 생각 같은 건 없었다. 대공은 회의 내내 공작을 끌어내 목을 칠 명분 따위만 계속 떠올렸다. 그러나 우선, 죽이기 전에 최대한 고통을 선사하고 싶었다. 맨 처음은 맛보기로 야금야금 숨통을 조이며 갖고 노는 것부터 시작해도 좋을 것이다.

제국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자 가장 유명한 해양도시의 영주인 사일러스 공작은 제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부자였다. 그를 추락시키려면 일단은 자금줄부터 끊어 놓아야 했다.

“그대들이 짐에게 서운한 마음을 품었다는 건 알고 있소. 하나, 그대들 역시 짐이 사랑하는 제국의 일부요. 외부의 적이 그대들의 재산과 권리를 침해하려 한다면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고 약조하겠소. 그러니 언제든 어려워 말고 말하시오.”

온유하지만 위엄 있는 목소리에 대공이 고개를 들어 황제를 바라보았다. 그늘이 가신 얼굴로 그리 말하니 그녀는 정말로 인자한 성군처럼 보였다. 대공은 그 모습을 보며 문득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사일러스 공작의 자금줄을 끊으면 그의 소유인 다나르 역시 타격을 받는 건 자명한 일이었다. 그럼 제국을 사랑해 마지않는 황제의 얼굴엔 또다시 짙은 그늘이 지게 될 것이다.

도대체 이런 게 왜 신경 쓰일까. 괘씸한 건 황제 역시 마찬가지인데.

아닌 게 아니라, 진심으로 괘씸했다. 황제가 그의 심기를 거스르게 한 건 비단 사일러스 공작과 관련된 일뿐만이 아니었다.

대공의 시선이 아무것도 걸리지 않은 그녀의 가느다란 목에 닿았다.

물론 제가 준 목걸이가 지금 같은 엄숙한 장소에서 착용하기엔 지나치게 화려한 감이 있다는 건 그도 알았다. 그러나 못할 것도 없었다. 그녀의 오라비인 선황은 즉위 전에도 위엄을 뽐내고자 전신에 보석을 휘감고 다녔다.

공적인 곳뿐만이 아니었다. 그간 크고 작은 연회, 전국 각지와 해외 곳곳에서 온 사절들과의 만찬 등 여러 기회가 있었지만 아란이 그 목걸이를 착용한 모습은 보지도, 전해 듣지도 못했다.

제국의 주인에게 걸맞은 목걸이를 구하기 위해 그가 얼마나 많은 돈과 정성을 쏟았는지 구구절절 알아주는 것까진 바라지도 않았지만, 제 선물이 이리 냉대를 받는 건 그리 유쾌하지 못했다.

유치한 생각에 그는 자신을 비웃으면서도 끝내 둘만 있을 때 한마디를 내뱉고야 말았다.

“목걸이가 불편하시면 반지나 귀걸이, 브로치 같은 건 어떠십니까?”

그 질문에 아란은 당황했다.

그다지 눈치가 빠르지 않은 그녀였지만 맥락상 그가 왜 자신이 준 목걸이를 착용하지 않느냐고 물은 거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아는 대공은 여자의 장신구 따위에 신경을 쓰는 남자가 아니었다. 지나치게 괴리감이 느껴졌지만 일단 대답했다.

“화려한 장신구는 내가 가진 드레스와는 어울리지 않아서…….”

“검소하신 모습으로 모범을 보여주시는 건 좋지만, 때로는 황제로서 위엄을 세우시는 것도 필요합니다.”

대공이 조금 차갑게 말했다. 그의 말에 아란이 자조적으로 대답했다.

“화려하게 치장한다고 하여 본디 없던 위엄이 생길까.”

이젠 상처받을 것도 없다는 어조였다. 대공의 기분이 더 나빠졌다.

황제는 답답하고 어리석은 여자였다. 어릴 때부터 줄곧 현실감각이라곤 없는 이상주의자에, 속내를 꾸며낼 줄도 몰랐다. 가식적인 아양 한번 떨 줄 몰라 늘 고통을 고스란히 감내하는 꼴은 때때로 괴롭히는 입장에서도 기가 막힐 정도였다.

서쪽 국경에 있을 때, 가끔 비슷한 자들을 보곤 했다. 대부분은 허황된 이론으로 타인을 현혹시킨다는 죄목으로 끌려온 정치범들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의 신념이 맞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무구한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끝은 거의 두 가지였다. 자살하거나, 아니면 현실을 깨닫고 누구보다 천박해지거나. 그 모습을 보며 대공은 간혹 저를 버린 황녀를 이곳에 데려다 놓으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상상했다.

이후 그는 다시 만난 그녀에게 그와 같은 절망을 보여주고 싶어 정제되지 못한 분노를 그대로 휘둘렀다.

그리고 그의 예상보다 훨씬 더 우유부단한 겁쟁이였던 아란은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했다.

그때 아란이 자결을 택했다면 그는 그대로 그녀를 잊었을 것이다. 반대로 그녀가 현실에 빠르게 굴복했다면 그건 그것대로 흥이 떨어졌을 것이다.

아니, 다시 생각해보니 그건 그것 나름대로 재미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적어도 지금처럼 청승맞은 낯짝으로 사람 속을 긁지는 않겠지.

그러나 지금 대공이 알고 싶은 건 일어나지 않은 가정 따위가 아닌, 황제가 무엇을 좋아하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생각하기를 멈추고 물었다.

“보석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폐하께선 무엇을 좋아하십니까?”

두 번째 질문 역시 예상치 못한 것이기에 아란은 또다시 난감해졌다. 이번엔 먼저 질문보다 고민하는 시간이 훨씬 길었다.

좋아하는 것? 내가 뭘 좋아하지?

그리 어려운 질문도 아니건만 곧바로 떠오르는 게 없었다.

“글쎄…….”

결국 애매하게 대답하고 말았다. 대공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정말 생각나지 않는 것을 지어내기도 꺼려졌다. 괜히 둘러댔다가 목걸이처럼 갑자기 떠안기면 곤혹스럽다.

무슨 오해라도 한 걸까, 대공의 얼굴이 굳은 걸 깨달은 아란이 변명처럼 덧붙였다.

“대답을 피하는 게 아니고 정말 생각나지 않아 그래.”

좋아하는 걸 떠올릴 수 없다는 게 씁쓸하긴 했지만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다만 그런 걸 떠올릴 틈도 없이 정신없이 살았구나, 하는 정도의 감상이었다. 하기야, 황제가 지나치게 여유로우면 그건 그것대로 흠일 것이다.

대공이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보다 말했다.

“예전엔 좋은 게 너무 많아 셀 수 없다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하나만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넘친다고.”

“그랬나.”

잘 기억나지 않았다. 아란이 어색하게 대답했다.

“새로 좋아하는 게 생기면 하루 종일 제게 그 이야기를 해주셨죠. 전부는 아니지만 몇 개는 기억합니다.”

그가 꺼낸 옛 추억에 아란의 얼굴이 흐려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대공은 계속 말을 이었다.

“보석 중에선 사파이어를 좋아하셨고, 예상외로 음식은 자극적인 걸 좋아하셨죠. 탈이 날까 봐 자주 드시진 못하셨지만. 시간이 나면 연극 관람을 즐기셨고 꽃 중엔 리시안셔스가 가장 마음에 든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

아란은 대공이 줄줄 내뱉는 단어들을 들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저런 걸 좋아했었다고?

고작 5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가 말한 것들 중 지금 그녀의 흥미를 끄는 건 단 하나도 없었다.

이제 보석엔 관심이 사라졌다. 음식은 무엇을 먹어도 맛을 몰랐고, 연극은…….

아란은 떠올리기 싫은 기억을 지우기 위해 얼른 다음 생각으로 넘어갔다. 리시안셔스, 이젠 그 꽃의 모양이 어땠는지도 가물가물했다.

“아직 저것들을 좋아하십니까?”

아란은 고개를 저었다.

“시간이 흘렀으니 취향도 변했나 봐.”

“그 바뀐 취향을 말씀해 주세요. 새로 좋아하시게 된 것들을.”

아란은 다시 한번 생각에 잠겼다. 화사한 빛깔보다는 어두운색이, 시끄러운 곳보다는 조용한 곳이 편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낫다는 것뿐, 그것들을 좋아한다고 표현하는 건 적당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것도 딱히…….”

이 정도로 대답했으면 흥미를 잃고 물러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그는 끈질기게 질문해왔다.

“얼마 전에 순행을 나가셨을 땐 좋아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건 어떻습니까.”

“싫어.”

이번 질문엔 아란이 곧바로 대답했다. 무엇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살짝 미간까지 찌푸렸다.

문득, 대공은 그 미간을 문질러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썹 사이 흰 피부가 다시 매끈하게 펴지도록.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