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하의 밤-49화 (49/146)

49화

그가 세게 쳐올릴 때마다 쾌락도 물밀 듯이 아란을 덮쳤다.

잔뜩 고양된 감각을 감당하지 못한 그녀가 눈물을 터뜨리며 그에게 매달렸다. 대공은 제 등을 피가 날 정도로 할퀴는 손톱은 아랑곳없이 그녀의 아래를 파헤치는 데 열중했다.

“폐하…….”

“아으, 으응, 앗…….”

“저만, 원한다고, 말해보세요. 저와 혼인하실, 거라고…….”

혼인?

멍한 머리로도 아란이 고개를 저으며 고집스럽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그가 단단한 성기로 뭉근하게 내부를 찌르자 순식간에 항복했다.

“어서 절, 원한다고 하, 세요.”

“아, 알겠, 으응, 널 원해……. 그러니까, 아, 이제 그만……. 하앗!”

끝까지 혼인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으나, 그것만으로도 사납던 대공의 얼굴이 일순 다정하게 누그러졌다. 부드럽게 그녀의 입술을 훔치고, 땀에 젖은 머리칼에 코를 박았다.

평소보다 훨씬 짙어진 체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그 냄새를 맡자 사정감이 엄습했다. 그는 참지 않고 그녀의 안에 제 정을 쏟아부었다. 오래 참아서인지 절정이 유독 강렬했다.

그는 정신없이 아란에게 입 맞추며 속삭였다.

“폐하, 아란, 아란흐로드…….”

귀한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데도 아란은 화도 내지 못하고 늘어져 덜덜 떨기만 했다.

여전히 성기를 빼지 않은 채 대공이 옆으로 누워 그녀의 어깨를 당겨 안았다. 땀과 체액으로 흠뻑 젖어 미끌미끌했지만 거리낌은 들지 않았다.

대공의 품에 안겨 숨을 몰아쉬던 아란이 눈물로 젖은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곧장 자신을 내려다보던 붉은 눈과 마주쳤다.

아란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몸이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추우십니까?”

대공이 그녀를 더 깊이 끌어안으며 비단 요를 끌어와 덮어주었다. 그러나 그 다정함은 그녀의 불안을 조금도 잠재우지 못했다.

또 무슨 변덕일까.

이렇게 다정하다가도 언제 비수 같은 말을 내뱉으며 난폭하게 굴지 모르는 노릇이다.

몸을 맞대고 있어도 그는 늘 까마득히 멀리 있는 것 같았다.

대공이 어깨와 등을 느리게 어루만졌다. 깨지기 쉬운 수정구슬을 다루는 듯한 살가운 손길이 거북했다. 뺨을 누른 가슴팍도, 젖은 머리카락을 헤집고 두피를 문지르는 입술과 콧대도 마찬가지였다.

“폐하.”

아란은 그 부름을 못 들은 척하며 도로 눈을 감았다.

겁먹은 듯 꺼리는 낯이 대공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어떤 얼굴이 보고 싶은 건지 그조차 확신이 없었다.

대공은 당장 답을 내릴 수 없는 문제에 지나치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아란흐로드.”

이름을 부르자마자 감겼던 눈이 다시 떠졌다.

“그렇게 부르지 마.”

불안정한 목소리지만 뜻은 단호했다.

황제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대공도 잘 알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종종 거슬렸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최악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굳이 걱정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녀는 자신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신세이고, 그의 곁을 떠나거나 관계를 깨뜨릴 용기도 없었다. 지금이라도 다정하게 굴어주면 제 주제에 별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늘 그랬듯, 그는 하고 싶은 대로 했다. 다시 한번 그 이름을 부르며 등을 쓰다듬던 손을 내려 엉덩이를 쥐었다.

“아란흐로드.”

그 울림이 퍽 달콤했다.

아직 뜨거운 내부에 감싸인 성기가 다시 힘을 얻고 일어나는 게 느껴졌다. 그것을 눈치챈 아란이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했으나 그 전에 몸이 뒤집혔다.

“흣!”

반쯤 성기를 뺐다가 삽입하자 녹초가 된 그녀가 곧바로 상체를 무너뜨렸다.

“아, 그만…… 너무, 힘들, 어……. 앗.”

아란이 이불 위에 뺨을 묻고 흐느꼈다. 그러나 대공은 상체를 따라 무너지려는 엉덩이를 추어올리며 다시 추삽질을 시작했다. 늘어진 몸과 달리 질척해진 내부는 그의 것을 곧잘 삼켰다.

도망갈 힘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 대공은 팔로 가느다란 허리를 단단히 결박하고는 바닥을 향해 쏟아져 흔들리는 가슴을 감싸 쥐었다.

“흐으…….”

그가 움직일 때마다 아란이 힘없이 신음을 토했다. 그러나 입 맞추려 하자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대공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곧바로 조그만 턱을 붙잡아 누르곤 집요하게 입술을 겹쳤다. 그리고 아란이 힘겹게 내뱉는 숨결을 전부 삼켰다.

* * *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일상이 지나갔다. 황제는 정기적으로 열리는 회의에서 또 귀족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의견만 내놓았다.

영지의 산림과 하천을 관리하라, 법정 소작료를 준수하라, 황제가 입을 열 때마다 회의장의 분위기는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럴 때마다 당연하게 대공이 황제를 감쌌고, 황제는 냉담하게 반응했다. 그리고 황제를 향한 귀족들의 원망은 깊어졌다. 모든 것이 이전과 똑같았다.

그러나 모든 것이 그대로는 아니었다. 아란은 대공 안의 어떤 것이 아주 미세하게 방향을 틀었다는 걸 느꼈다. 쉽사리 눈치챌 수 없을 만큼 작은 변화였지만 그녀에겐 의미가 무거웠다.

대공이 다정하면 다정할수록, 아란은 점점 불안해졌다. 분명 무슨 꿍꿍이가 있을 텐데, 무엇을 원하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침대 위에서도 제법 상냥하게 굴었다. 다음날 일어나지도 못하도록 제 욕심을 채우는 건 여전했지만 더는 천박한 조롱으로 그녀를 공격하지 않았고, 억지로 몸을 열게 하지도 않았다. 대신 한참이나 말없이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거나, 뜻 모를 행동을 하고는 반응을 살폈다.

그 꼴이 흡사 사랑에 빠진 보통 사내 같았다.

거기까지 생각한 아란이 기겁하여 고개를 내저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지금 대공을 보면…….

아란은 나이프로 앞에 놓인 고기를 잘게 썰었다. 그녀의 취향대로 핏물이 배어 나오지 않게 완전히 익힌 고기는 부드러웠고, 온도도 적당했다. 그 위에 뿌려진 향신료가 후각을 자극했다. 그러나 어쩐지 식욕이 돌지 않았다.

아란은 이미 잘린 고기를 더 작게 잘랐다. 썬다기보다는 뭉갠다는 표현이 더 알맞았다.

몇 번 반복하니 고기는 형체를 잃었다. 대공이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입맛이 없으십니까.”

“조금.”

그가 트집을 잡을까 봐 아란은 마지못해 작은 고기 조각을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그마저도 입 안이 까칠해 몇 번 씹지 않고 삼켰다.

즉위 후, 이렇게 대공과 단둘이서 식사한 건 처음이었다. 굳이 식사 자리에서까지 얼굴을 맞댈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집무실에서, 회의실에서, 그리고 침실에서 만나는 것만으로도 두 사람은 충분히 용건을 끝낼 수 있었다. 공적인 사안도, 은밀한 거래도.

그래서 아란은 처음 대공이 식사를 함께하자고 청했을 때 못내 당황했다. 내키지 않았으나 하필이면 오늘따라 다른 핑곗거리도 없었다.

거의 줄지 않은 그녀의 접시를 보며 대공은 잠시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가, 곧 태연을 가장하며 말했다.

“억지로 드시지는 마십시오. 체하시기라도 하면 더 큰 일이니까.”

아란은 눈에 띄게 안심하며 곧바로 식기를 내려놓았다. 그러자 대공도 그녀를 따라 식사를 끝냈다.

그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아란에게 내밀었다.

작은 보석함이었다. 재료도 그렇고, 마감도 섬세한 게 그 자체로도 상당한 값어치를 지닌 물건이었다. 그러나 아란은 그 사실에 그리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이게 뭐지……?”

“열어보십시오.”

아란은 한순간 머뭇거렸다. 그 안에 뭐가 들어 있을지는 사실 그리 궁금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상상력이 문제였다.

그녀의 머릿속에선 이미 극단적인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자객이 적국의 왕에게 선물인 척 검을 담은 상자를 건넸다가 왕이 그걸 여는 순간 달려들어 그 검으로 왕을 찔러 죽였다는 이야기 따위를, 아란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이 안에 단도라도 있어 여는 순간 목숨을 잃게 되는 건 아닐까.

터무니없는 상상이라는 걸 알면서도 아란은 선뜻 보석함을 열지 못했다.

“어서.”

대공이 재촉했다. 아란은 잔뜩 긴장한 채 보석함을 열었다.

순간, 칼날처럼 서슬 퍼런 광채가 흩뿌려졌다. 아란은 잠깐 눈을 찡그렸다가 크게 떴다.

단도가 아니었다. 그 안에 든 건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화려한 목걸이였다. 주렁주렁 달린 보석을 다 팔면 웬만한 성 한 채는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게…….”

아란은 떨떠름한 얼굴로 그것을 꺼내 들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값져 보였으나 지나치게 화려하여 그녀가 가진 옷들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녀는 고맙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도로 물러야 할지를 알지 못하고 망설였다. 넙죽 받기엔 내키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도로 가져가라고 말하자니 대공의 심기를 거스를 것 같았다.

대공은 기뻐하는 기색이라고는 없이 그저 난처해하는 황제의 얼굴을 보았다. 어릴 땐 보석이나 드레스 따위를 좋아했던 것 같은데, 지금 그녀는 심드렁하기만 했다.

하긴, 아무리 가진 것 없어도 명색이 황제였다. 이런 보석 따위로 환심을 사는 건 우스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 아란이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어떤 취향을 가졌는지 알지 못했다.

“마음에 들지 않으셔도 받으세요.”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아란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목걸이를 들어 아란의 목에 걸었다.

목걸이가 가는 목 아래로 족쇄처럼 무겁게 늘어졌다.

“고마워…….”

아란이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목걸이를 다 걸고 나서도 그는 물러나지 않았다. 그의 무엄한 손가락이 황제의 옷깃 안쪽 맨살을 은근히 쓸었다. 아란은 하마터면 보석함을 떨어뜨릴 뻔했다. 진작 시중드는 이들을 물려 보는 눈이 없는 게 다행이었다.

대공은 황제의 목덜미를 보면서, 목걸이만 걸친 그녀의 알몸을 상상했다. 그러나 그것을 굳이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그러지 않아도 아란은 이미 떨고 있었다.

그는 그녀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았다. 아마도 더없이 음탕한 일일 것이다. 가령 이 테이블 위에서 다리를 벌리게 되는, 그런 종류의.

실은 그 역시 그것을 진작부터 상상하고 있었다. 이대로 테이블 위에 올려진 것들을 전부 치워버리고, 대신 황제를 그 위에 엎드리게 하고 싶었다. 그의 고민이 길어질수록 아란의 떨림은 커졌다.

그는 아쉬움을 느끼며 손을 거두었다. 오늘은 그러기 위해 황궁에 든 게 아니었다.

“마음에 드십니까.”

“응…….”

작은 머리통이 가볍게 위아래로 흔들렸다.

보석함 안쪽엔 작은 거울이 붙어 있었다. 그럼에도 아란은 그것을 한 번 들여다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딱히 화가 나지는 않았다. 그녀가 제 선물을 걸쳤다는 사실에 만족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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