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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의 밤-47화 (47/146)

47화

황제를 비난하면 대공이 언짢아했기에 다들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대공성의 가신 중 그녀를 좋아하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좋아하긴커녕, 전부 증오에 가까운 감정을 품고 있었다.

“전 도무지 황제 폐하를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전하를 이리 홀대하시는 겁니까? 바른말로, 전하께서 안 계시면 아무것도 아닌 분께서! 그분께서 허수아비와 다를 바 없다는 건 세 살 난 아이도 알 겁니다!”

만취에 가까운 기사 한 명이 크게 외쳤다.

다들 대공이 크게 화를 낼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대공은 웃기만 했다.

“그래. 허수아비 주제에 내 말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구나. 애초에 황위에 앉히는 게 아니었어. 어디 호화로운 저택이나 지어 놓고 그 밖으로는 한 발짝도 못 나오게 가둬두는 건데.”

그 말을 끝내자마자 대공은 곧 잠이 들었다.

술에 취하지 않은 가신 몇몇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대공이 명분 때문에, 혹은 다른 이유로 야심을 드러내지 못한 채 황제에 대한 충정을 연기하고 있는 거라면?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들은 주인의 속내를 헤아리지 못한 자신들의 불충을 스스로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 * *

다음날, 어제 비웠던 술동이들은 전부 헛것이었던 것처럼 대공은 말끔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그래. 어제는 다들 잘 들어갔나.”

“예. 비록 숙취의 여파로 만찬에 참석한 인원의 절반 이상이 휴가를 낼 것 같긴 하지만 말입니다.”

그 말에 대공이 담담히 웃었다.

“하기야, 나도 마지막엔 잘 기억이 안 나니 마냥 그들을 탓할 수는 없겠구나.”

“전하께서 제일 많이 드셨지요. 물도 그만큼은 못 마실 것 같더군요.”

“못 볼 꼴을 보였네.”

“아닙니다. 오래간만에 취하신 모습을 보니 처음 전하와 술자리를 가졌을 때가 생각나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옛 기억을 떠올리며 가볍게 미소 짓던 렌스 백작이 대공의 눈치를 보며 슬쩍 물었다.

“한데, 전하. 어제 하셨던 말씀 기억나십니까?”

“무슨 말? 설마 취해서 자네의 딸을 달라고 고집이라도 피웠나?”

“아비로서 조금 유감이지만 제 딸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그럼?”

백작은 조금 망설이다 어제 그가 들었던 말을 입 밖으로 꺼냈다.

“황제 폐하 말씀입니다.”

황제의 이야기가 나오자 대공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백작은 대공이 황제에 관한 일이라면 왜 이렇게 유달리 예민하게 구는지 이유를 알지 못했다.

물론, 복잡하게 얽혔던 두 사람의 과거를 생각하면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어찌 됐건 황제가 나서지 않았다면 대공은 전 대공 부처처럼 억울하게 사형당했을 것이다. 게다가 천민으로 강등되어 몇 번이나 곤욕을 치를 뻔한 그를 감싼 것도 그녀였다.

대공은 여색에 관해서는 무심하다 못해 매정하게 느껴질 정도로 관심이 없었지만, 그런 상황이라면 당시 세간에 떠돌았던 소문처럼 그가 황제에게 연정을 품었어도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백작은 생각했다.

하지만 연정이라기엔 대공의 충정은 지나치게 계산적이고 가식적인 면모가 있었다. 황제를 살려 둔 이유 역시 그랬다.

결혼식장에서 황녀를 살려 황위에 올린 건 분명 계획에 없던 일이었지만, 대공의 설명을 들은 이들은 전부 그 결정을 납득하고 수용했다.

대공이 황족을 모두 살해하고 황위에 올랐다면 보수적인 제국 정서상 찬탈자라는 비난을 피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미 억울하게 반역자가 된 적 있던 대공은 그런 불명예를 씻고자 허수아비 황제를 내세워 가문과 자신의 명예를 지켰다. 그러면서도 뒤로는 실권을 전부 챙겼다.

황가의 세 남매 중 하필 지금의 황제만 살아남은 이유도 그녀가 가장 어리고 미욱하여 휘두르기 좋은 상대였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옛정 따위가 남아 황제를 살려주었다는 식의 근거 없는 소문보다 깔끔하고 합리적이었다.

무엇보다도 백작 서쪽 국경에서 대공과 재회했을 때 그의 눈동자에 번뜩이던 황족들을 향한 증오를 결코 잊을 수 없었다.

주군에 대한 충정이 앞서 냉정하게 판단하지 못하는 젊은 가신들과 달리, 백작은 지금 대공이 황제 앞에 납작 엎드린 이유엔 더 큰 계획이 있기 때문일 거라고 믿었다.

그는 어서 연극이 끝나고 대공이 더 큰 영광을 손에 넣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내가 어제 폐하의 이야기를 했나?”

“예.”

역시, 대공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애초에 황제 폐하를 황위에 앉히는 게 아니었다고 하셨습니다. 저택 안에 가두어 그 밖으론 한 발짝도 못 나오게 할 걸 그랬다고도 말씀하셨습니다.”

백작의 말을 들은 대공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내가 그런 말을 했다고?”

“예. 제 두 귀로 똑똑히 들었습니다.”

“확실히, 많이 취하긴 했구나. 신경 쓰지 마라.”

대공이 헛웃음을 지었다. 백작은 따라 웃는 척하며 예리하게 그의 얼굴을 살폈다.

“사실 놀랐습니다. 한 번도 그런 식으로 폐하를 말씀하신 적 없으시니까요.”

“뭐,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지.”

대공이 지나가듯 중얼거렸다. 가까이 있던 백작도 겨우 들었을 만큼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그러나 백작의 믿음에 확신을 주기엔 충분했다.

백작의 마음속에서 위험한 계획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그것을 숨기며 아무렇지도 않게 화제를 돌렸다.

“이번엔 얼마나 머무르실 예정입니까?”

“늦어도 모레엔 수도로 돌아갈 생각이다.”

“이번에도 오래 계시지는 않으시는군요. 이번에 가시면 또 언제 오실지…….”

백작이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아무튼, 너무 무리하지 마십시오. 저희는 늘 전하의 걱정뿐입니다.”

“신경 쓰도록 하겠다.”

“아무튼, 폐하께서도 너무하십니다. 전하께 의지하시는 건 좋지만, 영지에 머물 여유를 영 안 주시니 말입니다. 아무리 나이가 젊고 체력이 좋으셔도 한계는 있는 법인데 말입니다.”

원망이 담긴 남자의 말에 대공이 고개를 저었다.

“폐하께서야말로 늘 한계까지 본인을 내모시는 분이시지.”

백작의 생각과 달리 대공은 제 영지에 오래 머물지 못하는 것에 별다른 불만이 없었다. 영지는 유능한 가신들 덕에 별 무리 없이 굴러가고 있었고, 황궁에서 오래 지내온 탓에 이제는 황궁보다도 제 영지가 더 낯설게 느껴질 정도였다.

대공은 훑던 보고서를 잠시 내려 두고는 한쪽 손으로 비스듬하게 턱을 괴었다. 황제의 이야기를 들으니 자동으로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식사는 제대로 했을지, 황제로서 제 역할은 잘 수행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귀족들 틈바구니에서 억지로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있을 모습을 상상하니 쓴웃음이 나왔다.

황제는 단 한 번도 제 입으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대공은 그의 부재가 길어질 때마다 황제가 불안해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어이없는 여자였다. 정작 가까이 있을 땐 피하려고 기를 쓰면서도, 조금만 멀어지려 하면 안절부절못하는 꼴이 재미있으면서도 우스웠다.

이번엔 오래 시간을 끌어 애태우게 만들어볼까. 불쑥 심술궂은 생각이 들었다.

빨리 돌아오라는 말 한마디 건넬 너스레 따윈 없는 황제는 그의 공백이 길어져도 홀로 불안을 삭이며 묵묵히 기다릴 것이다.

대공은 그녀가 제 빈자리를 크게 느끼길 바랐다. 그래서 재회했을 때, 조금은 반가운 기색을 드러내길 원했다. 그를 보고 반갑게 미소짓는 모습을 상상해보려 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오히려 나이답지 않게 지친 표정만 선명해졌다.

마지막으로 그녀를 보았을 때를 떠올린 대공의 낯이 싸늘해졌다. 그날, 황제는 그 어느 때보다 지치고 괴로워 보였다.

예전이라면 그 사실이 그를 한층 즐겁게 했을 테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는 답을 내릴 수 없었다.

* * *

영지에서 오래 시간을 끌겠다고 생각한 것이 무색하게, 대공은 볼일이 끝나기 무섭게 황궁으로 돌아가는 길을 재촉했다.

가신들은 아쉬움을 숨기지 않고 주군을 배웅했다. 늘 그랬듯, 이번에 가면 그는 한동안 영지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성을 잘 부탁한다. 그대만 믿겠다.”

말 위에 오른 대공이 마지막으로 렌스 백작을 돌아보며 말했다.

“맡겨주십시오.”

렌스 백작이 사람 좋게 웃으며 대답했다.

대공은 그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말을 박차고 달려나갔다.

“맡겨만 주십시오, 전하.”

멀어지는 대공을 바라보며 백작이 결의에 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는 주군에게 진짜 충정을 보여드리기로 마음먹었다.

* * *

공작이 수도에 도착했을 땐 이미 늦은 밤이었다. 그는 제 저택에 들려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은 후에 곧바로 황궁으로 향했다. 황궁에 들어서자 그를 기다리고 있던 시녀 한 명이 뒤따르며 그간 황제가 무엇을 했는지 말해주었다.

보고 내용은 꽤 길었지만 특별한 일은 없었다. 황제는 여가를 보내는 방식도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사람들과 어울리기보다는 혼자 독서나 공부를 하곤 했다. 이제 그녀는 더이상 밤에 몰래 침실에서 빠져나와 목검을 휘두르거나, 황궁의 숨겨진 통로를 탐험하지 않았다.

끝까지 보고를 받은 대공은 곧장 황제의 침실로 향했다.

침실에서도 일을 놓지 못하고 서류 더미 속에 파묻혀 있던 아란이 그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우습게도, 그가 자리를 비울 때마다 그녀는 얼굴에 살이 올랐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래 봤자 아주 조금 혈색이 돌아온 정도이긴 하지만.

그런 모습을 볼 때면 기분이 그리 좋지는 않았으나, 어찌 됐건 야윈 꼴을 보는 것보단 나았다.

“일찍 돌아왔구나.”

아란이 중얼거렸다. 체념과 안도가 섞인 복잡한 얼굴이었다. 그 어디에도 반가운 기색은 없었다.

“예.”

대공은 성큼성큼 다가가 손에 든 서류를 빼앗았다. 그것을 내팽개치듯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어색하게 굳어있는 그녀를 향해 몸을 숙였다.

익숙한 향기가 훅 끼치고, 숨결이 섞이기 무섭게 입술이 닿았다.

살짝 터 조금 까칠한 입술을 핥자, 아란이 어색하게 입을 벌렸다. 대공의 혀가 주저 없이 그 안으로 파고들었다.

“음…….”

아란의 고개가 뒤로 한껏 꺾이자 대공이 한 손으로 그녀의 목덜미를 받쳤다. 그리고 늘어진 그녀의 팔을 들어 제 목을 감싸게 했다. 아란이 주춤주춤 그의 목 뒤에서 깍지를 꼈다.

만나자마자 열렬한 입맞춤을 나누는 모습은, 다른 사람이 보면 열정적인 연인으로 착각할 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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