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그, 그냥 작별 인사를 나누었을 뿐이야.”
“작별 인사라.”
그의 입꼬리가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제가 바보인 줄 아십니까, 폐하?”
아란의 얼굴이 굳었다.
“폐하를 모시는 이들이 전부 제 눈과 귀라는 걸 모르십니까. 왜 사실대로 말씀하지 않으십니까? 절 속이고 그에게 가시려고요?”
“그건……. 아니, 그러는 그대야말로 그가…….”
그날 밤 자신들을 훔쳐본 사람이 공작인 걸 알고 있었냐고 물으려던 아란은 굳이 그의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 않아 그만두었다.
어차피 대공을 완전히 믿고 있지도 않았고, 이미 알게 된 사실을 다시 캐내어 따져 묻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러니 대공도 이쯤에서 사일러스 공작의 이야기를 넣어두길 바랐다.
“아니야, 그만하자.”
그러나 대공은 그녀의 바람을 들어주는 적이 없었다.
“솔직히 놀랐습니다. 폐하께 그를 꾀어낼 재주가 있는 줄은 몰랐는데.”
그가 비아냥거렸다. 이런 식의 조롱 역시 오랜만이라, 아란은 마음이 선득해졌다.
“꾀어내지 않았어.”
그녀가 힘주어 말했다.
“그 말씀을 믿고 싶지만, 지금껏 폐하의 언행을 보면 영 신뢰가 가지 않아서 말입니다.”
그가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뒤에 모욕적인 언사가 생략되어 있다는 걸 예리하게 눈치챈 아란이 입술을 깨물었다.
눈을 가늘게 뜬 대공이 품평하듯 침의 사이로 보이는 몸을 바라보았다.
“폐하처럼 마른 여자가 그의 취향인지는 몰랐습니다.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유혹하셨습니까? 궁금하니 말해보세요. 그를 어떻게 꾀어내셨는지.”
아란은 기가 막혀 멍하니 입만 벌렸다.
“그대는 어째서 매번 이런 식으로 나를 폄하하는 건지……. 나는 여자이기 전에 이 나라의 황제야. 정말로 내가 신하인 그를 꾀어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못할 게 뭐 있겠습니까.”
대공의 입술에 조롱 섞인 웃음이 걸렸다.
“폐하께서 어떻게 황제가 되셨는지, 본인께서 가장 잘 알고 계실 텐데.”
이번에야말로 아란의 낯빛이 급변했다. 그녀는 상처받았다는 것이 여실히 내비쳐진 눈으로 대공을 바라보며 울 것처럼 입매를 일그러뜨렸다.
그에 대공은 자신이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었다는 걸 깨달았다. 상처를 받는 건 제가 아닌데, 첨예한 송곳으로 심장 깊은 곳을 찔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는 곧 그게 무슨 대수냐며 억지로 묻어버렸다. 어차피 황제는 그의 것이고, 그 사실은 변하지 않을 텐데.
한참 후에, 아란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래. 마음껏 조롱해. 네 말대로 난 둘도 없을 탕녀고, 네게 몸을 내준 대가로 황좌에 올랐어. 네 조롱이 이렇게 아픈 것도 그게 전부 사실이기 때문이지.”
카펫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공작을 어떻게 꾀었냐고? 나도 모르겠어. 네 말대로 내가 색을 밝히는 탕녀라 사내라면 정신을 못 차리니 그도 그걸 알아본 게 아닐까?”
자학하는 목소리는 어떤 발악보다도 처절하게 들렸다. 뒤늦게 대공의 얼굴에서 웃음이 빠져나갔다.
“그런데, 그게 네가 화를 낼 일인가? 궁금하다고 했잖아. 내가 다른 사내의 품에 안겨도 똑같이 좋아할지 늘 궁금하다며? 확인할 기회가 왔는데 왜 그렇게 화를 내?”
처음엔 나직하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마지막에 그녀는 거의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대공은 드물게 당황한 얼굴로 아란을 바라보았다. 고작 소리를 몇 번 지른 것만으로 지친 아란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제발 그만해. 너는 영원히 내게 승리했고, 나는 처음부터 네게 대항할 의욕도, 능력도 없었어. 그러니 이제 그만 아량을 베풀어줘…….”
그녀의 간청은 비굴하기까지 했다. 그마저도 흐느끼느라 온전한 문장이 되지 못하고 드문드문 끊어졌다.
대공이 늘 원했던 완전한 굴복인데 조금도 만족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온 힘을 다해 저항했을 때보다 심장이 차가워졌다.
“폐하의 청을 받아들이겠습니다.”.
냉담한 목소리가 선고하듯 내리꽂혔다. 대공은 한쪽 무릎을 꿇어 황제와 시선을 맞췄다. 그리고 억센 손으로 그녀의 턱을 쥐었다.
“하지만 전 이미 충분히 아량을 베풀었다고 생각하는데, 이번엔 어떤 식의 아량을 보여드려야 할까요. 이젠 새로운 것이 별로 없기에.”
“…….”
“혼인이라도 할까요.”
아란의 흐느낌이 멎었다.
“뭐……?”
“이제 와 말씀드리지만 사실, 오래전에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폐하와 같이 귀중한 노리개를 다른 사내와 공유할 수는 없지요. 그러니 혼인하여 폐하께서 제 것이라고 못 박아 두면 어떨까요. 제 것을 취하기 위해 밤마다 도둑처럼 숨어드는 것도 지겹습니다.”
한동안 그의 눈을 들여다보던 아란이 물었다.
“거짓말이지?”
“글쎄요.”
대공이 피식 웃었다.
진심인지, 아니면 평소처럼 그녀를 희롱하는 것인지 알 수 없어 아란은 떨기만 했다. 제발 후자이길 바랐다. 혼인만은 절대 하고 싶지 않았다.
대공이 바싹 굳어있는 그녀를 껴안고 소름이 오소소 돋은 뺨과 목에 입을 맞췄다. 다행히 거기서 더 나아가지는 않았다. 대신 그는 짐짓 다정한 어조로 아란에게 물었다.
“무엇을 그리 두려워하십니까? 어차피 폐하도, 저도 짝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는 아란을 야금야금 좀먹을 포식자였다. 그녀의 눈과 귀를 막고, 손발을 잘라 영원히 도망칠 수 없는 무덤에 가둘 집행자였다.
“부부가 되면 그것도 나름대로 재미있을 것 같군요.”
아란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문득 이대로 평생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아 두려워졌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진 기분이었다.
* * *
오랜만에 대공이 그의 땅으로 돌아왔다.
대공의 가신들은 귀환한 주인을 환영하는 뜻으로 성대한 만찬을 열었다. 주인이 없어 늘 조용하던 대공성이 모처럼 떠들썩했다.
모두가 즐겁게 먹고 마시는 가운데, 술에 취한 젊은 기사 한 명이 외쳤다.
“전하. 수도에만 머물지 마시고 저희도 자주 찾아주십시오. 전하께선 저희에게 황제 폐하보다도 절대적인 주군이신데, 늘 부재중이시니 서운합니다.”
그의 말을 듣던 대공이 엄격하게 말했다.
“네 충정은 높이 사지만 함부로 폐하와 나를 비교하지 말아라. 두 번은 용서하지 않겠다.”
“예…….”
냉랭해진 그의 태도에 시끌벅적하던 분위기가 다소 가라앉았다. 몇 명은 구석에서 대공이 듣지 못하는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대공에 대한 직접적인 불만은 아니었다.
다만, 그들은 어느 곳 하나 모자람 없는 대공이 어째서 무능하기만 한 황제에게 그리 충성스럽게 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넌지시 물어봐도 신하가 주군에게 순종하는 건 당연하다는, 틀에 박힌 대답만 돌아오니 더욱 답답했다.
어떤 가신들은 그 이유를 대공비의 부재에서 찾으려 했다. 대공이 유달리 밖으로 나도는 건 마음 붙일 곳이 없기 때문일 거라고 추측한 그들은, 아름답고 현명한 안주인을 들이면 젊은 주인이 황제에게서 관심을 거두고 영지에 더 오래 머물지 않을까 하는 소망을 품었다.
그 의견이 나온 지는 오래되었지만 다들 대공에게 말을 꺼내지 못하는 가운데, 나이가 지긋한 렌스 백작이 나섰다. 렌스 백작가는 대대로 로아크 대공가를 모셔온 충성스러운 가문이었다.
그는 대공 곁에 앉아 기회를 엿보다가 주변이 조용해졌을 때를 노려 말을 꺼냈다.
“젊은 것이 오랜만에 전하를 뵈었으니 벅찬 마음에 실수했나 봅니다. 대공비라도 계시면 그래도 저희의 마음이 든든할 텐데요.”
“아직 내 나이가 젊은데 무엇이 그리 급한가.”
대공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손이 귀한 가문이니 일찌감치 배우자를 들이시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그러고 보니 자네, 딸이 있다고 했지. 듣기로 아주 아름답고 성품도 온화하다던데.”
“예.”
“그럼 자네의 딸을 내게 주는 게 어때.”
“지금 주신 제안은 무척 기쁘지만, 제 여식은 벌써 나이 마흔을 넘겨 장성한 아들이 셋입니다.”
“이런. 20년만 기다려 주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 말에 백작이 껄껄 웃었다.
“저도 아쉽습니다. 하지만 제 여식처럼 아름답고 성품도 온화한 아가씨를 소개해 드릴 수는 있습니다. 물론, 나이도 더 젊은 분으로요.”
그러면서 백작은 은근히 대공의 눈치를 살폈다. 대공은 속내를 알 수 없는 미소만 짓고 있었다.
“나는 눈이 높아. 렌스 경의 여식 정도 되는 여자가 아니면 쉽게 눈에 차지 않을 텐데.”
“어떤 여자를 원하십니까? 제국 전체를 뒤져서라도 최대한 조건에 맞는 여자를 찾아보겠습니다.”
영 미적지근하긴 했지만, 혼인이 화두에 올랐을 때 대공이 이 정도로 맞장구를 쳐준 건 처음이라 렌스 백작은 내심 기대를 품었다.
“나는 속물이라, 조건을 까다롭게 따지지. 이 나라에서 가장 고귀한 여자가 아니면 아내로 맞이하고 싶지 않다.”
그의 대답에 렌스 백작은 내심 당황했다. 현재 라인스터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여자는 황제인 아란흐로드였다.
하지만 원수의 딸을 대공비로 앉힐 수는 없는 노릇이다. 또한, 그들은 자랑스러운 주인이 신분 높은 아내에게 굴종하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다. 렌스 백작은 일부러 황제를 쏙 빼놓고 다른 여자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렇다면 데헤나 공녀는 어떠십니까. 현재 공작가 영애들 중에 미혼이신 분은 데헤나 공녀뿐이시지 않습니까.”
“데헤나 공녀는 너무 어리지 않은가. 이제 고작 열다섯 살 정도일 텐데.”
“열일곱입니다. 그 정도면 충분하지요.”
“그게 그거 아닌가. 난 어린애는 관심 없어.”
“열일곱을 어린애라고 하시면…….”
렌스 백작이 한숨을 쉬었다.
“이런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오늘은 술이나 마시는 게 어떤가.”
대공이 웃으며 백작에게 술을 권했다. 백작은 마지못해 그가 주는 술을 받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은 점점 취기가 올랐다. 대공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술이 아주 셌지만, 오랜만에 모인 수많은 가신을 전부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아직 대작하지 못한 상대를 남겨둔 채, 대공이 붉어진 얼굴을 숙였다. 보기 드문 주인의 모습에 가신들은 그저 즐거워했다.
“취하셨습니다, 전하.”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술을 덜 마셔 상대적으로 멀쩡한 백작이 대공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 취했다.”
대공은 순순히 제 상태를 인정했다.
“수도에선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황제 폐하께서는 아직도 전하를 냉대하시는지요?”
“그분께선 언제나 한결같으시지.”
그의 대답에, 혈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황제의 병약한 낯을 떠올린 렌스 백작이 속으로 이를 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