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하의 밤-45화 (45/146)

45화

그날, 자신을 지켜보았던 건 공작이었다.

아란은 그것도 모르고 헤어짐을 아쉬워하던 저의 어리석음에 치를 떨었다.

“어떻게 그대가…….”

그녀가 채 말을 잇지 못하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차마 공작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폐하.”

공작이 자리에서 일어나 어찌할 바를 모르는 아란에게 다가갔다.

“오지 마.”

그 짧은 단어를 말하는데도 그녀의 목소리는 형편없이 떨렸다.

“폐하. 제게 설명할 기회를 주십시오.”

그건 공작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참 얼굴을 가리고 있던 황제가 겨우 손을 내려 공작을 노려보았다.

“……그간 짐을 얼마나 업신여겼을까. 짐이 얼마나 우스워 보였을까.”

“아닙니다.”

“소문낼 테면 내. 그러나 짐이 그런 소문에 휘둘릴 거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야.”

아란의 눈에서 기어이 눈물이 흘렀다. 공작은 그것을 보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죄송합니다, 폐하.”

“평생 짐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마. 죽을 때까지 그대의 영지를 벗어나지 말게.”

황제가 저주하듯 속삭였다.

그리고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등을 돌렸다. 그간의 마음고생을 알려주듯 뒷모습은 연약하고 위태로워 보였다. 동시에 감히 손댈 수 없게 완고해 보이기도 했다.

“이만 물러가시오.”

그 말을 듣고도 공작은 선뜻 발을 떼지 못했다. 이대로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 전에 말해주고 싶었다. 자신은 대공처럼 황좌를 빌미로 그녀를 약탈하지도, 그녀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일도 없을 거라고 약조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 모든 말이 황제에겐 기만으로 들릴 걸 알아 그는 망설였다.

“폐하.”

축객령이 떨어지고도 한참 동안 공작이 떠나지 않자 황제가 사납게 다시 돌아섰다. 그날 밤처럼, 그녀의 얼굴은 눈물에 젖어 반짝이고 있었다.

“물러가지 않고 뭘 하는가? 짐이 기어이 공을 끌어내야겠는가?”

“단 한 번도 폐하를 업신여기거나 우습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공작을 노려보던 아란은 흠칫 놀랐다. 그의 푸른 눈에 깃든 정염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그녀를 재차 분노하게 했다.

그러나 두렵기도 했다. 그녀가 아는 사내의 욕망이란 난폭하고, 위압적이고,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다.

그녀가 저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서자 공작이 꼭 그만큼 다가왔다. 다시 두 발짝 물러나자 이번에도 그만큼 거리를 좁혔다.

“멈춰라.”

황제의 떨리는 입술에서 공작은 두려움을 읽었다. 그 두려움은 대공이 황제에게 깊이 새겨 둔 흔적이었다. 공작이 이를 악물었다.

그는 대공이 아니다. 그것을 증명하고자 그는 황제의 명에 순종하여 더 가까이 가지 않았다.

“그렇게…….”

공작이 홀린 듯이 입을 열었다.

“그렇게 괴로우시다면, 차라리 제게 오십시오.”

그는 혼란스러워 보였다.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사람 같은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란도 마찬가지였다.

“……공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알긴 하는 건가?”

“모르겠습니다.”

공작이 자조적으로 대답했다. 아란은 기가 막혀 수려한 낯짝을 바라보기만 했다. 어찌나 어이가 없는지 분노조차 사그라들었다.

두 사람 사이에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마침내 아란이 그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허탈하게 웃었다.

“공이 이리 분별없는 사람인 줄은 몰랐는데.”

공작 역시 제가 내뱉은 말이 얼마나 현실성 없고 한심한 이야기인지 알고 있었다. 삼십 해를 다 채우지 못한 인생 중 가장 어리석은 말이었다.

황제는 무력하고 대공은 무소불위의 권력자였다. 황제를 그에게서 빼앗으려 한다면 분명 적지 않은 대가를 내놓아야 할 것이다.

사일러스 공작은 건국 당시부터 위세를 떨쳤던 공신 가문의 주인이자 제국에서 두 번째로 부유한 도시의 영주였지만, 그 모든 조건을 합쳐도 로아크 대공에 비할 바는 못되었다.

무엇보다 황제는 대공과 척을 져가면서까지 얻을 가치가 없었다. 황가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지금, 그녀는 대공이 없으면 당장이라도 황위에서 끌어내려질 수도 있는 위태로운 처지였다.

아니, 애당초 그녀는 황가가 풍비박산 나기 전에도 황실의 재산처럼 취급받으며 팔려가는 신세이지 않았나. 황제 역시 제 처지를 뼈저리게 알고 있기에 대공의 무도한 행위를 견뎌왔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 이해할 수 없게도 공작은 제가 한 말을 무르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되레 그 상황을 묵묵히 감수했을 황제가 더 애처롭게만 느껴졌다.

“그 자리가 버거우시다면, 버리고 제게 오십시오. 폐하.”

그는 다시 한번 어리석은 말을 꺼냈다. 이제 황제는 실소조차 짓지 않고 표정 없는 얼굴로 식은 찻잔만 내려다보았다.

“황제가 황위를 버리면 어찌하라는 말인가.”

“원치도 않는 지위 때문에 괴로워하느니 차라리 버리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내가 원하여 올라간 자리가 아니듯, 내려오는 것 역시 내 뜻이 아닐 거야.”

오랜 체념이 깃든 어조에 공작은 목이 꽉 메는 것 같았다. 얼마 전에야 존재한다는 걸 깨달았는데, 그 마음이 예상보다 훨씬 크고 깊어 괴로웠다.

“……그는 폐하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다른 흥밋거리가 나타나면 주저 없이 폐하를 버릴 겁니다.”

“그 말이 맞다. 하지만 짐이 그대에게 가고 나면 무엇이 바뀌지?”

담담한 황제의 목소리가 꼭 그를 비웃는 것 같았다. 공작은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짐이 공에게 가면 짐을 억압하는 이가 대공에서 공으로 바뀔 뿐, 결국 짐의 처지는 그대로가 아닌가.”

“……아닙니다. 절대 그럴 일 없을 겁니다. 저는 폐하께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공의 의도가 그게 아니라 하더라도, 사람들이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또한 지금은 공이 짐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그럴 수 있을까? 짐을 위해 공이 포기해야 할 것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있겠느냔 말이다.”

“…….”

차분히 현실을 일깨우는 황제의 말에 공작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오늘 있었던 일은 전부 없던 거로 하겠네.”

이제 황제는 완전히 침착함을 되찾았다. 그의 어리석음이 황제의 이성을 되돌렸다.

“그리고 짐이 허락할 때까지, 공의 수도 출입을 금한다.”

냉랭한 목소리에 공작은 정말로 돌아가야 할 때가 왔음을 깨달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말했다.

“저의 어리석음을 용서해 달라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저의 제안이 언제든 유효하다는 것은 기억해 주십시오.”

황제는 대답할 가치가 없다는 태도로 돌아섰다.

공작은 패잔병처럼 그녀의 곁을 떠났다.

혼자 남게 된 아란은 비로소 한숨 같은 흐느낌을 토해냈다. 짓밟혀 더러워진 넝마가 된 기분이었다. 그러나 아직은 황제로서 행세해야만 하는 시간이 남아 있었기에 의연하게 눈물을 참았다.

그녀는 제법 훌륭하게 감정을 추슬렀으나, 그것이 너무 벅차 열린 창문 너머로 시녀 한 명이 숨어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는 건 알지 못했다.

* * *

공작은 전에 없이 무거운 기분으로 복도를 걸었다. 거절당했다는 사실보다, 그녀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함이 그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느린 걸음으로 막 응접실 앞 회랑을 지났을 때, 그는 벽에 기대 서 있던 대공을 발견했다.

“이제 돌아가십니까.”

“예.”

“당분간 수도에는 오지 않을 예정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공과 딱히 친분이 깊던 것도 아닌데, 어쩐지 서운하군요. 꽤 마음이 맞던 사람이라 그런가 봅니다.”

전혀 서운하지 않은 태도로 대공이 말했다. 심드렁한 표정은 얄팍한 가식조차 꾸며낼 생각이 없다는 걸 여실히 알려주었다.

“그렇게 생각하셨다니 의외로군요. 하지만 저 말고도 대공과 마음이 맞는 자는 얼마든지 있을 겁니다.”

“글쎄요. 있다 해도 아마 드물겠지요. 난 공 같은 사람을 좋아합니다. 분수를 알고, 나서야 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를 구분할 수 있는 사람 말입니다.”

은근한 멸시가 섞인 어조에 공작이 미간을 찌푸렸으나 대공은 개의치 않고 재차 입을 열었다.

“무슨 뜻인지 아시리라 믿습니다. 공은 누구보다도 눈치가 빠른 자이니까요.”

“…….”

“그럼, 부디 몸 건강히 다나르에 도착하길 바랍니다.”

그 말을 끝으로 대공은 자리를 떴다.

공작은 한동안 그곳에 서 있다가, 이내 빠른 걸음으로 황궁을 나섰다. 그리곤 거칠게 말을 몰아 다나르로 향했다.

* * *

사일러스 공작이 떠난 지 하루가 지났다. 그날 이후 아란의 고민은 한층 더 깊어졌다.

밤이 깊었는데도 잠이 오지 않자 그녀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등잔불을 밝혔다.

그 때, 침실 문밖에서 누군가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란이 미처 겉옷을 걸치기도 전에 문이 거칠게 열렸다. 대공이 싸늘한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란은 조금 당황했다. 대공이 다짜고짜 그녀를 찾아온 거야 하루 이틀이 아니었지만, 이렇게 노크조차 하지 않고 들이닥친 건 처음이었다.

“……무슨 일이야?”

그는 대답하지 않고 곧장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놀란 아란이 본능적으로 그 손길을 피하려 했지만 금세 붙잡히고 말았다.

“왜 갑자기, 앗……!”

커다란 손에 침의가 벗겨졌다. 순식간에 드러난 몸을 그가 집요하게 훑었다.

미처 대비할 틈도 없이 나체가 된 아란이 몸을 웅크리며 팔로 가리려 하자 대공이 곧바로 붙잡아 제지했다.

한 손에 다 잡힐 것같이 가느다란 목부터 움푹 튀어나온 쇄골, 희고 아담한 가슴, 완만한 곡선을 그리는 등과 엉덩이, 은밀한 다리 안쪽까지 그의 눈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중에서도 그는 입술 자국이 수도 없이 찍힌 목덜미와 쇄골 쪽을 유심히 살폈다. 눈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지, 손을 내려 문지르고 코로 냄새를 맡았다. 이리저리 몸을 돌려가며 그러는 모습이 꼭 무언가를 확인하고 있는 것 같았다.

“뭐, 뭐 하는 거야?”

아란이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최근에 그가 이렇게 거칠게 굴었던 적은 없었기에 당황스러움은 배가 되었다. 그 와중에 다시 한번 몸이 뒤집혔다. 그녀는 맥없이 그가 움직이는 대로 흔들렸다.

“왜 이러는 거냐니까?”

그는 말없이 몇 번이나 같은 짓을 반복한 후에야 느지막이 다시 침의를 입혀주었다. 그러나 이미 아란의 얼굴은 당혹과 분노로 잔뜩 상기된 후였다.

“도대체 사람을 이런 식으로…….”

“사일러스 공작과 무슨 대화를 하셨습니까?”

대공이 그녀의 말을 끊으며 싸늘하게 물었다. 아란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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