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아란은 대공과 함께 후원을 거닐면서도 자꾸만 집무실이 있는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인사도 하지 못하고 돌아갔을 공작이 조금은 마음에 걸린 탓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아무것도 아니야.”
공작을 만나기로 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갑자기 대공이 찾아오는 바람에 얼떨결에 후원까지 끌려 나왔다. 공작과 선약이 되어있다고 말했는데도 막무가내이기에 무슨 대단한 용건이라도 있는 줄 알았는데, 그는 평소와 다름없는 말들만 늘어놓았다. 물론 전부 국무에 관련된 것들이었으니 흘려들을 수는 없었다.
“다나르 연안 주변의 해적들이 극성이란 말은 들었지만, 너무 과하게 지원하신 것 아닙니까.”
“적당히 쫓아내면 또다시 기회를 노리겠지. 이참에 뿌리를 뽑을 생각이다.”
“뿌리를 뽑는다……. 폐하답지 않게 과격한 방식이로군요.”
“그래. 사람의 목숨은 다 소중하지만, 짐은 황제이니 제국민들의 목숨과 재산을 최우선으로 지켜야 하지 않겠나. 게다가 다나르는 짐에게 많은 것을 알려준 곳이기도 하고.”
“다나르가 마음에 드십니까?”
“그래. 야시장은 너무 힘들었지만, 바다만큼은 정말 아름다웠어.”
바다를 떠올리는지 아란의 눈동자가 아득해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대공이 복잡한 낯을 했다.
그 역시 다나르의 바다를 생생히 기억했다. 밀려드는 파도와 그 위를 찰박거리는 작고 보드라운 발, 그리고 그를 돌아보던 황제의 모습까지.
모든 것이 선연한데, 일부러 지운 것처럼 황제가 웃던 얼굴만 흐릿했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다시 한번 가 보고 싶구나. 그날 본 석양은 절대 잊지 못할 거야.”
“그리 마음에 드셨습니까. 그렇다면 그곳의 영주는 어떠셨습니까?”
여러 의미를 내포한 말이었다. 아란이 깊은 한숨을 쉬며 조금 떨어진 곳에서 뒤따르는 시녀들이 들을 수 없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제발. 정말이지, 그대가 왜 자꾸 사일러스 공의 이야기를 꺼내는지 이해할 수 없어. 그리고 공작의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우리를 훔쳐본 자는 언제쯤 찾을 수 있는 거야?”
“…….”
드물게도 대공이 입을 다물었다.
그 역시 이렇게 오래 시간을 끌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사람을 풀어 당시 공작성 안에 머물던 자들의 목록을 전부 찾아 뒤졌지만, 그들 중 밤사이 황제의 침실 근처를 오갔다는 사람은 나오지 않았다.
대공은 황제가 불안한 마음에 헛것을 본 게 아닌가 의심하기도 했다. 워낙 심약한 그녀이니 그렇다 해도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황제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그 목록에서 조사하지 않은 인물은 이제 단 한 명만이 남았다. 사일러스 공작.
공작이 훔쳐보았다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적어도 황제가 헛것을 보았을 거라는 가정보다는 그편이 현실성 있었다. 또한, 이렇게 아무 말도 새어 나오지 않고 조용한 걸 보면 더더욱 그랬다.
대공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만약 정말로 공작이라면, 도대체 그 시각에 그가 황제의 침실은 왜 찾았단 말인가?
그렇게 생각하자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끓어올랐다. 차라리 다른 귀족, 아니 비천한 노예가 감히 그녀를 훔쳐봤다 해도 이리 화가 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대공은 황제에게서 고개를 돌린 채 허공만 노려보았다.
그는 처음부터 사일러스 공작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공작이 황제에게 내심 호의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대공은 처음부터 알아차렸다. 다만 그것이 이성적인 감정은 아닌 데다, 이해타산적인 공작이 황제에게 직접 호의를 드러낼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해 모르는 척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냥 두고 보기가 힘들었다.
다나르에서 황제를 보던 그의 눈빛이 떠올랐다. 거기다 공작이 그녀의 은밀한 얼굴을 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그 마음이 어떻게 변질되었을지 알 수 없어졌다.
당장이라도 사일러스 공작을 죽이고 싶어 조바심이 났다. 그가 진짜 범인이 아니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만약 공작이 스스로 영지에 처박혀 있을 거라는 뜻을 내비치지 않았다면 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공작을 제거하기로 마음먹었을 것이다.
그래도 감히 황제를 훔쳐본 벌은 받아야겠지.
어떤 벌을 내려야 할까.
대공은 고민에 잠겼다. 그러면서도 사일러스 공작이 진짜 범인이라고 밝혀진다면, 황제에게는 그 사실을 숨길 생각을 했다. 그 일을 계기로 그녀가 공작을 완전히 멀리한다면 기꺼운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그녀가 받게 될 충격이 염려되기도 했다.
왜 제가 그런 걸 걱정하고 있는지는 몰랐지만, 아무튼 황제가 지금보다 더 야위는 꼴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도 황제는 툭 건드리면 부러질 것 같았다. 며칠째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잠도 설쳤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꿋꿋이 걷던 아란이 갑자기 크게 휘청거렸다. 다행히 대공이 서둘러 부축한 덕에 바닥을 뒹구는 일은 없었다.
“괜찮으십니까, 폐하?”
“아, 괜찮네…….”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낯빛은 창백했다. 고작 후원을 몇 걸음 걸은 것만으로 이렇게 지칠 거라곤 생각 못 했기에 황제도, 대공도 당황했다.
“오늘 일과는 여기서 끝내고 그만 들어가시지요.”
그가 황제를 부축하며 말했다.
지금쯤이면 공작도 황제를 만나는 것을 포기하고 돌아갔을 것이다.
“혼자 걸을 수 있어.”
아란이 허리를 감싼 대공의 손을 밀어냈다. 이미 서로의 몸을 샅샅이 아는 사이니 이 정도 접촉이야 대수로울 것도 없었지만, 그녀로서는 보는 눈이 있는 곳에서 이렇게 그의 품에 안기다시피 하는 건 정말 내키지 않았다. 아무리 두 사람의 관계를 이미 알고 있는 시녀들뿐이라고 해도 그랬다.
“제가 부축하겠습니다.”
“혼자 걸을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아란이 조금 더 강경한 어조로 말했다. 대공은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허리를 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그러다 넘어지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요. 자세가 불편하신 거라면 업어드리겠습니다.”
“…….”
그것만은 절대 사양이었다. 별수 없이 아란은 대공에게 몸을 기댄 채 걸음을 내디뎠다.
대공은 그녀가 그간 얼마나 야위었는지 가늠하려 이따금 바싹 마른 허리를 슬쩍 문질렀다. 그럴 때마다 아란이 파르르 몸을 떨었다.
그리고 몇 걸음 가지 않아, 두 사람은 후원 입구에 서 있던 사일러스 공작을 발견했다.
대공의 낯은 순식간에 싸늘해졌고, 아란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일러스 공? 아직 돌아가지 않았나?”
“이대로 인사도 드리지 않고 돌아가면 계속 마음에 걸릴 것 같아 왔습니다.”
공작이 조금 무뚝뚝한 어조로 대답했다.
“돌아갈 길이 멀 텐데, 기다리게 하여 미안하게 되었네.”
아란은 그 와중에도 제 허리를 단단히 감고 있는 대공의 팔을 밀쳐내려다, 후환이 두려워 그만두었다. 공작 앞에서 그는 특히 예민하니 늘 신중해야 했다.
“폐하께서 몸이 불편하시니, 인사는 짧게 올리는 게 좋겠습니다.”
대공이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짐은 괜찮네. 대공이 괜한 걱정을 하는 거니 신경 쓰지 마시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들어가서 차라도 한 잔 들면서 이야기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아란이 조심스레 제안했다. 이미 한 번 헛걸음했을 공작을 길바닥에 세워 두는 건 너무 미안한 일이었다. 이대로 그를 돌려보낸다면 두고두고 마음에 걸릴 것 같았다.
슬쩍 올려다본 대공은 생각을 알 수 없는 표정만 짓고 있었다. 아란은 속으로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이런 일까지 눈치를 봐야 하는 제 처지가 답답했다.
“그렇다면 응접실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간접적인 허락이 떨어지자 아란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이대로 그에게 부축을 받으며 응접실까지 가는 건 곤혹스러웠지만, 오래 보지 못할 신하에게 조금이나마 성의를 보여줄 수 있는 건 잘된 일이었다.
* * *
“제가 폐하께 인사를 드릴 수 있도록, 잠시만 자리를 비켜주십시오.”
응접실에 도착한 후, 공작이 대공을 향해 말했다.
“알겠습니다.”
의외로 대공은 순순히 그의 청을 들어주었다.
막상 공작과 둘만 남게 되자 아란은 내심 불안해졌다. 현기증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지만 하필이면 대공에게 안겨 있는 모습을 사일러스 공작에게 보이게 될 줄은 몰랐다.
뭐라고 변명하지? 대공과 후원에 함께 있었던 건 단순한 우연이었다고?
그렇지만 묻지도 않았는데 변명하는 게 더 이상하게 들릴 것 같았다.
하긴, 이제껏 대공이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그녀를 에스코트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공작은 신경 쓰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 오늘 보고 나면 한동안은 못 보겠구나. 언제 떠날 생각이지?”
“황궁을 나서면 곧바로 떠날 생각입니다.”
“생각보다 빠르구나. 짐 때문에 시간을 지체하게 하여 미안할 따름이네.”
아란이 진심으로 말했다.
“아닙니다. 달을 보며 여정에 오르는 건 운치가 있어 좋아합니다. 수도의 밤하늘은 아름답지요.”
“맞아. 그렇지만 짐은 다나르의 밤도 마음에 들어. 다행히 오늘은 보름달이 뜨는 날이니 가는 길이 아주 어둡지는 않을 걸세.”
온화한 어조로 말한 황제가 옆에 놓인 찻잔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가느다란 목을 온전히 감싸지 못한 옷깃 사이로 맨살이 언뜻 드러났다. 그 위에 붉은 순흔이 선명했다. 적나라한 흔적에 공작은 한순간 말을 잃었다.
“부디 그대의 말이 밤눈이 밝길 빌어.”
농담이 너무 재미가 없던 탓일까, 공작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이 길어지자 아란은 의아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을 눈치채곤 황급히 손으로 가렸다. 그러나 이미 전부 들킨 뒤였다. 순식간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가 곧 희게 질렸다.
공작의 시선이 곧 그녀의 얼굴로 향했다. 황제의 눈동자에 떠오른 건 분명 모멸감이었다.
그 눈을 보는 순간 공작은 깨달았다. 두 사람은 연인이 아니었다.
아니, 그런 게 중요할까.
공작은 기형적인 황제와 대공의 권력 관계를 떠올렸다. 황제는 명목상의 통치자일 뿐, 실권은 전부 대공이 쥐고 있었다. 황제와 대공이 무슨 관계든, 두 사람의 저울은 절대 수평을 이룰 수 없었다.
“대공의 짓입니까?”
우선 황제의 맨몸을 본 것을 사과하려 했으나 입 밖으로 튀어나온 건 전혀 다른 말이었다.
황제가 두 눈을 부릅떴다. 그러나 공작은 질문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가 폐하를 탄압하고 있는 겁니까?”
그녀의 상대가 대공일 거라고 확신하는 물음에 아란 역시 깨달았다.
“공이었구나.”
깨달음과 동시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